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45)
45.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그 사이, [숨 닿을 거리>는 포스터 촬영과 리딩을 무탈하게 마쳤다.
촬영에 들어오기 까지 제법 촉박했던 일정이었다. 메인 스토리를 건드리는 작가가 한 명으로 바뀌며, 다시 대본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신 없었지만, 뉴스라면 뉴스도 있다.
[KTN [계약 동거> 2018년 방송사 자체 최고시청률 경신!]2017년 이후, 줄곧 미니시리즈 싸움에서 패배했던 KTN이 [계약 동거>를 통해 홈런을 크게 날려버렸다.
[[계약 동거> 순간 최고시청률 14.2%] [지금은 [계약 동거> 시대! 방송 삼사 중 단독 선두!] [종영 앞둔 SBC, MKC 미니시리즈. 시청률은 오히려 하향세.]시종일관 가볍고, 유쾌하고, 경쾌한 드라마가 제대로 터진 셈이다.
[일일 막내아들에서, 미니시리즈 황태자로. 비상하는 “꽃 같은 배우 임주원” 단독]오채연 기자
임주원은 회사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계약 동거>와 함께 덩달아 날아올랐다. L&K입장에서도. KTN 입장에서도 환호성이 터져 나올 일이다.
“역시!”
“주원아! 올해는 더 크게 올라가자!”
엄밀히 말하자면, 임주원의 그 시건방진 자신감은 실속 없는 허세는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오늘.
나와 [숨 닿을 거리>는 조용히 등 뒤에 칼을 숨기며 [계약 동거>의 날개를 꺾을 준비를 마쳤다.
[숨 닿을 거리>의 첫 촬영이 있는 경기도 파주의 드라마 세트장.“오셨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지금 한창 준비 중이라, 조금만 기다리시겠어요?”
첫 촬영 전에 진행될 고사를 기다리며, 현장에 일찌감치 도착한 나는 곧 바로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이거 먹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나는 PD님 좀 만나고 올게.”
재익이 형은 내게 도시락을 건네주고는 곧 바로 대기실을 나섰다. 나는 도시락을 뜯어 계란말이를 한입 베어 물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고개를 돌리자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유아름이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짠!”
“… 아, 들어오세요.”
유아름의 손에는 도시락이 두 개 들려있었다. 보아하니, 하나는 내 것인 모양인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흔들어보였다.
그러자 유아름은 입술을 뾰족 내밀며 말했다.
“앗, 늦었네. 같이 먹어도 되죠?”
“그럼요. 얼른 와요.”
나는 자리를 옆으로 피해주었고, 유아름은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유아름의 도시락은 치킨마요네즈.
그리고 야무지게 비벼서 입에 밀어 넣는다. 나도 말없이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는데, 유아름이 물었다.
“근데… 오빠는 이 작품 왜 골랐어요?”
작품을 고른 이유?
조건이 좋았고.
잠시 생긴 공백기에 혜성 같이 나타났고.
거기다, 작품도 재미있었고.
“안 할 이유 없잖아요.”
내가 빙그르르 웃자, 유아름이 나를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려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말없이 도시락만 먹던 유아름이 대뜸 말했다.
“저도 그랬어요.”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 때 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했더니, 이번에는 정 이연 작가다.
“작가님?”
“아, 아… 식사 중이셨네요?”
달라붙는 스키니진에 하늘색 블라우스 셔츠. 여전히 수수한 피부 톤. 손에는 작가 아니랄까봐, 대본과 세트장 평면도가 들려있다.
내가 말했다.
“들어오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고사 끝나고 사무실 들어가서 먹으려고…”
정이연 작가는 대기실에 나와 유아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는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정이연 작가가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아뇨. 식사하세요. 그냥… 인사차 들렀어요. 또 언제 뵐지 모르니까.”
“… 아.”
정이연 작가는 결심이라도 한 듯, 힘 있는 얼굴로 말했다.
“대본, 열심히 쓰겠습니다.”
박 작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저번 그 일로 정이연 작가는 내게 고마움을 느끼는 듯 보였다.
다른걸 다 떠나서.
정이연 작가의 저 치열한 눈빛은 신뢰가 간다.
나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저도 열심히 연기하겠습니다.”
유아름이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작가님! 저도요!”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에서 오채연 기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여기 모여계시네.”
