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4)
4.
조슬혜의 오디션은 단, 5분도 걸리지 않은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났다.
“아, 망했다.”
들어오면서도 연신 한숨을 뻑뻑 내쉰다.
“무슨 자유연기도 못하게 하냐고!”
자유연기에 대한 갈망이 컸던 모양이지만, 글쎄.
오디션을 골백번은 더 다녀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건 오디션 현장에 따라 철저하게 다르다.
연극영화과 대학 입시조차, 자유연기를 안보는 곳도 있다.
왜냐, 자유연기 하나만 몇날 며칠을 준비해서 ‘오! 제법인데?’ 싶은 배우들을 막상, 생방송이나 다름없는 치열한 현장에 내놓으면, 버벅이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괜찮아. 잘했을 거야.”
박찬익 팀장은 그런 조슬혜를 연신 다독여 주었다. 하지만 다른 신인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언니한테도 질문 했어요?”
“무슨 질문?”
“대본 읽어는 봤냐고.”
“푸하! 너한테 그런 질문 했어? 얼마나 죽 쒔으면 그런 질문을 받냐? 적당히 센스 있게 했어야지.”
“아, 쪽팔리게….”
“제 대사는 다 들어보지도 않고 끊었다고요.”
풀 대본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헷갈릴 만한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이를테면, 3회 대사 중, 이런 대사가 있다.
‘반지하? 나는 반지하도 운치 있고 좋던데?’
금수저 물고 태어난 여자 캐릭터가 정말로 반지하 집이 좋아서 이런 말을 했겠는가? 여기서는 ‘너와 함께라면’ 이라는 전제가 붙는다. 이것도 모르고, 푼수같이 헤벌쭉 웃으며 ‘나는 반지하도 좋아!’ 라고 외친다면, 서브텍스트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 배우로 찍히기 일쑤다.
다수의 신인들이 ‘탈락’을 짐작하며, 오디션 장에 대해 평가했다.
“다들 왜 이렇게 차가워?”
특히 감독님의 눈빛이 너무 차갑다며, 벌써부터 나를 겁주기 시작한다.
으으, 긴장 돼.
그에 반해, 임주원은 여유로웠다.
“확정된 배우는 많데요? 일단 문교 형이 주연 확정이고… 아, 그럼 회식은 며칠 안에 하겠네? 촬영 스케줄이랑 겹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마치, 자신은 반드시 붙을 것이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임주원이 오디션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 보다 표정이 좋아보였다.
“잘 봤나 보네?”
박찬익 팀장의 질문에 임주원이 알 듯 모를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 제작 PD님이 [힘쎈 삼복이> 보셨더라고요. 저 알아보시던데요?”
“아 정말?”
“예, 연기 끝나니까. 드라마 잘 보고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야, 느낌 좋은데!”
“역시! 주원이 오빠는 붙을 줄 알았어!”
“….”
오직 나 빼고 모두들 축제 분위기다. 나 혼자 뚱해 있을 수는 없어서, 적당히 웃으며 장단을 맞춰 주었다.
하필, 차례가 마지막이라 더욱 긴장된다.
그 때, 회의실 문이 열리며, 캐스팅 디렉터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음이, 도재희?”
“아, 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보고 와.”
박찬익 팀장의 형식적인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실을 나섰다.
회의실에서 불과 10m도 떨어져있지 않은 드라마 사무실이 멀게도 느껴진다.
“경력은 많지 않구나?”
내 프로필을 간략하게 훑어보는 캐스팅 디렉터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대학 다닐 때 연극 조금 하긴 했었는데…”
“연극은 말고.”
“아, 네.”
“너무 긴장하지 마. 알겠지?”
그리고는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 주고는,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사무실에서는 이미 수많은 배우들의 오디션을 보았기 때문인지, 후끈후끈한 열기가 나를 덮쳐왔다. 하지만 금새 그 열기는 차갑게 변했다. 분위기 자체가 따뜻하지 않다.
기다란 사각형의 테이블이 뒤에 일렬로 놓여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수많은 배우들의 혼이 담겨있는 프로필들이 지저분하게 놓여져 있었다.
구석에 놓여있는 카메라 한 대와, 앉아있는 사람은 얼핏 대 여섯 명 정도.
제작PD와 조연출, 그리고 감독님들로 보였는데, 한 눈에 누가 감독님인지 알아보았다.
가운데에서 매의 눈으로 나를 위 아래로 훑고 있었는데, 내가 쭈뼛거렸기 때문일까 시작부터 시선을 돌려버린다.
어쩐지 분위기가 좋지는 않다.
“도재희입니다.”
내 간략한 인사에 대답한 사람은, 맨 왼쪽에 앉아있는 조연출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네… 도재희 배우님. 음, 쪽 대본은 받으셨죠?”
조연출의 질문에 내가 대답했다.
“네.”
“그런데, 안 들고 계시네요? 놓고 오셨나 봐요?”
“아… 그게. 외웠습니다.”
“네?”
“대사, 다 외웠습니다.”
“… 아.”
내 말에 조연출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리고 돌아갔던 감독님의 시선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아주 무표정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김도훈 역에 지원하셨는데, 대사 량이 적지 않은데 다 외웠나요?”
“네.”
“보고 하셔도 무방합니다만, 어쨌든. 그럼 한번 볼까요?”
아주 중저음의 차가운 목소리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매서운 눈빛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역시.
나는 가볍게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리고 내 몸, 손가락 하나하나에 들어있는 ‘김도훈’을 끄집어 올렸다.
