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54)
54.
차기작.
요즘 내 앞으로 들어오는 책들은 정말 물밀 듯이 들어온다고 표현할 만큼 많다.
모두 주연, 혹은 매우 매력적인 악역으로.
이것으로 1년 전에 세웠던, ‘작품을 고를 수 있는 배우’ 가 되겠다는 목표는 이룬 셈이다.
모든 배우에게는 자신에게 맞는 ‘이미지’ 가 존재한다.
흔히, ‘색깔’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때문에 신인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색안경’을 낀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쟤, 로맨스는 잘하는데 다른 것도 잘 하겠어?’
‘상업적으로 먹힐까? 너무 단색인데?’
‘감정 연기는 못하지 않을까?’
즉, 요즘 좀 잘나가지만, 이런 장르의 연기도 잘할까? 라는 불안감을 동반하는데. 이는 대다수의 배우들이 피해갈 수 없는 족쇄로 작용한다.
송문교도 로맨스만 했고, 임주원도 틀에 박힌 귀여운 남주만 소화했다. 이는 2018년의 남자 윤 프린스도 마찬가지다. 이런 고정적인 이미지를 깨기 위해서, [피셔>에 특별출연하며 내 분량을 뺏어먹으려는 강수를 둔 것이니까.
하지만, 이들과 다르게 나는 ‘예외’였다.
드라마, 영화는 장르와 연기 스펙트럼을 가리지 않고 들어왔는데, 이는 [숨 닿을 거리> 덕분이다.
일곱 가지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는 ‘무명’ 역할을 통해 다채로운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나 역시 아주 ‘천천히’ 차기작을 물색 중이었다.
조건도 붙였다.
드라마도 허용하지만, 생방으로 찍어야 하는 드라마는 제외.
100% ‘사전제작 드라마’ 혹은, ‘영화’ 만.
모두, 완성도를 확인할 수 있는 내 능력이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작품을 골라내기 위함이다.
내 능력을 확실하게 시험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혹시 마땅한 작품이 없어서 잠시 쉬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지난 1년 동안, 너무 잘 달려왔잖아.”
당연히 휴식도 보기에 포함되었다.
그랬기에 10월, 11월 동안 영화제를 다니며, 휴식과 함께 차기작 물색에만 전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던 중, L&K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임강백 씨가 꼭 섭외하라고 하시던데요.’
아무래도 그날, 탑 스타의 자존심을 제대로 긁은 모양이다.
하지만 유치한 언론플레이를 통해 나를 갉아먹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정정당당하게 싸움을 걸어오니 나로서는 거절할 명분도 없는 셈.
그럼.
“시놉시스 좀 볼까요.”
*
우선, 놀랐다.
[82/100](+2)생각보다 대본 완성도가 높아서 놀랐고, 내 비중이 절대 적지 않아서 놀랐다.
제목 [삭제>
재벌가 손자의 섹스 스캔들.
강간의 흔적과, 목격자의 기억을 지우려 하는 막장 비리 검사와, 이를 변호하는 정의로운 변호사의 치열한 법정공방을 다룬 영화.
임강백의 역할은 비리 검사였고, 나는 피해자(여주인공)의 남동생 역할이자, 극의 키(key)를 쥐고 있는 목격자.
촬영하는 씬은 고작 열다섯 씬 남짓으로 적지만.
“…. 이것 봐라.”
씬 들은 죄다 ‘검사’ 역할인 임강백과 붙는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목격자인 나를 죽이려고 오는 임강백.
법원에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의견을 묵살하는 임강백.
증인으로서 재판정에 출두하지만 임강백의 유도심문에 휘둘리는 나.
모두 임강백과의 연기 배틀.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감정 씬 뿐이다.
“이거, 너랑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는 거 맞지?”
재익이 형의 말에 내가 피식, 웃어버렸다.
“유치하네요.”
“그렇지? 근데 어쩌겠냐? 고고하신 스타께서 이렇게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데. 이런 배우들 많아. 원래 유명해질수록 어린애가 되는….”
“그래서 좋아요.”
“… 한 가지 입장만 해줄래?”
재익이 형의 말에 내가 풉, 웃어버렸다.
“제가 먼저 하자고 했는데요. 뭘.”
사실 영화 자체가 재미없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훌륭한 수준이다.
“사실 이 정도 역할이면, 네가 소화하기에 딱 알맞기는 해. 짧게 치고 빠질 수 있고. 존재감도 상당하고. 어쨌거나 ‘특별출연’이라는 명목도 있으니까.”
“촬영은요?”