“… 오 기자님?”
뭐야, 왜 다들 여기로 모이는 거야.
스타매거진의 오채연 기자. L&K와 돈독한 비즈니스 파트너. 임주원을 저만치 하늘로 띄어 올린 기사도 오채연 기자의 손끝에서 나왔다.
그녀가 후후, 미소 지으며 말했다.
“우리 배우님들 식사 중이셨네요. 인터뷰 언제 하실까요? 고사 전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오채연 기자는 옆에 서 있는 정이연 작가를 슬쩍 바라보더니 미소 지으며 안경테를 고쳐 썼다.
“오. 이번 MKC 단막극 공모전의 프린세스, 정이연 작가님이시죠? 안 그래도 대화 한 번 나누고 싶었는데. 잠시 만요.”
그리고는 정이연 작가를 대기실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말했다.
“쓰리 샷 훈훈하고 좋은데요. 좁은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대본 이야기에 정신없는 배우와 작가. 그림 나온다? 나와.”
얼떨결에 정이연 작가가 내 맞은 편 의자에 앉아 함께 도시락을 먹게 되었다.
“편하게 말씀들 나누세요.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갑자기 무슨 대화를 나누라는 거야.
“푸흡”
하지만 유아름은 이 상황이 황당하면서도 즐거운 듯 보였고. 정이연 작가는 고개를 푹 숙인채 부끄러운 듯 얼굴을 잔뜩 붉혔지만,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당황스러울 뿐이고.
어색함에 몸부림치며 적당한 대화 주제를 떠올리던 내가 말했다.
“음, 도시락 괜찮은데요.”
“풉.”
“큭… 큭큭.”
그러자 장내에 있던 여자들이 모두 큭큭 거리기 시작했다.
… 왜 웃는 거야.
그 때, 복도에서 FD의 외침이 들려왔다.
“고사 시작하겠습니다!”
*
세트장 한 가운데 커다란 고사상이 차려졌다.
과일과 다과, 떡과 수육. 그리고 그 가운데 커다란 돼지머리에 막걸리까지.
FD들이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고사상 주변에 스텝과 배우들을 포함하여 빼곡하게 가득차자 제일 먼저 보조출연자 반장님이 앞으로 나서며 막걸리 병을 들었다.
“자! 먼저 우리 CP님과 본부장님!”
방송경력 삼십 년의 베테랑 반장님의 진두지휘 하에 고사는 진행되었다.
CP님과 본부장님, JW 사측 대표로 나온 이사와 이성균 PD의 인사가 이어졌다.
절을 하고, 술을 받아 마시고.
“시청률 대박 나게 해주십시오!”
“10%! 아니, 15%만 나오게 해주십시오!”
저 마다의 염원을 담아 정성스럽게 소원을 빈다.
일종의 잔치다.
“제발 사고만 안 나게 해주십시오!”
박수와 웃음이 연신 터져 나온다.
거기다, 예쁘장하게 생긴 젊은 여자 작가가 싹싹하게 술을 꿀꺽 받아 마시며.
“시청률 20%기원! 절대 대본 밀리지 않도록 제가 만들겠습니다!”
이라고 파이팅 있게 외치는데, 어찌 즐겁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푸하하!”
“큭큭큭큭!”
이 자리는, 모두가 이렇게 웃고 떠드는 자리임과 동시에.
드라마 한 작품만을 위해 바쁘게 달려갈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약속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다음은! 우리 주인공들 인사를 들어보겠습니다! 도재희! 유아름!”
특히, 우리 같은 배우들에게는.
가볍게 절을 하고, 반장님이 따라주시는 막걸리를 시원하게 받아마셨다.
“오!”
“잘 마신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유아름도 눈을 질끈 감으며 막걸리를 비워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먼저 말했다.
“좋은 작품. 좋은 사람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좋은 연기로 보답하겠습니다!”
박수와 함께 환호가 터져 나오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레시 세례가 이어졌다. 슬쩍 재익이 형을 바라보니, 재익이 형은 말 없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다음은 유아름 차례.
“다들 저 체력 약하다고 걱정들 많이 하시는데…”
약간 비장함이 감도는 목소리였다.
“보여줄게요. 제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꺄아! 감독님 말씀 잘 듣겠습니다!”
