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43)
43.
눈을 뜨자마자 씻고 준비해 옷을 갈아입었다.
딱히 옷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맨투맨 티셔츠에 블랙 진에 챙 넓은 캡 모자를 눌러썼다.
거실로 나오자 어머니가 물으셨다.
“아들- 밥은?”
어머니는 질리지도 않는 지 아침부터 [청춘열차>를 다시보기로 시청중이셨다.
그거, 이미 몇 번이나 보셨으면서.
“나가서 먹고 들어올 거예요.”
“후후, 우리 아들 밖에서 밥은 잘 얻어먹고 다니네?”
심심하게 웃음짓던 어머니는 곧 바로 시선을 TV에 고정시키셨다.
“….”
드라마에 나오는 내 모습이 그렇게 좋으신 모양이다.
얼마나 좋으셨는지 어머니는 지난 수십 년간 드셔오시던 소주도 [이슬처럼>대신 아예, [술김에>로 갈아타셨으니, 말 다했지 뭐.
“앗! 나왔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와 박청아의 포옹 씬.
한참을 넋 놓고 TV를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돌연 뒤로 돌아보며 물으셨다.
“근데, 너 요즘은 일 안하니?”
“….”
가끔은 이렇게 빨리 일하러 가라며, 장난스럽게 독촉하시기도 하지만. 이 푼수 속에 숨겨진 진심이 어머니의 매력임을 나는 안다.
“요즘 아무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강제로 은퇴하는 배우들 많다던데. 설마 아들도 아무도 안 찾아주는 건 아니지?”
“….”
아무래도, 진짜 걱정스러우신 모양인 걸.
어쨌든, 아들의 드라마는 어머니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어머니가 1년에 영화관을 가시는 횟수를 꼽자면, 몇 번이나 될까. 두 번? 세 번?
그런 의미에서 이번 미니시리즈 선택은. 효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제법 괜찮은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마세요. 이제 곧 실컷 보시게 될 테니까.”
[청춘열차> 하나만 보시면, 너무 지겨우실 테니까.장르도 바꿔드려야지.
내 말에 어머니가 풋, 하고 웃으셨다.
“조심히 다녀와.”
*
여름 분기 방송 삼사의 미니시리즈 라인업.
먼저 2018년 초. [청춘 열차>를 통해 시청률 싸움에서 미소 지었던 SBC의 차기작은 [아빠 맞아요?>다.
전과자 출신의 철없는 싱글 대디와, 어른스럽고 조숙한 매력을 뽐내는 11세 딸. 이 어색한 부녀간의 사랑과 성장통을 그린 드라마. 주연으로 확정된 배우는 대중들에게 친숙한 40대 배우, 철형욱. 단순히 네임벨류만 따지자면 가장 위협적이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소재라 1위는 무리일 것이라는 것이 정설.
그에 반해 KTN의 [계약 동거>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따른다. 요즘 싱글 여성들이 좋아하는 소재인 ‘동거’에 ‘계약’ 이라는 설정을 함께 따왔다.
배우라인업도 KTN 일일드라마를 통해 얼굴을 많이 알린 임주원X차지애.
귀여운 케미가 돋보이는 커플에 이미 전작에서 호흡을 맞춰본 조합이라, 시장을 압도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마지막.
MKC의 [숨 닿을 거리>는 미스터리 로맨스 판타지.
해리 인격 장애를 겪는 주인공과, 이를 치료하는 여자 정신과 의사의 로맨스가 메인.
심각한 다중인격 때문에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남자주인공. 그런데 웬걸?
여주인공인 의사 앞에만 서면 쪼개지던 인격이 하나로 돌아오게 된다.
“항상 선생님 뒤에 붙어있어야겠어요. 그래야 제가… 진짜 저로 돌아와요.”
“….”
“숨 닿을 거리, 그 이상 제게서 떨어지지 말아요.”
본격, 그림자 밀착 로맨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숨 닿을 거리> 크으! 글은 확실히 좋잖아. 괜히 공모전 대상작이 아니라니까? 작가가 신인이라 그런지 번뜩이는 게 있다니까? 글 빨도 상당하고.”
“아니. 그래도 그렇지. 월드컵경기장을 장소로 쓴 건 너무 했다. 그걸 어떻게 찍으라고?”
“그건 섭외 부장이 할 일이고, 정 안되면 나중에 수정하면 되는 거지! 작가에게 그 정도 자유도 없으면 어떻게 글 쓰라는 거냐?”
회사 내부는 [숨 닿을 거리>의 두 작가들에게 지대한 관심이 쏠려 있었다.
‘과연 책은 제 때 나올 것인가?’
