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58)
58.
[부산국제영화제 대상! [양치기 청년>, 선댄스 영화제 월드시네마 부문 경쟁 출품!] [[양치기 청년>, 로테르담 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박진우 연출의 행보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 외에도, 오히려 해외 여러 영화제들에서 [양치기 청년>을 공식 초청 하고 싶다고 러브 콜을 보내기도 했다고 하니, 앞으로 더욱 잘될 전망이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이건, 조금 개인적인 일인데.
– 조금 씩, 해보려고.
“연극을?”
– 응. 이번에 너 따라서 영화 찍으면서 느꼈거든. 아, 연기. 이대로 놓치고 살면 후회하겠구나.
문성이 형은 [양치기 청년> 이후에, 가게에 매니저를 따로 뽑았다. 그리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통해 연기 인생을 새롭게 시작했다.
“형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뭐.”
당장 엄청난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난 이 꿈을 지지해줄 요량이다.
국내영화제와 [삭제>의 특별출연 촬영 일정이 모두 끝나고, 일주일의 휴가를 받았다.
돈도 벌었겠다, 여행도 다니고 술도 마시고 펑펑 쓰고 여자도 만나고 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내게는 아직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 삶은 가시방석 위에 앉아있는 것과 다름없다.
마음 편히 드러누워 방심하다 보면, 언젠가 반드시 찔리게 될 가시.
그래서 어디 나가지 말고, 차라리 마음 편히 ‘혼자’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휴가기간 동안 첫 번째로 한 일은, ‘이사’를 하는 것.
“지금 들어가는 영화, 어차피 지방 출장 많다면서 이사를 왜 해? 월세 아깝게?”
“월세 아니고, 전세에요.”
어머니는 괜찮으니 집에서 지내라고 극구 만류하셨지만.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독립을 해야 할 것 같다.
촬영이 있는 새벽이면 매일 같이 나와 함께 눈을 뜨셔서는 주먹밥이며, 콩나물국이며 스프를 끓이시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집은 어디에 구하려고?”
“알아봐둔 곳이 있어요.”
“어디?”
“방배동이요”
값 비싼 역세권을 피해, 방배동에서도 외곽으로 떨어진 남부순환도로 인근의 오피스텔 투 룸을 찾았다.
전세가격만 3억 5천만 원.
무시무시한 돈이지만, 그 동안 끌어 모은 돈으로 가능한 금액이다.
“그래도 가깝네? 다행이다.”
집이 있는 사당동에서야 바로 옆 동네니 어머니 입장에서도 마음 편하고, 나 역시 강남을 벗어나지 않아서 좋고.
여러모로 좋다.
*
이사한 새집에서 혼자 휴가를 보낼 때 가장 좋은 점은.
잠을 편히 잘 수 있다는 것.
혼자 피자와 맥주를 마시고, TV 다시보기로 그 동안 밀렸던 영화와 드라마를 몰아보고. 그러다 피곤하면 가판대 위의 자반고등어마냥 쇼파에 늘어져 자고.
나는 일주일 동안 그간 못 잤던 겨울잠을 몰아자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휴식을 취했다.
역시, 하루에 한 끼를 먹든 두 끼를 먹든, 나를 깨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좋다.
혼자 살면 이게 좋다니까.
휴가가 끝나고, 오랜만의 스케줄이 잡힌 늦은 아침.
느긋하게 일어나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었다.
오늘은, 일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만났던 임학두 위원장과, 임창태 감독,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40대 조연출과의 미팅이 있다.
휴가기간 동안 재익이 형이 먼저 발 빠르게 영화사와 접촉하여 세부적인 계약 조건을 논의했고.
오늘은 얼굴을 보고 간단하게 영화 얘기도 나누고,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오늘을 위해 임창태 감독의 데뷔작과 최근 작, 가장 높은 흥행 스코어를 기록한 작품들을 챙겨봤다.
총평은, 아름다운 영상을 지루하지 않게 찍는 감독이라는 점. 보기만 해도 육감을 자극시키고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스펙타클한 영화를 찍는 감독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아름답고, 인물의 감정 중심으로 무겁게 훅훅 찔러 온다.
잘 빠진 재규어가 아니라, 고고한 학을 보는 느낌이다.
준비를 마치고 쇼파에 앉았는데, 마침 재익이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 나, 여기 건물 지하주차장 도착했거든?
