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55)
55.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마주친 이 인연의 고리가 주는 파장은 생각보다 컸다.
‘뉴 커런츠’ 심사가 진행되는 영화제 기간 내내, 나는 일종의 ‘충격’에 빠졌으니까.
계속해서 머릿속에는 ‘세자 이선’을 연기하는 내 모습이 리플레이 되듯 생생하게 그려졌다.
기본적으로, 창(唱)이 가능하다는 전제하에 진행되어야 하는 그림.
세자를 염탐하는 노론의 뱃가죽에 칼을 꽂아 넣고 광소를 터뜨리는 모습이나.
무녀를 궁으로 들여, 향락에 취하기도 하고.
걸쭉한 창(唱) 한 가락을 뽐내기도 하고, 뒤주에 갇혀 구슬피 우는 장면들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나는 아예, 상상하는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
내가 이 영화에 주목하는 점은 하나.
대본의 완성도.
[86/100](+14)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100점.
이 영화는 분명, 대중들에게 메가 히트작으로 주목받는 작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은퇴하는 영화계의 노장의 은퇴작으로 한국 영화인들의 지대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만약 내가 보는 대본에 대한 능력이 단순한 대본의 완성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내포되어 있다면.
“… 히트작이 될 수 있다.”
*
부산국제영화제 시상식과 폐막식에도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그렇다고 영화제 내내 부산에 머물 일정은 아니었다.
둘째 날 곧바로 서울로 돌아온 나는, 제일 먼저 사무실을 찾았다.
그리고 ‘책’ 에 파묻혀 한참을 움직이질 않았다.
이는, 혹시 모를 ‘보석’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내 욕심 때문이다.
단순히 [(가제)사도세자>에 콩깍지가 씌인 것은 아닐까.
이것 말고도 90점 이상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숨겨진 보석이 있지는 않을까.
범죄, 정치, 액션, 코미디, 로맨스, 역사, 공포, 스릴러, 미스터리.
장르를 가리지 않고 2019년 1월 이후에 크랭크업 들어가는 작품들을 면밀히 훑어보았다.
제법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지만, 결국에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맑아진다.
정답이 의외로 하나로 귀결되었기 때문.
“왜?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발걸음이 가벼워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도세자> 할게요.”
만약, (가제)[사도세자> 만큼이나 나를 잡아끄는 강렬한 작품이 있었다면 두 번, 세 번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없다.
그래. 거장의 은퇴작이라는 외부요소를 제외하고도 이만한 끌림은 [양치기 청년> 이후로 처음이다.
내 확답에 재익이 형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아. 훌륭한 결정이야. 안 그래도 그 영화 나도 알아봤는데… 인기가 상당하더라.”
“그래요?”
“응. 특히 주연 캐스팅에 대해서 물밑 작업이 엄청 치열했다고 하더라.”
“무슨 물밑 작업이요?”
“일단, 사도세자라는 소재가 평타 이상은 먹힐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고. 임창태 감독 은퇴작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잖아. 다들 이 작품 하고 싶어서 난리가 난거지. 임창태 감독 쪽 조연출 나이가 마흔인데, 조연출이랑 접촉해서 자기네 배우 꽂아주는 거 밀어주면, 입봉 도와주겠다고 했다나 뭐라나.”
“답변은요?”
“거절. 임창태 사단이 충성도는 알아주거든. 캐스팅은 감독님 몫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데.”
“대단하네요. 그런데, 조연출님 나이가 마흔이라고요?”
“응. 보니까 일부러 입봉을 미뤄왔던 건가보더라고. 임창태 감독 은퇴작까지 돕고 싶어서.”
“…..”
영화계에 조연출의 나이대가 사십대를 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일반적으로 연출부를 거쳐 인물조연출, 의상조연출 등을 통해 결과적으로 ‘감독’ 입봉을 준비한다.
그런데 본인 입봉 시기를 늦추면서까지, 노장의 곁을 지키는 오래된 조연출의 충성심.