‘두 명의 작가들 중. 과연 누구 뜻대로 작품이 흘러가게 될 것인가?’
‘이성균 PD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는가.’
등등. 전부 뒤에서 떠들기 좋은 얘기 뿐 이다.
그리고 나는 사무실에 파다하게 퍼져있는 이런 이야기들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곧 바로 재익이 형 책상으로 다가갔다.
“에이, 왔어?”
“네.”
“집으로 갖다 준다니까. 왜 왔어? 쉬지.”
“그냥요. 갑자기 집에서 쉬려니까 좀이 쑤셔서.”
영화 촬영을 모두 끝낸 요 며칠간 정말, 백수 그 자체였다.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나무늘보처럼 휴식을 취하며 [숨 닿을 거리>의 완고 대본을 기다리는 일 뿐이니 말 다했지.
갑자기 이렇게 한가해져도 되나 싶을 정도다.
치열한 열탕과 한적한 냉탕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배우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휴식이라더라. 넌 좀 느긋하게 쉴 필요가 있어.”
“정말요? 누가 그래요?”
“오미란 선배님이 그러시던데. 작품 하나 끝나면 최소 한 달씩 휴식이 필요하다고.”
“….”
송문교를 입으로 잘게 빻아버린 우리 오미란 선배님.
그냥 쉬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선배님. 잘 지내시죠?
재익이 형이 생각났다는 듯, 메모장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아, 맞어. 혹시 너, 예능 생각 있어?”
“… 예능이요?”
“아, 어젯밤에 섭외 들어온 게 하나 있어서.”
갑자기 예능이라니.
“무슨 프로요?”
“[토크패왕>. 연예인 판정단 10인 패널.”
가장 리얼하고 재미있는 사연을 뽑는 토크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으로, 심사위원석에 앉아서 웃음 리액션을 파는 패널 판정단 열 명 중 한명.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제가 무슨.”
재익이 형 역시 기대도 안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지? 그래. 나도 거기 앉아있는 네 모습이 상상이 안 되긴 하더라. 오케이! 이건 기각.”
메모장에 줄을 슥슥 긋던 재익이 형이 말했다.
“그래도 나중에 [피셔> 개봉 할 때는 홍보 때문에라도 몇 개 나가야 할지 모르니까, 재미있어 보이는 프로그램 있으면 미리 생각해둬.”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라면 나도 오케이다.
‘명분’ 있는 예능 출연.
단순히 ‘대중적인 인기’를 위해 명분 없이 예능에 나가는 것은 ‘이미지’를 먹고 살아가는 배우 입장에서 심사숙고해야 할 문제다.
장점도 존재하겠지만, 단점도 명확한 양날의 검.
나는 굳이 ‘잠재적 위험’은 피하자는 쪽이고.
재익이 형이 내게 종이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챙기라니까 일단 급하게 챙겨봤는데… 갑자기 이건 왜?”
오늘 내가 사무실을 찾아온 이유.
일전에 나는 재익이 형에게 부탁을 하나 한 적이 있다.
회사에 굴러다니는 ‘영어’ 시나리오 있냐고, 있으면 좀 챙겨달라고.
종이봉투를 열어보니 얼핏 봐도 열권 남짓한 대본이 들어있었다.
나는 순수하게 사실대로 말했다.
“영어 공부 좀 해보려고요.”
“응? 대본으로?”
“네.”
재익이 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
정말인데.
아무래도 농담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뭐,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겠지.”
그 때, [숨 닿을 거리>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매니저 하나가 소리쳤다.
“아무튼 확실한 건! 드라마 작가는 글만 잘 쓴다고 되는 건 아니라는 거야. 뭘 믿고 신인한테 16부작을 맡겨? 이성균 PD도 못미더우니까 신인 옆에다 박 작가 앉혀놓은 거 아냐?”
원래 남 얘기가 재미있는 법이라고는 하지만.
거, 남의 사정에 참 말들이 많다.
내가 그 쪽을 바라보자, 재익이 형이 신경 끄라는 듯 손사래 치며 말했다.
“쟤들 말 듣지 마. 판이 뒤집힌 줄도 모르고.”
“네?”
판이 뒤집혔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는 외투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점심 전이지?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가서 얘기해 줄게.”
*
인근 백반 집에 들어섰다.
조금 이른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습관적으로 가장 구석자리에 자리 잡은 내가 선택한 메뉴는 오늘의 백반. 재익이 형은 불고기 백반.
뜨끈뜨끈한 불고기 백반을 입에 밀어 넣던 재익이 형이 말했다.
“오늘 오전에 [숨 닿을 거리> 팀에서 연락 왔다.”
