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42)
42.
이즈음에 [무비 노티스>라는 영화 예고 전문 프로그램에서 [피셔>의 티저 영상과 함께 배우 인터뷰를 담은 영상을 공개했는데.
“와, 잘 빠졌다.”
영상은 마치, 잘 빠진 스포츠카를 보는 듯 했다.
짤막하게 공개된 티저 영상과 함께 삽입된 문구.
[2018년 추석을 강타할 올 여름 최고의 범죄 오락 영화!]체크무늬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조승희가 서류 가방을 펼치며.
쾅!
“정의? 돈 앞에서 정의는 없어.”
[조승희!]“이 사회를 좀먹는 좀 벌레 새끼들이 몇 있는데, 네가 그 중 첫째야.”
[임강백!]“… 우리 피셔 많이 컸구나. 공사 칠 때 배경이나 그리던 어린놈이.”
[임명한!] [그 누구도 믿지 마라!]화려한 주연들의 짤막한 하이라이트 영상이 지나가고.
다음은 조연의 차례.
“우리는 대장이 죽으라면, 정말 죽는 거야.”
“대장 혼자 홀라당 튀어버리면 우리는 뭐가 되냐고!”
[배명우! 도재희!]내 이름도 함께 들어갔다.
영상의 마지막에는, 중국에서 찍었던 화려한 액션과 함께.
“이야아아아아!”
내 울부짖는 감정 연기도 한 컷 포함되어 있었다.
재익이 형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와! 이 정도면 티저도 수작 인정!”
2018년 최고의 기대작으로 뽑히는 [피셔> 티저 영상은 포털사이트 검색어를 장악했으며, 실시간 검색어 상단에서 두 시간 넘게 내려올 줄을 몰랐다.
cncjsdl : 극장을 가라고 아예 등 떠미는 수준. ㄷㄷ
aksgdl : 어머, 이건 꼭 봐야해! 승희 오빠! 날 가져요!
gowntpdy : 와, 조승희.. 임강백… 캐스팅 진짜… ‘도졌다!’
나는 휴대폰의 스크롤바를 내릴 때 마다 새롭게 갱신되는 어마어마한 댓글들을 확인하며 혀를 내둘렀다.
괜히, 천만 감독의 차기작이 아니라는 건가.
엄청난 관심이다.
재익이 형이 연신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 정도면, 손익 분기점은 무리 없겠는데?”
손익분기점, 420만 명.
스케일이 큰 영화라 손익분기점 자체도 부담스러운 수치긴 하지만, 감독과 배우 이름이 있으니 가능하긴 하겠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라고.
내가 물었다.
“그나저나, 저희 언제 들어가요?”
내 질문에 재익이 형이 시계를 확인했다.
“음, 슬슬 연락 주기로 했는데… 잠시만 통화 해 볼게.”
우리는 MKC 미니시리즈 [숨 닿을 거리>의 감독과 메인작가님 미팅을 위해, 상암동의 어느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다.
이 오피스텔이 [숨 닿을 거리>의 작가 사무실인 셈인데, 무슨 회의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벌써 15분 넘게 지하에서 대기 중이다.
통화를 마친 재익이 형이 문을 열며 말했다.
“이제 올라와도 된데. 가자.”
“아, 네.”
우리는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를 통해 곧 바로 13층으로 올라왔다.
한 달 월세만 80만원이 넘어간다는 아파트형 오피스텔. 1303호.
똑똑똑.
재익이 형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며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은 젊은 여자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혹시… 보조 작가님?”
재익이 형이 묻자, 보조 작가라 불린 여자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다.
끄덕, 끄덕.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재익이 형과 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입구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뭘 안 다고 그러세요! 제 작품입니다!”
“너 이딴 식으로 싸가지 없게 나오면! 이 바닥 일 오래 할 수 있을 것 같아!”
찬바람이 쌩쌩 부는 대화가 벽 너머로 미세하게 들려온다. 재익이 형이 놀랐다는 듯 걸음을 멈추며, 보조 작가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그러자 보조 작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양 손으로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으으. 죄송합니다. 일단 잠시 저기 저 쪽 방에 들어가 기다리시겠어요?”
“아, 네.”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접이식 침대인 라꾸라꾸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방으로 안내 된 나와 재익이 형은 잠자코 자리에 앉아 둘러보았다.
썰렁하다.
곧이어 문이 열리며 예의 그, 보조작가가 들어왔다.
“음료수 좀 드세요오.”