“아, 내려갈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평일 늦은 오전이라 차량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재익이 형은 깔끔한 주차장을 보며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한 곳, 건물 깔끔하니 좋네.”
“그렇죠? 새로 지었데요.”
“몇 층인데?”
“8층이요.”
“좋은데? 회사에다 얘기해서 휴지라도 보내야겠다. 아니지, 찬익이 형이랑 영미 씨랑 같이 집들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리고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내게 물었다.
“근데, 이런 데는 얼마나 하냐?”
내가 손가락 세 개를 펼치자, 재익이 형은.
“히익”
바람을 들이마시며 입을 쩍 벌리더니,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언제 그렇게 벌어보냐? 나도 회사나 차릴까? 그럼 너도 나 따라 올래?”
“계약금 얼마 주실 건데요?”
“내가 줄 돈이 어딨냐? 네가 벌어다 주면, 그걸로 굴려야지. 큭큭.”
차는 미끄러지듯 지하를 빠져나와 도로에 올라섰다.
재익이 형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두드리며 말했다.
“감독님 뵙기 전에, 궁금한 점 있으면 물어봐.”
“음, 감독님은 어때요?”
감독님의 성향.
누구와 작품을 함께 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여러 작품을 통해 겪었던 터다.
재익이 형이 말했다.
“임 감독님? 사람 너무 좋으시던데. 보기만 해도 미소가 그려지는 인품이라고 해야 하나? 말씀마다 계속 웃으시고, 아무튼 좋아.”
“다행이네요.”
“그럼, 다행이지. 아, 소식 하나가 또 있다.”
“뭔데요?”
“영화배우 유경성 알지?”
유경성?
“그, 한 십년 전에 유명했던 배우요?”
“응.”
조승희가 30대 배우들 중 몸값이 가장 비싼 최고 정상급 스타라면, 유경성 선생님은 50대 이상 남자배우들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다.
아니.
자존심이나 다름 ‘없었다.’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기만 하더라도, 영화관에 걸린 포스터에는 ‘유경성’ 이라는 이름이 독점이라도 하다시피 적혀있을 만큼, 다작을 하며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지만.
한창 잘나가던 그 무렵.
무리한 개런티 요구로 드라마 노조에서 아웃당한 뒤로 매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몇 년을 자숙하시는 듯 보이더니, 최근 3년 전 쯤, 어느 샌가 스크린을 통해 복귀했다.
하지만 복귀 후에는 이렇다 할 히트작은 없는 상태.
“지금 유경성이 옛날 유경성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 괴물 같은 연기력이 어디 가겠냐?”
불미스러운 일로 잠시 모습을 감추고 지금은 날개가 꺾여 주춤하곤 있지만, 한 때는 1세대 연기파 배우로 아버지 세대에게는 국민 배우로 이름을 떨쳤던 배우.
“그렇죠. 근데 그 분이 왜요?”
“유경성 선배님이 ‘영조’로 캐스팅 되셨거든.”
“네?”
영화 (가제)[사도세자>의 왕, 영조.
내 아버지 역할이다.
이거, 의외의 영입인데.
*
A와 B는 쓰임이 전혀 다른 알파벳이지만.
알파벳이라는 공통분모만으로도, 누군가에겐 A와 B가 똑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강남의 어느 한정식 룸에서 가진 미팅.
“아, 신인배우 도재희 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응? 신인이라니? 이제 신인 타이틀은 뗄 때도 된 것 같은데. 아닌가요?”
임학두 위원장의 너스레에 내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하, 아직 멀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조연출 김을용입니다.”
임창태 사단을 이끄는 실질적인 중심이라는, 마흔이 넘은 조연출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까만 피부에 따스함이 느껴지는 눈빛. 오랫동안 현장에서 뛴 프로의 냄새가 나는 분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임창태 감독님 역시,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눈가의 주름이 자글자글하지만, 그 만큼의 연륜과 지혜가 엿보였고. 미소 뒤에는 얼마나 따뜻한 인품과 실력이 숨어있을지 짐작도 가질 않는 영화계의 살아있는 전설.
“반가워요.”
감독님은 짧은 순간에 내 전신을 죽- 훑더니.
“체격이 생각보다 더 좋네?”
라고 허허, 웃으며 말씀하셨다.