“뭐라고요?”
“이성균 PD님이랑 정이연 작가님인데. 네 덕분에 머리가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하더라.”
판이 뒤집혔다.
그리고,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 제 덕분이요? 왜요?”
내가 그들에게 했던 말은 딱 하나다.
‘공모전에 뽑힌 1화만큼의 실력. 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네 줏대를 보여줄 수 있느냐.’
이를 우회적으로 물었을 뿐이다.
재익이 형은 내 질문이 이번 작가 다툼 ‘교통정리’의 핵심이었다고 말했다.
“네가 그거 물었을 때. 박 작가가 옆에서 같이 듣고있었는데 기분이 어땠겠어? 딱 보니까 자기 두고 하는 말인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지. 하차하네 마네, 신인이랑 둘이서 잘해보라니 말라니, 감독이랑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은 서로 건들지 못하도록 각자 영역을 정하기로 했다고 하더라.”
메인스토리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가기 마련이다.
드라마는 이렇게 되기에, 너무 쉬운 구조로 되어있다.
하물며 서로 상극인 메인 작가 두 명이 서로 마주보고 공동작업을 한다면 어떨까.
“이성균 PD도, 네 질문 듣고 아차 싶었다고 하더라. 공모전 심사할 때 정이연 작가를 뽑은 이유가 정 작가만의 미스터리 하면서도 부드러운 분위기가 좋아서였는데. 촬영 날이 점점 다가오니까, 지레 겁먹고 그걸 잠시 잊은 거지. 박 작가가 들어오면서 대본은 빨리 나왔지만, 정작 정이연 작가만의 색은 흐려졌으니까. 그걸 이제라도 잡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메인스토리는 원작가인 정이연 작가가 쓰게 되었고.
박 작가의 역할은 B팀이 촬영할 조연들의 서브 스토리와 전체적인 조언 정도의 역할만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정이연 작가는 보답하는 의미로 정말 최고의 글을 뽑아내겠다고 무한 다짐했고.”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된 것 같았지만, 재익이 형은 내게 신신당부하듯 말했다.
“자. 봤지?”
“뭐가요?”
“네 발언 하나로 바뀐 일이야. 네가 신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너는 JW에서 모셔온 특별한 배우고. 이런 주연의 발언에는 그 만큼 영향력이 있다고.”
내가 정이연 작가에게 나와 흡사한 친근함을 느껴, 별 생각 없이 던졌던 한 마디.
‘당신이 썼던 책의 ‘1회’가 내 마음에 쏙 들어요.’
이 한 마디가 누군가에겐 교통정리를 위한 신호등이 되었지만.
“박 작가가 한 발 뒤로 물러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네 말 한 마디 때문이야. 주연배우의 불편한 기색.”
“….”
누군가에겐 독이 될 수도 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너는 가급적 이런 정치에는 안 엮이는 게 좋아.”
영향력이란 파도와 같다.
어디선가 흘러나온 작은 물결에 너무나 쉽게 떠밀려 내려가기고 하고.
도저히 해결 될 것 같지 않은 일들이 한 번에 해결되기도 한다.
물론, 여주인공 캐스팅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주마저 잃을 수는 없다는 ‘공포’가 깔려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 모든 것이 내 영향력이 불러온 파장이라는 것이 얼떨떨하게 다가왔다.
“휴, 잘 끝난 일에 잔소리해서 미안하다. 나는 그냥… 네가, 문교처럼 이런 건 안 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이번 일을 통해서 배운 것은 하나.
“형, 앞으로 조심할게요.”
입 조심을 하는 것.
“아니다. 잔소리 한 것 같아서 내가 더 미안하지. 밥 먹자.”
오히려, 이런 얘기를 미리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내 매니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하나 배웁니다.
그나저나, 여주인공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어색한 공기를 깨뜨리며 물었다.
“근데 형. [숨 닿을 거리> 여주인공 안 정해졌죠?”
“응, 아직.”
“후보는 누구에요?”
“글쎄. 근데 이게 아직 확정은 안 된 모양인데. 확실한 건…. 여주에다가 돈 좀 쓰려는 모양이더라.”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돈 좀 쓰려는 ‘A급’ 이상의 여배우.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많았다.
잘나가는 배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지이이잉!
나는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딱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발신자 : 유아름.
[술김에>를 함께 했던 메인 모델이자, 나와 같은 사모임의 멤버.이 타이밍에 유아름이 왜 내게 전화를 걸었을까를 고민하기 보다는.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오히려 피식, 웃어버렸다.
에이, 설마.
[ 책 먹는 배우님 – 4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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