“크랭크업도 진작 들어갔어. 한 이주일 넘었다고 했나?”
촬영에 들어간 지, 2주 째.
이번에는 나는 완벽한 굴러온 돌이 되었다.
윤 프린스 때와는 180도 달라진 상황에서, 내가 취할 방법은.
“할게요.”
최대한 ‘잘’ 하는 수밖에.
*
인연의 고리란 참으로 무섭다.
그리고, 이 고리는 보이지 않는 지천에 깔려있다.
부산을 방문했다.
해운대 영화의 전당.
부산국제영화제는, 단순한 국내 영화제가 아니다. 이미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권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국제영화제 중 한 곳으로 성장했다.
관객 수는 매년 증가해 20만 명에 육박할 정도고, 참가하는 작품의 ‘질’도 보장된다.
서독제가 단순한 독립영화인들의 축제였다면, 부국제는 황금의 땅이다.
어스름한 저녁.
남자 배우들은 잘 빠진 턱시도를 입고, 여배우들은 화려하면서도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관능적인 드레스를 입는다.
이 개막식에 참석하는 수많은 유명 배우들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입이 아플 정도다.
그리고 나 역시, [뉴 커런츠> 경쟁부문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작품의 주연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했다.
카니발 리무진 안에 대기한 채로, 나는 입장 차례를 기다렸다.
“아, 물을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저, 잠시 화장실을 좀 다녀오고 싶은데.”
“….”
함께 입장하는 사람이 늘씬한 여배우가 아니라,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의 박진우 연출이라는 점만 뺀다면, 그야말로 완벽한 하루.
“저기, 저희 차례 많이 남았나요?”
“네?”
재익이 형이 영화제 스텝을 붙잡고 물었다.
“감독님이 화장실 다녀오고 싶다고 하시는데, 안될까요?”
“지금은 좀 힘들 것 같은데요. 화장실은 안으로 쭉 들어가셔야 있거든요. 아아! 출발 준비하세요.”
재익이 형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으으, 괜찮습니다. 긴장해서 그런가봅니다.”
다행히 오래 지나지 않아, 차량이 조금씩 앞으로 이동했다.
“자, 준비!”
차량은 건물 사각지대에 숨어있다가.
“출발하세요!”
스텝의 사인에 맞춰 정확하게 출발한 리무진은 그대로 미끄러지듯 레드카펫 입구로 흘러들어갔다.
약속된 자리에 차량이 정차하고, 기도 한 명이 달려와 카니발의 문을 연다.
부웅! 찰칵 찰칵!
문이 열리자마자 아찔한 카메라 세례가 이어졌다.
우와, 그나저나 많기도 하다.
가운데 놓인 레드카펫, 그 좌우에 펼쳐진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나는 최대한 당당한 표정으로 걸었다.
흘깃 뒤를 살피니, 걱정과는 다르게 박진우 연출은 안정된 얼굴로 내 옆에서 함께 걸어 들어왔다.
“재희 오빠! 여기 좀 봐주세요!”
라인에 붙어있는 내 팬 한 명은 셀프카메라를 들이밀었고, 나는 워킹 도중 함께 사진을 찍어주는 여유 까지 선보였다.
포토 존에서는, 손을 흔들며 입가에 미소.
“스.마.일.”
“푸흡.”
옆에 서 있는 박진우 연출의 억지스런 미소를 보고는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제법 여유롭게 잘 해낸 것 같은데.
이 날의 부국제 개막식은 많은 진풍경을 자아냈다.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가슴이 강조된 여배우의 드레스부터, 인사를 하다 가슴골을 심하게 노출해버려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린 신인배우. 워킹 도중 관객 모두와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여유로운 중견 배우까지.
그리고 ‘초청’이 아니라, ‘참가자격’으로 방문한 나에 대한 취재 열기는, 프레스 존을 한참이나 뜨겁게 달구었다.
“수상 가능성을 어떻게 보십니까?”
“수상 여부에 관계없이 열심히 찍었습니다. 박진우 감독님의 실력을 믿습니다.”
“경쟁부문 작품 중에서 가장 ‘상업적’ 이라는 의견도 나오는데요.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상업적, 비상업적을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와는 관계없이, 좋은 영화는 자연스럽게 전해지는 법이니까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잠시만요! 질문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예정된 시간을 오버한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배우들 틈바구니에서, 함께 개막식을 즐겼다.
데뷔년도로 치면 이 중에서 가장 막내나 다름없었기에, 쉴 새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는데.
“어라, 도재희 씨?”
“반가워요. 나는 함중훈이라고 합니다.”
