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56)
56.
촬영장은 경기도 광명의 한 국립재활병원.
총 5층 건물인 이곳은, 4, 5층은 아예 일반 병동으로 쓰이지 않고 촬영 대관만 받는 곳이다.
병원 특유의 냉담하고 이타적인 분위기가 살아있는 이곳은, 암묵적으로 내게 말하고 있다.
‘제대로 해야 할 걸.’
감독님 휘하 스탭들이 내게 하는 경고는 아니었다.
조금 전 까지 다른 씬을 촬영하고 있던, 조연급 배우들의 눈빛이 내게 말한다.
“안녕하세요. 도재희 씨?”
약간의 비아냥거림과, 냉소를 담은 인사.
“반가워요. 나 알죠? 내가 선배인 것 같은데 그냥 말 편하게…”
“….”
나는 이런 이들의 하잘 것 없는 공격은 철저하게 무시해 주었다.
“… 뭐야, 지금 나 무시한 거?”
연출부에게 물었다.
“의상실은 어디죠?”
“아, 복도 끝 407호실을 의상실로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407호실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다시 현장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아, 재희 씨? 강백 선배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들었을까.
“반갑습니다. 전 [삭제>의 연출을 맡은 이경우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어요? 바로 앞씬 촬영 중입니다.”
“네.”
비교적 젊어 보이는 30대 초반의 감독.
단편영화 [기억, 삭제>를 통해, 단편영화제에서 입상하고 운 좋게 투자자를 만나, 동일한 시나리오를 ‘장편’으로 늘려 그대로 입봉 했다.
즉, 이것이 장편 데뷔작인 셈.
[#48 병원 복도 / 야외 / 밤 / 14 / 검사, 병원출연자] [#49 병실 / 야외 / 밤 / 14 / 검사, 목격자]스케줄 표를 받아보니, 바로 앞씬을 촬영 중이었다.
임강백이 ‘목격자’ 인 나를 죽이기 위해 병원으로 들어서는 장면이다.
“레디! 액션!”
나는 모니터 뒤에 서서, 임강백의 연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대사는 없이 호흡과 표정, 걸음걸이만으로 씬의 긴장감을 조성해야 하는 장면.
항공 지퍼를 턱 아래까지 잠그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 멋있어’라는 기운을 온 몸으로 뿜어내는 임강백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셔>보다는 확실히 무르익은 느낌. 데뷔 한지 10년이 넘은 그 내공은 어디 안 간다는 것인가.캐릭터는 똑같은 검사인데, [피셔>와 왜 차이가 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답은 하나다.
‘여긴 내 구역이야.’
조승희에게 밀려나 2인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난 임강백은 자신감으로 가득해보였다.
“오케이!”
내 생각에도 저만하면 충분한 듯 싶었다.
그런데 분명 오케이 사인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연기를 두 번 세 번씩 돌려보는 임강백은 재촬영을 요구했다.
“다시 한 번만 가시죠.”
“음, 괜찮은 것 같은데요? 어차피 길게 쓸 컷이 아니라 표정 좋은 부분만 몇 개 따서…”
“다시 가요.”
“… 그럴까요?”
신인감독의 머리 꼭대기에서 이 현장 전체를 총괄한다.
조금, 과하다고 느낄 정도로.
또 무빙 카메라를 들고 있는 촬영 감독과 호흡을 맞추기보다는.
“컷! 다시 가시죠.”
감독이 외쳐야할 컷 사인을 아무런 위화감 없이 본인이 먼저 쳐버리고.
“너무 빠른데요. 감독님. 제 움직임 보고 움직여주시죠.”
촬영 감독에게 본인의 움직임을 맞추라고 요구하는 뻔뻔함까지.
“조용! 슛 가시죠!”
촬영장을 마음껏 주무르는 괴팍함.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아무도 그런 임강백에게 뭐라고 할 수 없는 현장이라는 점이다.
“감독님? 안갑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가시죠!”
“갈게요! 조용!”
“….”
마치, 조승희라는 학교 통에게 밀리던 만년 2인자가 시골학교로 전학 가서 착한 시골학생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휘유-”
하지만 감독도 스트레스를 아주 안 받는 것은 아닌 모양.
헤드셋을 벗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였다.
“….”
나는 이 현장만이 주는 ‘기이함’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조승희는 연기결벽증이 있었지만, 강압적으로 말하거나 감독의 최소한의 영역을 절대 침범하지 않는 ‘예의’가 있었다.
하지만, 이건 뭐란 말인가?
“컷! 아, 다시 가시죠. 저랑 사인이 안 맞는데 감독님? 타이트한 사이즈로 들어오면 멈추셔야 제가 지나가죠.”
“아, 리허설 한번 하고 갈까요. 그럼?”
“바로 가요.”
감독의 존재조차 공기 화 시켜버린다.
“거 봐. 분위기 안 좋지?”