이거야 말로, 임창태 사단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말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것으로 주연 캐스팅은 깔끔하게 교통정리 끝나겠네.”
애초에, 물망에 오르내리던 인원은 없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공고를 내지도 않았는데 입소문을 타버려 너도, 나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실질적인 후보는 나 하나.
보내온 대본도 L&K가 전부.
임학두 위원장의 강력한 추천을 받은 임창태 감독 역시, [양치기 청년>을 감상하고 단박에 내 이름을 콜업 했다고 했다.
‘이 친구로 가자고! 좋네! 좋아! 껄껄!’
이제, 메이저 영화에 주연으로 데뷔한다.
재익이 형이 물었다.
“근데, 정말 안 쉬어도 괜찮겠어?”
휴식기간 없이, 곧 바로 영화에 들어가도 괜찮겠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크랭크인은 어차피 1월.
“영화제랑 특별출연 촬영 끝나도 11월에 시간 비잖아요. 일주일만 휴가 주세요.”
“… 그거면 충분해? 촬영이 없다 뿐이지, 창(唱)도 배우고, 승마도 배우려면 휴식기간이 부족할거야. 각오는 된 거야?”
지난 번, [숨 닿을 거리>를 준비하며 쉬는 동안 깨달았다.
휴식은 내 체질이 아니라는 것을.
딱, 일주일만 쉬고 영화에 필요한 기본기를 익히기 위해 바쁘게 다녀야 할 터였다.
“괜찮아요.”
“오케이. [삭제> 촬영 준비는 잘 하고 있지?”
“네.”
“준비 열심히 해야겠더라. 거기 촬영장 분위기 안 좋다고 하던데.”
분위기가 안 좋다라.
“왜요?”
“들리는 소문에는 임강백이 조승희 흉내 내고 다닌다고 하던데?”
“….”
‘연기 결벽증’ 조승희 흉내.
알만하다.
싫어하는 놈을 자기 작품에 출연시키면서까지 개망신을 주고 싶은 그 욕심에서 비롯된 것.
임강백과의 재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
*
[92/100](+@)내가 처음 [양치기 청년>을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
아무래도, 이 능력은 단순히 대본의 완성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
확실하지는 않지만 ‘포텐’ 혹은 ‘시너지’를 포괄적으로 포함한 듯 보인다.
무한대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이 영화는 내 등에 단순히 날개를 달아준 것이 아니라.
내 입에 여의주를 물려주고, 이무기에서 용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뉴 커런츠’ 영광의 대상 시상에는, 심사위원장이신 이탈리아가 배출한 최고의 거장 알 필란체스 감독님을 모시겠습니다!”
영화 [플랜>을 통해 1993년 아카데미상을 받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 골든글러브까지 석권한 이태리 거장, 알 필란체스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경쟁부문에서 아시아 영화에 대한 무궁한 기대감을 드러냈다.다양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말들.
그 말의 결론은 좋은 작품이 많아 시상이 어려웠지만. 대상은 만장일치로 의견을 통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상의 영광스러운 주인은.
“Liar Man. (양치기 청년).”
“축하합니다!”
당연하게도, [양치기 청년>과 박진우 연출의 몫이 되었다.
펑! 퍼버벙!
종이 폭죽과 카메라 플레시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헉,”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박진우 연출은 경악할 듯 입을 쩍, 벌리더니 내 팔을 붙잡았다.
“… 이, 이게 대체…”
“축하드립니다. 감독님.”
내 팔꿈치를 부여잡은 박진우 연출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지만.
나는 예상했다.
글쎄, 이 영화는 받을 만하다니까.
“수상자인 박진우 감독님을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감독님.”
“아…! 네, 네.”
국내 영화계의 슈퍼 루키가 된 박진우 연출은,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무대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알 필란체스 감독이 박진우 연출에게 상패를 건네었다.
그리고 이어진 수상소감.