자리에 앉자마자 임창태 감독님은 [양치기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 그 영화를 보고, 재희 배우에게 반했던 점이 뭔지 압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장난스러운 얼굴 뒤에 숨어있는, 반전 있는 눈이 마음에 들었어요.”
“… 아, 감사합니다.”
“내 영화에서도 그 모습을 보고 싶네요.”
그러자 임학두 위원장이 보태며 말씀하셨다.
“임 감독님이 [양치기 청년> 영화를 보시고는, 하루 종일 도 배우님 얘기만 하셨습니다. 배우님 눈이 좋다고. 좋은 눈을 가졌다고. 꼭 같이 하고 싶다고.”
“감사합니다.”
감독과 배우가 처음만나는 식사자리.
더군다나, 영화를 설득하고, 결정하고, 페이를 협상하는 자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결정되고 만나는 인사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뭐 많겠는가.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니까, 더욱 신뢰가 갑니다. 껄껄껄!”
“열심히 하겠습니다.”
칭찬과 격려.
다짐과 감사가 전부다.
이렇게 따스하지만, 어딘가 새로울 것 없는 ‘일상적인’ 자리.
그 때, 그 일상을 비트는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아, 늦어서 죄송합니다.”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
‘특별 손님’이 있었다.
조금 전, 차에서 재익이 형과 얘기를 나눴던 ‘유경성’ 선배님이었다.
“… 어라?”
예정에 없던, 원로 배우의 방문에 재익이 형도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도재희 라고 합니다.”
“….”
초췌해 보이는 얼굴. 섬뜩한 안광을 뿜어내며 허리를 약간 굽힌 구부정한 상태로 들어선, 백발이 성성한 중년배우.
유경성 선배는 그런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대놓고 무시하며 임창태 감독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선생님. 이거 얼마 만에 뵙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이-! 껄껄! 우리 경성이!”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감독님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감독님은 실명을 부르며 편하게 대한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서 이들의 관계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대체 둘은 무슨 관계지?
또 유경성 선배의 얼굴이 왜 낯설지 않을까?
그 때, 임학두 위원장이 옆에서 말했다.
“‘영조’ 역으로 캐스팅 된 얘기는 들으셨지요? 도 배우님과 인사하는 자리라고 감독님이 특별히 부르셨습니다. 두 분, 감독님 데뷔작부터 함께한 오랜 관계거든요.”
데뷔작?
그제야 나는 이 둘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었다.
… 아!
내가 휴가기간 동안 보았던 임강태 감독의 입봉작.
[봄에 마실 물>을 통해, 유경성이 주연으로 데뷔했다.영화 속의 젊은 유경성의 얼굴과 쉽게 연상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만. 둘은 이미 30년이 넘은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쪽은?”
유경성 선배가 그제야 나를 의식하며 손짓했다.
그의 눈은 나를 향해, ‘너는 누구냐?’ 라고 묻고 있었다.
“신인 배우 도재희입니다.”
내가 말했지만, 역시 유경성 선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직 시선을 임창태 감독님 쪽으로만 두고 있었다.
그러자 임창태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누구긴 누구야? 30년 전의 네 놈이지. 끌끌끌!”
내가, 30년 전의 유경성?
“아아.”
그러자 유경성 선배도 알아들었다는 듯 나를 위아래로 훑기 시작했다.
“경성이 자네하고 느낌이 비슷해. 남다른 눈빛이 꼭 닮았어.”
“아…”
“그리고 또 닮은 점이 있어. 뭔지 알아? 연기력이야. 연기를 아주 곧 잘한다고. 껄껄!”
그런 유경성이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
그리고 내 눈 앞에 얼굴을 들이밀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크게 되겠네.”
“… 예?”
“연기 욕심은 부려도, 돈 욕심만 부리지 말어.”
그리고 호탕하게 웃어버렸다.
“끌끌끌! 감독님, 식사 하시죠.”
“….”
뭐야, 이 사람.
뜬금없이 욕심을 부리지 말라니.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저 섬뜩한 눈빛과 말투가 기분 나쁘지게 들리지 않는다.
뭐랄까, 그의 말에서 일종의 짙은 ‘후회’를 느꼈기 때문이다.
유경성이 말했다.
“그럼, 인사나 나눌까요.”
[ 책 먹는 배우님 – 5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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