피곤에 절어보이는 보조 작가가 음료수 캔 두 개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죄송해요. 작가‘님들’이 사이가 안 좋으셔서… 감독님이 말리고 계세요.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아, 네. 넵. 물론입니다.”
그리고 보조 작가는 진절머리난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방을 나가버렸다.
“….”
이게 뭐야.
잠시, 정리해 보자.
오늘 이 자리는 주연 배우인 나와 감독&작가가 서로 얼굴을 처음 마주하는 중요한 미팅 자리다.
그런데, 작가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하물며 매우 잦아보인다.
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이 일 때문인듯 보였고.
재익이 형에게 물었다.
“형,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작가님들? 작가님을 왜 ‘복수’로 칭하죠? 메인 작가는 한 명 이잖아요.”
내 질문에 재익이 형이 말했다.
“이거, 공모전 작품이잖아.”
그래.
MKC 단막극 공모전 대상 수상작 [숨 닿을 거리>.
그게 뭐, 어떻다고.
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재익이 형을 바라보자, 재익이 형이 말했다.
“공모전에 당선된 신인 작가를 뭘 믿고 혼자 ‘메인’에 앉히겠어? 알잖아? 드라마는 생방이라고. 쪽대본 쓰기 시작하면 멘탈 완전 부서질텐데? 공모전 작가 한 명에. 경력 있는 메인 작가 한 명. 이 작품, 메인 작가만 두 명이야.”
…. 아.
일반적인 형태는 메인 작가 한 명이 보조 작가들을 거느리고 작업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메인 작가만 두 명이다.
공모전에 당선된 ‘원작 작가’ 한 명에, 드라마 스토리를 이끌어갈 ‘경력 작가’ 한 명.
즉, 한 배에 선장이 둘인데 그러니 저렇게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 밖에.
“….”
재익이 형이 난데없이 눈을 감고 두 손을 가슴팍에 모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작가들이 싸우다가 대본이 늦게 나오는 일만 없게 하소서. 아멘.”
“….”
왠지 비일비재할 것 같은 느낌인 걸.
그 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웬 선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 한 명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 하, 이거. 드디어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나는 황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MKC [숨 닿을 거리>의 연출을 맡은 이성균 PD였다.
*
MKC 드라마국 이성균 PD.
일전에 작업했던 [청춘열차>의 문병철 감독과는 180도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기본적으로 성격이 유하고,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다.
배우에게 연기를 전적으로 맡기는 경향이 있고, 스토리 역시 작가들의 생각에 크게 의존한다.
감독은 기본적으로 ‘결정’ 하는 자리다. 근데, 그걸 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허허, 웃을 뿐이니. 오히려 이런 성격 때문에 문병철 감독보다 더 함께 작업하기 힘든 유형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
이런 본인의 예술가적 단점을, 이 PD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작가들 말을 전부 들어주다보면 양 쪽다 일리가 있어서요. 허허.”
이런 감독의 성격 탓에, 작가들이 지금 이 사단이 난 것이다.
“이건, 제 작품이니 제 뜻을 존중해 주세요!”
“네가 드라마를 뭘 알아? 드라마는 이렇게 쓰면 안돼! 상암월드컵경기장? 이거 섭외 어떻게 할 건데? 너, 지금 영화 찍니?”
당찬 패기로 무장한 젊은 신인 작가와, 노련미로 무장한 기성 작가의 다툼은.
결국, 기다리고 있는 ‘주연 배우’ 덕분에 그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일단락되었다.
“아, 안녕하세요. 도재희 라고 합니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작가들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작가들도 내 등장에 더 이상 싸우지는 않았지만, 다툼이 끝나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분위기 자체는 냉랭했다.
“큼큼.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메인’작가 박하영 입니다.”
유독 ‘메인’ 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하는 여자.
안경 너머의 살얼음을 품고 있는 눈빛.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음 화에 불치병에 걸리게 만들 것만 같은 압도적인 분위기의 40대의 ‘경력’ 작가인 박 작가 였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공모전을 통해 이름을 알린 신인 작가 쪽을 바라보았다.
미리 말하자면, 이쪽은 조금 의외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정이연이라고 합니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수수한 얼굴. 하얀 피부에 벌어진 자존심을 감추려고 굳게 다문 작은 입술. 정리한 듯 정리되지 않은 흰색 블라우스 아래 무성의하게 접혀있는 소매 끝.
이러한 ‘평범한’ 부분을 제외하고 본다면.
“…. 반갑습니다.”
