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50)
50.
확정적인 예능 섭외 전화가 L&K 사무실로 걸려오면서 내 첫 예능 데뷔가 본격적인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예능 [톡톡 TalkTlak 누구세요?>
파급효과가 제법 큰 MKC 대표 예능 중 하나.
웃겨야한다는 부담감이 있는 프로그램도 아니었거니와, 프로그램 전반적인 포커스가 게스트 1명에게 집중되는 프로.
악마의 편집이라던지, 게스트를 공격적으로 표현하는 부분이 없는 힐링 프로그램이라, 예능 데뷔 무대만을 놓고 보았을 때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숨 닿을 거리>의 A팀과 B팀 촬영을 널뛰기 하며 촬영 스퍼트를 올리고 있던 주말 오후, [톡톡 TalkTlak 누구세요?>의 사전 미팅을 위해 MKC 7층 예능국을 찾았다.7층 센터에 위치한 제법 널찍한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잽싸게 여자 작가 한 명이 밖으로 나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는 프로그램 컨셉 상, 미팅 현장을 촬영하고 방영하니 의상 상태나, 헤어를 다듬고 준비되면 작은 B미팅 룸으로 들어오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간단하게 거울을 들여다보고는, 재익이 형과 함께 B미팅 룸으로 들어섰다.
[톡톡 TalkTlak 누구세요?> 타이틀이 벽에 붙어있는 테이블 하나가 놓인 좁은 미팅 공간.테이블에는 임영완 PD와 여자 작가들 세 명이 노트북을 펼친 채로 앉아있었다.
내 바스트를 촬영하기 위한 VJ와, 풀샷 전체를 찍고 있는 카메라도 미리 설치되어 있는 상태.
내가 자리에 앉자, 오디오 팀 한명이 입고 온 셔츠에 마이크를 달아주며 곧 바로 인사가 시작되었다.
“섭외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야 말로 감사합니다.”
“요즘 워낙, 대중들의 관심이 지대한 배우셔서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언론에 드러난 정보는 그리 많지 않아 미팅이 좀 길어질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십니까?”
미팅 예정 시간은 대략 2시간 정도.
본격적인 질문이 들어가기 전, 방영 예정 날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방영 예정 날짜는, 섭외에 수락하는 조건 중 L&K가 가장 신경 썼던 날짜인 9월 16일 일요일.
이 날짜가, 이 예능을 수락한 결정적인 캐스팅 보트가 되었다.
9월 16일인 4주차는.
[피셔>의 기자 시사회와 관객 GV가 끝나는 시점, [피셔>개봉 사흘 전, [숨 닿을 거리> 15, 16회 종영이 있는 주다.“저희 프로그램이 야외 장소를 미리 섭외해서 촬영하는 것은 알고 계시죠?”
“네.”
“혹시 생각해두신 곳이 있으십니까?”
답변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주저 없이 대답했다.
“L&K 회사 내 지하 연습실입니다.”
하지만 임영완 PD가 ‘연습실’ 이라는 대답에 조금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회사 연습실이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음,”
남들과 이렇다 할 추억을 만들지 못하고 퍽퍽한 청춘을 보낸 내게 가장 많은 추억이 있는 공간이라면.
결국 데뷔 전, 3년 여간 굴렀던 이곳이 아니겠는가.
임영완 PD가 말했다.
“정 후보가 없다면, 그곳으로 선정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프로그램이 90분 동안 방영되는데… 그림이 조금 답답할 수는 있습니다.”
임영완 PD가 일전에 방영되었던 인기 걸그룹 ‘플랜엘’을 언급하며 말했다.
“사실 일전에 그룹 플랜엘 편에서 추억이 서린 공간을 제일 처음 모인 ‘연습실’로 잡긴 했는데, 꽤 고생했습니다. 걸그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댄스 파트도 따고, 보컬 파트도 따면서 그럭저럭 넘어가긴 했지만 남자 배우는…”
즉, 연습실 같은 답답한 공간 말고, 스토리가 있는 더 다채로운 그림을 원한다는 것.