“재희 씨? 드라마 잘 봤어요.”
TV나 스크린으로만 보던 유명배우들이 오히려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확실히 치솟은 내 인지도에 대한 반증은.
“재희야, 실검 9위!”
바로, 실시간 검색어.
KTN을 통해 개막식 현장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는데.
아찔한 가슴골을 노출한 여배우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장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내 이름이 한 줄 올라갔다는 것은. 그 만큼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뜻이리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선포합니다!”
경쟁부문 심사위원 소개, 아시아 영화인 상 같은 시상식 행사가 이어졌다.
국내외 영화인들의 가장 뜨거운 축제, 라는 이름에 걸 맞는 화려한 시상이었다.
모든 행사가 끝이 나고, 야외극장에서 개막작 상영이 이어지려는 찰나.
“저기, 도 배우님?”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나와는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사람이 누구인지 떠올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멀끔한 턱시도를 차려입고, 인상적인 턱수염을 기른 남자.
“아.”
조금 전, ‘올해의 영화인상’을 수상한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임학두. 또한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았던 남자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내가 얼굴을 알아보자, 임학두는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였다.
“저를 알아보시네요?”
“물론입니다. 수상 축하드립니다.”
“도 배우님도 ‘독립스타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위원님 덕분입니다.”
“껄껄, 심사위원과 수상배우의 만남이니 누가 보면 오해라고 하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실은, 드릴말씀이 있습니다.”
“… 저를요?”
*
[서독제>라는 인연으로 만난 올해의 영화인, 전주 집행위원장 임학두와 함께 영화제 측에서 제공한 호텔 로비를 걸었다.임학두가 나를 찾은 내막은,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물었다.
“요즘 준비하시는 작품이 있습니까?”
특별출연을 스케줄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
“없습니다.”
“아! 잘되었네요!”
임학두 위원장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작품에 들어가지 않았기를 고대해왔던 얼굴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거창하게 포장하지는 않겠습니다. 실은, 도 배우님 섭외 하고 싶습니다.”
잠시만.
너무나 뜬금없는 제안에 내가 말끝을 흐렸다.
“섭외라 하심은….”
“[서독제>에서 도 배우님 연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특별히 편집의 힘을 빌리지 않았고, 음악의 힘에 의존하지도 않았는데, 오로지 표정과 호흡으로만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의 ‘힘’에 감탄하고는 했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직접, 영화를 준비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임창태 감독님을 아십니까?”
“….”
임창태 감독.
너무 뜬금없이 나온 이름이 얼떨떨할 뿐이지, 알다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영화를 찍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거장이 아닌가.
“이번에 임 감독님이 인생 마지막 영화를 준비하십니다. 그의 37년 영화 인생의 종지부를 고할 은퇴작을요.”
… 거장의 은퇴작.
“촬영지가 전주라, 저희가 많은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계를 이끄신 거장의 은퇴작이라 영화인 전체가 십시일반 하고 있지요.”
한국영화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역작.
임창태 감독.
그의 영화를 예술영화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 폭의 유려한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그의 영화의 특징은, 잔잔하고. 깊고. 애절하다.
그렇다고 흥행에 참패하는 감독은 아니다.
메가 히트작을 뽑아내는 감독도 아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하면 영화 인생 전체가 단두대에 걸리는 잔인한 영화판에서.
오랫동안 ‘존경’ 받아 온 그의 경력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일정 기대치는 매번 해내는 감독. 이런 노장의 영화를 기다리는 팬들은, 국내에 여전히 많다.
“그 말씀은…”
“제가 도 배우님을 감독님께 추천 드렸습니다. 감독님도 이번에 한번 뵙고 싶다고 하셨고요.”
“….”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임학두 위원장이 말했다.
“실은, 며칠 전에도 이미 도 배우님 회사에 책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회신을 받지 못했기에, 다른 작품에 들어가시는 것이 염려되어 결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이미 책을 보냈다고?
내가 물었다.
“제목이 무엇입니까?”
임학두 위원장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가제는 [사도세자>입니다. 창(唱)이 가미된 영화입니다.”
[사도세자>.부왕에게 사사된 비운의 세자.
이 드라마틱한 역사적 인물은, 그간 수많은 컨텐츠를 통해 재생산되었지만.
이 밋밋한 가제만으로는 절대 임창태 감독의 감성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비를 맞고 칼춤을 추며 서럽게 통곡하기도 했고.
뒤주에 갇혀 구슬프면서도 시원시원한 창을 뽐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실로 강렬했다.
[ 책 먹는 배우님 – 5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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