무대 위에 선 박진우 연출의 얼굴은 늠름한 수상자와는 조금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뭐, 어때. 누가 뭐래도 대상인데.
“우, 우선… 감사합니다. 이 영화를 좋게 봐주신 모, 모든 분들께 가, 감사드립니다.”
“저 바보가, 뭐라고 하는 거야.”
박진우 연출의 힘들었던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왔던 제작부장의 눈가가 조금 촉촉해졌다.
“그래도 좋으시죠?”
“… 그럼요.”
제작부장이 풉, 하고 웃었고. 나는 잠자코 박진우 연출을 바라보았다.
그는 떨고 있었지만, 그의 진심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박진우 연출의 진심은 아주 진하게 다가온다.
에스프레소처럼.
“먼저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SAFA 식구들, 믿고 의지해준 후배들, 지지해준 가족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제 인생에서 소중한 분들이 너무나 많이 생겼습니다.”
약간의 침묵.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분은.”
나와 박진우 연출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박진우 연출의 수상 소감의 화룡점정은, 나를 향했다.
“제게 가장 큰 힘이 되는 분입니다. 커리어에서 가장 바쁠 시기에 제 영화의 주연을 맡아주셨고, 언제나 제게 좋은 자극이 되셨던 분입니다. 도재희 배우님!”
“…. 아, 이런.”
내가 오른쪽 눈썹을 긁적이자, 어디선가 빨간 REC 녹화불이 번뜩이고, 내 쪽으로 사람이 집중되었다.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렸다. 그리고는 당당히 단상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환하게 웃음 지으며 박수를 쳤다.
짝, 짝짝짝!
내 박수 소리는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훠우!”
“와아-!”
영화의 전당 두레홀은 환호 소리로 크게 울려 퍼졌다.
박진우 연출은 격정으로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대상의 영광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 역시, 가슴 한 켠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래, 충분하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내가 받은 개인상은 없다.‘올해의 배우상’은 폐암 판정을 받고 죽기 직전까지 열연을 불태운, 지금은 고인이 된 일본의 어느 중년배우에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나 값지고 큰 상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감사합니다!”
“와아아-!”
내 첫 번째 국제 영화제.
그리고 대상.
나로 인해 값진 상을 받았다며 눈물 흘리는 감독이 있다.
앞으로 평생 함께 할, 그런 친구.
그리고 이 젊은 감독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고.
*
이제부터.
조금은 벅차올랐던 가슴을 차갑게 눌러야만 했다.
내가 부산에서 보고 느꼈던 아름답고 뜨거운 것들은, 차가움 속에서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는 아주 ‘귀한’ 감정이니까.
내 본질.
내 무대의 메인은, 이렇게 항상 차가운 곳에 있다.
[삭제> 촬영 현장에 도착하고 제일 처음 느꼈던 감정은.“….”
짙은 경계.
호랑이굴에 제 발로 나타난 사냥꾼.
마치,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
그 이유가 무엇일까 차분하게 살펴보았는데- 이는, 동료 배우들의 기묘한 시선 때문이다.
‘쟤가 걔야?’
조승희의 영화에 조승희가 좋아하는 조연들이 대거 등장하듯, 임강백의 영화에는 임강백을 따르는 배우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같이 내게 적대적인 시선을 던졌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응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저는 제작부장을 맡은….”
“…..”
나를 반기는 프로듀서의 말은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파다하게 퍼져있는 이 불순한 공기에 내 발길이 얼어붙는다.
그리고 이곳의 왕이 나타났을 때는.
“….”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임강백은 [피셔>에서 보았을 때 보다 조금 더 날렵해진 느낌이었다. 뭐랄까.
딱 맞는 옷을 입고 있다고 할까.
그런 그가, 나를 한참동안 주시하더니 별안간 손뼉을 치며 말했다.
짝짝짝!
“자! 빨리 빨리, 찍읍시다.”
[ 책 먹는 배우님 – 55화. > 끝ⓒ 맛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