하긴, 전신거울과 요가 매트가 전부인 L&K 연습실에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나도 고민하긴 했다.
내 생각에도 심심할 것 같다.
임영완 PD가 물었다.
“아니면 연극 데뷔도 하셨던데, 대학로의 극장은 어떻습니까?”
“….”
“배우들, 이런 식으로 촬영 많이 했거든요.”
나는 대답에 앞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떻게 할까.
나 역시 생각해보지 않은 곳은 아니다.
‘아름다운 추억’과는 정 반대의 경우지만, 이 보다 할 이야기가 많은 곳도 당장 없을 듯했고.
또, 그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대학로의 모습이라던지.
[장미 컴퍼니>의 김표주 대표의 모습도 궁금하기도 했고.“배우=대학로. 이 공식이 제법 시청자들에게 먹히는 공식입니다. 아무래도 별안간에 성공한 벼락스타 보다는, 차근차근히 커리어를 다진 배우들을 신뢰하는 경향도 있고요. 무엇보다 극장이라면 다양한 그림을 따낼 수도 있을 것 같고.”
임영완 PD의 구체적인 제안에 내 대답은, 승낙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섭외는 저희가 알아보겠습니다. 아참, 저희 프로그램의 백미는 ‘몰래온 손님’ 인데요. 혹시 섭외가 가능한 분이 계실까요?”
“네.”
적합한 사람이 한 명 떠올랐다.
하지만 ‘몰래온 손님’ 이기에 이 부분 만큼은 비밀로 해두기로 했다.
그 뒤로, 본격적인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내 [청춘열차> 데뷔 과정에 대한 질문이나, [숨 닿을 거리> 캐스팅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미 언론에 파다하게 알려진 정보들이다.
이 정보들을 기반으로 하여, 촬영 때 내게 할 질문들에 대한 사전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방송용, 비방용.
이 중간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며 질문 리스트가 채워졌고, 인터뷰는 장장 2시간을 넘어서야 끝이 났다.
“고생하셨습니다. 대본 뽑히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에 완성된 대본을 텍스트 파일로 받아본 나는, 만족스럽게 오케이 했다.
그리고 대학로 대부분의 극장이 문을 닫는 월요일.
촬영 날짜가 잡혔다.
*
“자아! 도착 했습니다!”
한 때는 국민 MC라고 불렸던 강해철.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여배우이자, 지금은 스포츠 스타의 부인으로도 유명한 한소미. 개그맨 패널 양찬수.
세 명의 MC들이 대학로 길거리를 거닐며 리액션을 펼친다.
“대학로! 젊은의 거리!”
“왜 여기에 왔을까요?”
“오늘 출연자는 실력 있는 연기파 배우임이 확실합니다.”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분명 인사를 나눴음에도, 익살스럽게 모르는 척 하는 모습에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VJ 앞에서 이들을 지켜보며 걸었다.
“대학로의 여름입니다. 여러분!”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다.
싱그러운 8월 말의 여름.
한 때는 꿈을 꾸었던 공간, 대학로.
선선한 바람이 조금 그리워지는 지금. 대학로를 떠났던 여름도 딱 이랬던 것 같다.
이제는 대학로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싸기로 소문난 마로니에 공원 인근의 메인 거리를 걸었다.
비교적 이른 시간의 월요일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촬영 팀은 어디서나 주목을 받기 마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런 시선들이 조금 익숙해진 나는 시선들을 애써 흘리며 걸었다.
대학로는 크게 두 구역으로 이루어져있다.
메인 도로 인근에 위치한 상업극단과, 혜화로터리 인근에 자리잡은 비교적 변두리의 정극극단.
이 구역은, 의외로 정확하게 나뉘어져 있고. 서로간의 교류가 거의 없는 두 개의 세력이라고 보면 쉽다.
나는, 대학생활 동안 [장미 컴퍼니>라는 상업극단에서 활동했다.
그 결과는, 알다시피 좋지 못했다.
“어, 저기 있네요!”