재익이 형이 슬쩍 다가와 내게 커피와 의자를 건네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시간을 확인하니, 밤 8시 20분.
난 작게 중얼거렸다.
“삼십분은 더 걸리겠네.”
*
고작 걸어오는 씬 하나에 이 정도로 힘을 주는데 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
이 판에서 가장 많이 보아왔던 ‘정치’의 일부이며, ‘기 싸움’의 시작이다.
임강백은 바로 앞 씬을 통해 내게 말하고 있다.
‘너도 그냥 넘어가지는 못 할 거야.’
그리고 드디어 임 ‘감독’님 입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8시 50분. 정확히 삼십분이 추가로 더 걸렸다.
“자! 바로 다음 씬 준비할게요!”
끼익.
나는 삐걱거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로 목을 축였다.
“아아.”
그리고 복도를 걸으며 가볍게 목과 입술을 풀었다.
얼굴 근육을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고, 턱이 빠질 만큼 혀 근육을 자극했다.
몸을 풀며 잠시 복도를 거닐고 있자.
“준비 끝났습니다.”
세팅이 끝났다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연출부의 말에 401호실 안으로 들어섰다.
“리허설 할게요.”
리허설.
임강백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이 경우 연출이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복도 제일 구석에 위치한 으슥한 2인실 병실. 목격자가 누워있는 침대 맞은편은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비어있고, 목격자는 홀로 누워있다. 가습기의 연기만이 가득 올라오는 어딘가 오싹한 공간. 그때, 문이 열리며 검은 괴한의 남자가 들이닥친다.”
임강백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양쪽 귀에 걸린 마스크로 입을 가리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연출이 물었다.
“무술감독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간단한 액션 시바이가 있기 때문에, 무술 감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강백 씨가 목을 조르려고 다가오면 목격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이 어떨까요?”
무술감독의 지시에 맞춰, 드라이하게 움직였다.
나는, 나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눈을 번쩍 뜬 뒤, 빠르게 몸을 옆으로 굴려 침대 아래로 착지.
그리고 달아나려고 일어서면, 임강백이 다리를 잡고 매달린다.
파악!
“좋네요. 이렇게 가볼까요?”
*
늦은 밤, 불 꺼진 병동 2인실.
커튼 틈 사이로 비추는 희미한 달빛만이 이 공간을 밝히는 전부.
가습기에서는 수증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옆으로 무빙하던 카메라가 멈춰 선다.
곧 포커스가 아웃되며,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 청바지에 검은 항공점퍼. 손에는 검은 가죽장갑. 웬 남자 한명이 안으로 들어선다.
백 풀샷(뒤에서 찍은 풀샷)에 걸리는 남자의 바지 뒷주머니에 구겨진 듯 들어있는 신문지. 신문지로 병실 창문을 가린 괴한은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앞으로 걸어가는 괴한의 발이 인서트로 깔리고.
저벅, 저벅.
괴한의 목적지는 정확하게 사람이 누워있는 병원 침상으로 향한다.
진 하늘색의 병원 모포를 덮고 있던 목격자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린다.
이미 곁눈질로 남자의 등장을 확인한 상황.
절그럭.
괴한이 침상 앞에 멈춰서 서, 옷장에 걸려있는 목격자의 붉은 색 니트를 꺼내든다.
니트를 이용해 입과 코를 틀어막을 심산.
그리고 점점 다가오는 괴한의 움직임에 목격자가 재빠르게 반대쪽 침상으로 몸을 굴린다.
“사, 살려…”
절겅!
침상의 슬라이드 식 가드 레일에 몸이 걸리지만, 재빠르게 넘어간다.
“컥!”
“!”
괴한 역시 황급히 몸을 뻗지만, 목격자의 병원복은 미끄러지듯 손 안을 빠져나가버린다.
“크흑!”
침상에 엎어진 괴한이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침상 위를 넘나든다.
부웅!
“아, 아아악! 아악!”
목격자는 바닥에 쓰러지며 폐부를 찌르는 고통에 괴로워하다, 이를 바스라질 듯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한다.
“사, 살려…”
하지만 그 등 위로 괴한의 발이 떨어지고. 그대로 바닥에 쳐 박힌다.
“사, 살려주세… 컥!”
안간힘을 다해 비명을 질러보지만, 힘을 당해내긴 역부족. 다리를 잡아끄는 괴한에게서 빠져나가려 애쓰지만, 금세 입이 틀어 막혀 버린다.
그런 목격자를 향해, 괴한이 말했다.
“조용히 해. 이 씨발.”
“사, 사, 사… 살려주세요.”
목격자는 사시나무 떨 듯 몸부림치다 이내 고개를 황급히 저으며 눈을 감아버린다.
“저, 아, 아, 아무것도 못 봤어요. 제발… 제, 제발…”
괴한이 목격자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터질 듯 얼굴이 부풀어 오르는 목격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
이 경우 연출, 촬영감독, 그리고 ‘도재희’의 연기를 조롱해주기 위해 모인 주변의 배우들은.