그리고 양 손을 번쩍 들며 꺄르르 거렸다.
스텝들의 얼굴이 동시에 헤벌쭉하게 변했고, 감독님마저 아빠미소로 변하며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엄청난 비타민이 들어온 것은 확실하다.
나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돼지 머리 옆에 올리며 다시 말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또 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와 유아름이 앞에서 빠져나오고, 이어서 조연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나와 유아름에게 향해있었다.
오채연 기자가 내게 슬쩍 다가와 말했다.
“오늘 멋진데요.”
고사가 끝난 뒤, 간단한 술상이 펼쳐졌다.
물론, 촬영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막걸리 몇 모금을 마시는 것이 전부지만.
“딱, 한 잔만 더 할까요?”
따끈따끈한 수육과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 보면 소주가 없다는 것이 아쉬워질 정도다.
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기에, 기꺼이 받아마셨다.
“근데 재희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요?”
“아, 올해 스물아홉입니다.”
“이야. 청춘이네.”
촬영 감독님이 내게 관심을 보여 왔고,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호의적이다.
“술도 잘 마시나 봐요? 재희 씨. 아직 촬영 널널할 때 조만간 술 한 잔 해요.”
“술? 저는요?”
촬영, 조명, 오디오. 헤드급 스텝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다.
[숨 닿을 거리>의 주인공 무명이 사람들에게 공고히 각인되는 순간.“술 좋죠. 저는 소주 좋아합니다. 하하.”
발언권, 영향력. 이제껏 가져보지 못한 이 무언가가 내 콧대를 높혀주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MKC 직원들에게 인간 도재희의 이미지가 자리 잡는 시기였고. 나는 신인의 자세로 최대한 싹싹한 얼굴로 사람들을 대했다.
고작 이 자리에 취해버리기에는 올라가야 할 곳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영화도 찍었다면서요? 한만희 감독 신작. 요즘 인터넷에서 아주 핫 하다고 하던데.”
“아, 네. 추석 즈음에 개봉할 것 같습니다.”
“이야, 나도 소싯적에는 영화 좀 했거든요. 단편이지만. 큭큭. 이번에 드라마 잘되고, 영화도 잘 되면. 올 한해 제대로 크시겠네.”
일종의 기분 좋으라는 의미의 덕담이지만.
뭐, 사실이기도 하다.
[숨 닿을 거리>의 방영 시기는 [피셔>와 맞물리도록 일부러 ‘설계’되어있으니까.일종의 연쇄폭탄이지.
하나가 터지고, 또 하나가 터지고. 종국에는 겉잡을 수없이 폭발하는 폭탄.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폭탄의 발화점 위에 서 있다.
성냥개비 하나를 들고.
“아이고-! 어쨌든, 이번 작품. 참-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제작사가 전작에서는 합평회로 외국도 보내줬다는데. 나도 발리 한번 가보게? 응?”
“이야! 발리 좋죠! 재희 씨. 잘 좀 부탁합니다.”
이들이 드라마의 성공을 바라듯.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KTN에 [계약 동거> 1회 시청률 상당하던데. 저희 첫방 예정 시기가 너무 안 좋은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물론, 시작하기 전 부터 나타나는 이런 부정적인 의견들도 있지만.
이 싸움의 결정적인 ‘구심점’이 되어줄 사람은 나와 유아름.
유아름이 막걸리 잔을 들고 슬그머니 끼어들며 말했다.
“에이, 상대 안돼요.”
“네?”
“저희가 이긴 다고요.”
유아름이 씨익 입 꼬리를 올리더니 그리고 파! 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대본이 좋잖아요! 정 작가님 만세!”
“…..”
아무래도, 조금 취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이겠지?
어쨌든, 유아름의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저희 작품도 좋으니까… 충분히 승산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질 거라고 생각 하지는 않는다.
아니, 이겨야지.
반드시.
이성균 PD도 어리숙한 얼굴로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름 씨와… 우리 재희 씨를 믿습니다.”
그렇게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이 신호탄이 향하는 방향은 하나다.
정상.
그리고.
쏘아올린 신호탄에 탄력이라도 받듯.
2017년, 치열하게 설계해두었던 이 연쇄폭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 책 먹는 배우님 – 45화. (여기까지 무료였습니다.)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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