어느새 도착한 [장미 컴퍼니> 앞.
나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건물 앞에 섰다.
“오케이!”
MC 강해철의 외침에 임영완 PD의 컷 사인이 들려왔다.
“극장 정면 인서트 딸게요.”
VJ들이 극장 [장미 컴퍼니> 정면 인서트 컷을 따는 동안 임영완 PD가 내게 말했다.
“이제 극장 안 객석에 앉아계시면 되세요. MC들이 극장으로 들어오며 게스트가 누군지 찾고, 양찬수 씨가 ‘혹시, 도재희 아냐?’ 라는 대사를 하면 뒤로 돌아보시면 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 내용에 대한 대본은 이미 머릿속에 숙지되어 있는 상태니까.
스텝들이 분주하게 극장에 자리를 잡고 촬영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나는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장미 소극장]안 좋은 추억들이 스쳐지나간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객석 제일 첫 번째 줄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영미 씨가 내게 다가와 분장 수정을 도와주었고, 옷깃을 정리해주었는데.
그 때, 무대 상수의 분장실에 서있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
고보 조명 하나만 덩그러니 켜져 있는 어두컴컴한 무대 위.
하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한 눈에 알아보았다.
상업극단 [장미 컴퍼니>의 대표 김표주.
스스로를 연극인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상은 돈만 밝히는 사업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배우지망생을 꾀어내 오퍼(스텝)로 부려먹었던 악덕 대표.
여러 가지 안 좋은 이미지만 가득 떠올랐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
의아할 정도로.
마치,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성공한 제자가 학교를 찾아온 듯한. 제자들 앞에서 어깨가 당당해지는 그런 비슷한 감격마저 느껴졌다.
아마도, 옛날 일은 다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김표주 대표가 분장실에서 슬쩍 나오더니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물었다.
“재희?”
“….”
반가워보이는 얼굴이지만.
나는 결코 순수한 목적으로 이곳에 방문하지 않았다.
나는 애초부터 그런 인간이다.
케케묵은 감정 다 떨쳐버리고 좋은 기억만 남기며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내게 남겨진 이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싶었을 뿐이다.
인기 없는 삼류아이돌에게 밀리고, 돈 앞에 이용당하며 극단을 뛰쳐나왔을 때, 김표주 대표가 내게 했던 폭언들.
‘너 이딴 식으로 해서 대학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바닥 얼마나 좁은 줄 알아? 대학로에서 오디션도 못 보게 해주마!’
그래.
인정하자.
보여 주고 싶었던 거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지 못하던 머저리가 어떻게 돌아왔는지.
그리고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그 때, 임영완 PD가 극장 내부로 들어오면서 김표주 대표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 대표님. 저는 PD 임영완이라고 합니다. 극장 촬영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재희가, 저희 극단 ‘출신’ 배우인데요 뭘. 당연히 협조 해드려야죠 하하!”
유독 ‘출신’ 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떠들고 다닌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아마도.
‘도재희는 내가 키웠어.’
‘걔? 옛날에 아무것도 모를 때, 내가 데려다 가르쳤지.’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잠시 재희랑 대화 좀 나눌 시간 괜찮겠습니까?”
“아, 네.”
김표주 대표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당장 포옹이라도 할 기색이었고, VJ 두 명이 앞으로 달려와 나와 김표주 대표 쪽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좋은 소스를 따고 싶었겠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재희야?”
김표주 대표가 내게 친근한 얼굴로 물어왔지만, 내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표주 대표가 환한 얼굴로 웃어보였다. 그리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재희야! 이게 얼마만이냐! 반갑다!”
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김표주 대표의 귀에 대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착한 척, 연기 그만하세요.”
“…. 어, 어?”
“그리고 이 손 치우시고요.”
“…..”
김표주 대표를 살짝 밀어내고, 미소와 함께 마주보았다.
“잘 지내셨어요?”
“….”
네가 좋아서 온 게 아니야.
지금 이렇게 구겨지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지.
[ 책 먹는 배우님 – 5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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