그리고 그 김도훈이라는 역할은 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와 이내 분출되기 시작했다.
“1회 17씬부터 읽겠습니다.”
조연출이 상대방 대사를 드라이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대사를 한 올 한 올 음미하며, 받아쳤다.
비록 조연이라 할지라도, 메인 스토리 뒤편에서 나름대로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남주 순위로 따지자면, 세 번째.
대본에 기재되어 있는 굵직한 이미지들은, 동물처럼 반응했으며, 대본에 없는 특징들은, 김도훈과 ‘도재희’라는 내가 만나 상호작용을 일으키듯 생성됐다.
“다음은, 2회 6씬입니다.”
그리고 씬이 하나하나 진행 될수록, 얼어붙듯 차가웠던 오디션장의 분위기는 점차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은 3회 25씬.”
저 사람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일까.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아도 연기를 진행하면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거 될지도 모르겠다.’
감독님의 입에 아주 작지만, 미소가 걸려있었고. 감독님 옆 자리에 앉은 40대의 여인은 귀여운 막내아들의 재롱잔치라도 보듯, 아주 크게 함박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씬입니다. 4회 33씬”
4회는 ‘김도훈’ 역할이 아주 매력적인 역할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장면이 있다.
담담하게 시작하는 대사는 점차 폭발력을 가지고, 종장에는 열과 성을 토해내는 장면. 흡입력 있는 연기가 필요한 장면이었고, 내가 연기를 마쳤을 때는 감독님의 입이 아주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마치, ‘오…’ 라고 말을 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잘 봤습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감독님의 마무리와 동시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감독님 옆 자리에 앉아있던 40대 여자에게서 나온 박수였다.
“와! 정말 소름 돋았어요.”
나는 무리 없이 저 여자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디션 장에서 감독님 옆자리에 앉아있으며, 감독님이 코멘트를 하지도 않았는데 탄성을 내지를 만큼 영향력 있는 여자.
작가다.
“어떻게 미세한 부분 까지 캐치해냈죠? 1회에서 ‘이별에 대한 아픔, 겉으로 드러나는 질환이 있다.’ 라는 문장이 있는데, 감정이 커질 때 눈을 습관적으로 껌뻑이면서 약간, 틱? 그런 걸로 표현하신 거 맞죠?”
작가의 질문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하신 이미지가 어떤지 몰라, 제 마음대로 해보았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
“훌륭해요. 제가 글을 쓰면서 그리던 이미지가 바로, 그런 이미지였어요.”
작가의 극찬에 제작 PD를 포함하여 조연출의 입이 환하게 밝아진다.
‘드디어 찾았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감독님의 코멘트는 나오지 않은 상황.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감정을 숨기며 기다렸다.
감독님이 입을 열었다.
“대사, 언제 다 외웠어요?”
“이틀 전에 다 외웠습니다.”
“… 그래요?”
감독님이 캐스팅 디렉터를 바라보았고, 캐스팅 디렉터가 말했다.
“어어… 각 기획사들한테 4회 완고까지 다 보낸 게, 이틀 전이거든요? 그럼, 하루 만에 다 외운 셈이네?”
… 본의 아니게도 그런 셈이다.
대사 못 외워 온 친구들아, 미안.
“대단하네요. 대사 외우는 것도 그렇고, 분석하는 것도 그렇고. 수준급인데?”
제작 PD가 은근히 나를 치켜세웠고, 드디어 감독님의 입에서 칭찬이 흘러나왔다.
“훌륭하네요. 잘 봤어요.”
짧지만, 내게 있어 더 없이 강렬한 칭찬이었다.
잘 봤어요, 라는 말이 감독님의 약속된 엔딩멘트였는지, 캐스팅 디렉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안내해 주려했지만, 감독님이 막아섰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아, 네. 하십시오. 감독님.”
캐스팅 디렉터는 황급히 자리에 앉았고, 나 역시 얼떨떨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질문이었다. 감독님이 물었다.
“지금 보니까 ‘김도훈’ 역할에 대해 아주 충실하게 분석한 것 같은데… 만약, 대사가 조금 늘어나거나, 캐릭터 자체가 바뀌어도 해낼 수 있어요?”
이 질문, 어쩐지 느낌이 좋다.
나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러자 처음으로 감독님의 입에서 환한 미소가 걸렸다.
“평소 때와, 연기할 때의 눈빛이 180도 달라지는 것이 마음에 드네요. 좋아요, 나가보세요.”
“… 감사합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스팅 디렉터가 나를 문 밖까지 안내해 주었고, 마지막 차례라 그런지 회의실로 돌아가는 것은 나 혼자였다.
“수고했어.”
내 어깨를 두드리는 캐스팅 디렉터와, 닫히는 문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어디서 저런 배우가 튀어나왔지?”
“데뷔한지는 꽤 되었는데, 왜 이제껏 몰랐을 까요?”
이런 대화들이었고, 이내 문이 닫혔다.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이들의 대화를 더 엿듣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이제껏, 연기를 하면서 이런 극찬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만약 여기서 떨어진다고 해도, 더 이상 아쉬울 것 없을 만큼 좋은 시간이었다.
회의실로 돌아가자, 박찬익 팀장을 포함하여, 후배들이 내 등장을 주시했지만, 모두들 그다지 기대하지 않는 눈초리였다.
그저, 담담하게,
“꽤 오래 걸렸네?”
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가요.”
[ 책 먹는 배우님 – 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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