드라마 작가보다 오히려 여배우에 더 어울리는 비주얼이다.
하지만. 내가 가장 놀란 점은, 젊은 여자 작가의 월등한 외모 때문이 아니다.
이 작은 체구의 ‘신인 작가’에게서 맡은 향기가 매우 익숙한 향이라는 점이다.
[숨 닿을 거리>에서 내가 연기할 주인공, ‘무명’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저는 그렇게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박 작가님.”
눈빛만으로 히스테릭을 뿜어내는 강력한 정 작가와의 의견 나눔에 있어서 한 치도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시건방지게 보이지는 않았다.
일종의 ‘자신감’일까.
“주인공이 앓고 있는 해리성 인격 장애는 싸이코 패스와는 다릅니다. 남자주인공이 싸이코 패스인 드라마를 박 작가님은 보고 싶으세요?”
“정 작가가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드라마는 임팩트야. 회당 임팩트를 주지 못하면 다음 회 차에서 시청자들에게 도태된다고. 이렇게 덩치 큰 사업에, 그저 정신 오락가락하는 남자 주인공으로 승부가 될 것 같아?”
“오락가락? 말씀이 심하시네요. 함부로 제 작품을 매도하지 마시죠.”
“매도하고 말고 할게 뭐있나. 그 수준이 그 수준인데.”
“… 그 수준 낮은 작품에 피 빨아 드시는 작가님은 뭐 그리 대단하십니까?”
“… 뭣, 뭐? 피?! 나, 나 보고… 피를 빨아?”
“아이고! 작가님들! 재희 씨 앞에 계신데, 그만 좀 싸우세요!”
“….”
정이연 작가에게서는 친근한 느낌이 든다.
나와 비슷한 면이 많아 보이는.
성공에 대한 욕망, 그리고 눈앞에서 ‘경력’ 하나로 거들먹거리고 있는 저 마녀 에게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그런 ‘독기’.
정이연 작가는 그런 ‘열망’을 온 몸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흥미로운 점.
“이런 시건방진 아마추어랑 같이 일하는 게 이래서 피곤해! 감독님! 감독님 부탁 때문에 왔지만, 저 이런 환경이라면 정말 피곤하다고요!”
박 작가는 잔뜩 화가 난 채로 팔짱을 끼고 아예 상체를 돌려버렸다.
“아이고, 정말… 미안합니다.”
천성이 유약한 이성균 PD는 내게 대신 사과를 건넸고, 정이연 작가는 한껏 붉어진 얼굴로 수모를 참아내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부르르 떨며 화를 삭인다.
나는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을 느껴 위로의 한 마디라도 건넬까도 싶었지만.
“후!”
갑자기 정이연 작가가 고개를 힘차게 들더니 눈빛을 돌변하며 말했다.
“미팅, 계속 하시죠.”
“….”
오호.
용감하기까지 하다.
정이연 작가는 내 프로필과 초고 책 대본 1-2회를 주르륵 훑더니 내게 말했다.
“주인공이 도 배우님으로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청춘열차>를 챙겨봤는데, 솔직히 안심했어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궁금합니다. 자신 있으십니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연기요. 책 읽어 보셨으면 아시다시피, 주인공이 다중인격이라… 소화하기 매우 어렵다고 알고 있습니다. 정말 ‘확실한’ 연기파 배우가 필요했고, 제작사 쪽에서도 섭외 단계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고… 또…”
정이연 작가는 내게 묻고 있다.
‘이거 어려운데. 너, 제대로 할 수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십시오.”
그리고 도리어 물었다.
“저도 작가님에게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내 물음에 정이연 작가가 말했다.
“네? 아, 네. 말씀하십시오.”
나는 시선을, 정이연 작가 옆에 앉아있는 박 작가 쪽으로 던지며 말했다.
“그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16부작 내내 ‘1화’만큼의 퀄리티를 보여주실 자신 있으십니까?”
다른 의미로는.
‘공모전에 뽑힌 1화만큼의 실력. 즉, 휘둘리지 않고 네 줏대를 보여줄 수 있느냐.’
내 눈을 사로잡은 1화 만큼의 매력.
질문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차린 정이연 작가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 작품. 절대 산으로 보내진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시원시원한 대답에 마주보며 웃으며 말했다.
“잘 부탁 드립니다. 작가님.”
“… 배우님도요.”
신인 작가와 신인 배우가 수십 억 짜리 큰 무대에서 만났다.
[ 책 먹는 배우님 – 42화. > 끝ⓒ 맛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