“… 쩐다.”
모니터를 튀어나올 것 같은 두 사람의 연기 배틀에 손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후.”
이 경우 연출은 아예 헤드셋일 벗어 한 쪽만 귀에 갖다 댄 채 침을 꿀꺽 삼키며 몰입했다.
벌써, 5 테이크.
NG도 없었는데 같은 장면을 무한 반복해서 찍고 있다.
체력적으로 힘에 부칠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불평하나 없이 해낸다.
그 때, 복도에 있던 연출 모니터를 넘어- 병실에서 귀를 찢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손을 깨물린 괴한이 일갈을 내지르며, 냅다 목격자의 머리를 걷어찼다.
빠각!
“컥”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목격자가 바닥을 굴렀지만.
삐—–!
별안간 터져 나오는 경보음.
머리를 채이기 직전, 응급버튼을 누른 목격자의 손 끝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시발!”
당황한 괴한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를 주워들더니 냅다 병실 문으로 뛰기 시작했다.
카메라가 다시 왼쪽으로 무빙하며, 달리를 타고 그대로 한 바퀴 회전한다.
“출발! 출발!”
이 경우 연출의 사인에 맞춰.
쓰러진 목격자를 받고- 거칠게 열리는 문. 그리고 곧바로 들이닥치는 간호사.
“선생님! 선생님!”
“오케이!”
*
“헉, 헉….”
숨을 헐떡였다.
발에 채인 머리를 부여잡고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미친 새끼. 저, 개새끼!
하지만 윤곽만 잡힐 뿐, 누구인지 당최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간호사가 나를 흔들어 깨우지만, 나는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천장만 노려보았다.
의식이 점점 흐릿해진다.
눈이 감기는 속도가 느려지고, 망막에 눈물이 맺힌다.
이런 내 얼굴을 향해 천장에서 가까워지는 지미집 카메라를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 누나.”
가해자는 저 놈들인데.
왜, 우리 같은 사람들만 피해자가 되어야 하나요.
묻고 싶다.
누나가 불쌍해 죽을 것 같고. 이런 내 꼴이 너무 비참해서 울음을 멈출 수 가 없다.
이마에서 피를 줄줄 쏟으면서도 나는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흑, 끄윽.”
간호사가 이런 나를 흔들어 깨우고, 어느새 누군가의 품에 안겨 침대로 옮겨졌지만.
나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며 울었다.
“끅, 끄윽… 끅…..”
미안.
억울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다고 느낄 만큼 평화롭다. 귓가에 스치는 간호사와 의사의 외침은 사라지는 소음처럼 저 멀리 날아가 버린다.
“…. 오케이!”
감독의 오케이 사인에 내가 눈을 껌뻑였다.
끔뻑끔뻑.
“아.”
… 끝났구나.
“윽”
내가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자, 쏜살같이 달려온 이 경우 연출이 내게 물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네.”
“여기! 도 배우님 마실 물 좀 가져다 드려요! 물!”
연출부 한 명이 생수 한 병을 들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나는 물을 받아들고 한 모금 머금었다.
시원하다.
“크. 고마워요.”
마신 생수를 건넸는데, 연출부가 말했다.
“저, 정말… 최고였습니다.”
“…”
응?
그제야 사람들의 눈빛이 180도 변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시건방진 신인’이라는 임강백이 심어놓은 편견에 대한 반전.
스탭들의 시선은 존경으로 물들어 있었고.
배우들의 시선은 더욱 명확했다.
‘쟤, 대체 뭐하는 놈이야?’
입을 쩍 벌리는 놈도 있었고, 자기들 끼리 수군거리며 내 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이 경우 연출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압도적이었습니다. 너, 너무 압도적인 집중력이라….”
임강백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그런 임강백을 마주보았다.
‘그래, 또 할까?’
이 경우 연출이 흥분한 듯 말했다.
“이건 오케이! 오케이 입니다! 강백 선배님. 이거, 지금 너무 좋습니다.”
“….”
임강백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한 마디 거들려고 하자.
내가 먼저 말했다.
“아, 선배님 연기가 마음에 안 드시면 다시 하셔도 좋습니다.”
“….”
“다시 찍으면, 조금 더 좋아질지도 모르지요.”
그 뒷말은 눈으로 말했다.
‘딱히, 그럴 것 같지도 않지만.’
임강백은 이 서브텍스트를 완벽히 이해했고.
무덤덤한 얼굴에 비수를 숨긴 채 말했다.
“다음 씬 가시죠.”
그리고, 매니저를 대동하고 아예 사라져버렸다.
“후.”
나는, 쓰러지듯 침상에 드러누웠다.
지친다.
그런데, 이제 1라운드가 끝났을 뿐이다.
[ 책 먹는 배우님 – 5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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