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59)
59.
1988년에 영화 [봄에 마실 물>로 데뷔하여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배우로 명성을 떨쳤지만, 무리한 개런티 요구로 방송 삼사에게 팽 당하고 한 동안 잠적.
그리고 3년 전부터 스크린을 통해 조금씩 복귀 의사를 알리던 배우 유경성.
임창태 감독은 유경성과 내가 닮은 점이 있다고 했다.
“재희 씨보면, 딱 옛날 경성이 생각이 난다니까? 느낌 비슷하지 않아?”
‘눈’과 ‘연기력’.
오랜만에 만난 제자이자, 30년 만에 다시 영화로 함께 재회하게된 거장과 명배우의 술자리.
유경성의 등장으로 조금은 지루했던 대화 분위기가 유쾌해졌다.
“아, 글쎄! 이놈이 방송국 놈들이랑 그 사단이 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에서 따라 올 사람이 없었다니까? 지금 난다 긴다 하는 배우들, 그 때는 전부 경성이 밑에 있었지.”
임창태 감독은 이 자리가 신이 난다는 듯 말했다.
“경성이 이놈이 완전 싸움닭이었어. 껄껄! 이놈이 다른 건 몰라도 연기 하나는 잘 하잖아? 주변에서 뭔 놈의 시기 질투가 그렇게 많은지. 하루가 멀다 하고 루머가 돌았지. 그래서 이놈이 전부 연기로 때려죽였잖아. 그러니까 지들이 어쩔 거야? 입 다물고 기어야지. 끌끌끌! 그냥 유경성 세상이었다고”
“어이고, 선생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도 한 때는 그런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지나가는 돌에 맞아 죽어있었습니다.”
“껄껄! 그러게, 돈 욕심은 적당히 부렸어야지 이 사람아. 으하하!”
유경성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제 오만이었죠. 세상 주인은 따로 있었는데, 제가 주인인 줄 착각했나 봅니다.”
‘나 만큼 하는 배우 없잖아?’ 라는 기고만장함으로 살았다는 유경성의 말년은 좋지 않았다.
대화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던 나는, 흥미로운 기색을 숨기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술잔이 열 번 가량 오가고, 대낮부터 모두가 얼큰하게 취했을 무렵.
유경성이 나를 보며, 내게만 건배를 제의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 도재희 라고 합니다.”
“어. 미안, 미안해요. 요즘 TV를 영 안 봐서. 한 잔 하자고.”
짠.
잔을 비워냈다.
그리고 유경성이 슬쩍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주연은 처음이라고 했나?”
“상업극장에 걸리는 것은 처음입니다.”
“임창태 감독님이 먼저 러브 콜 했다고?”
“네.”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연거푸 한 잔을 더 털어내고는 말했다.
“… 나랑 똑같네.”
유경성의 눈이 조금 게슴츠레하게 변한다.
“임창태 감독님이 선택한 신인배우라… 임 감독님 참, 좋으신 분이야. 능력 있는 분이고.”
“네. 그러신 것 같습니다.”
“사람 좋고, 명석하시고, 해박하시고. 연기를 보는 눈이 정확하신 분이지. 그런데 저분이 가장 잘하시는 게 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관찰’. 사람을 보는 눈. 그게 탁월하셔. 그러니까 그런 걸출한 영화들을 찍으시지.”
“아, 네.”
“그런데, 내가 잘하는 것도 그거거든. ‘관찰’. 사람 눈만 보면 그 사람을 대충 파악할 수 있지.”
“….”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조금 전, 유경성이 나를 위아래로 훑던 시선을 떠올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는 말인가?
“감독님이 왜 나랑 자네가 느낌이 비슷하다고 하는 줄 알아?”
“… 모르겠습니다.”
“그 착한 얼굴로 욕심을 숨기려고 애쓰는 게 다 보여서 그래.”
“….”
… 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내 반응에 유경성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끌끌끌! 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라고. 나는 그냥 옛날 생각나게 하는 후배를 보니까, 먼저 간 선배로서 좋은 말 해주고 싶을 뿐이니까.”
“… 아, 네.”
“내가 그랬거든. 딱, 신인 때 까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욕심을 무조건 숨겼지. 성질 머리는 더러운데, 남들한테 착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콤플렉스 같은 거랄까.”
이 남자.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근데, 좀 크고 나니까 사람이 달라지더라고. 욕심을 숨길 필요가 없게 된 거야.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된 줄 알았지. 내 맘대로 되는 줄 알았어. 그러다 깨졌지. 이건 조언이야. 한 발 먼저 뛰어가다 넘어진 선배의 조언.”
유경성이 조금 진지하게 말했다.
“더러운 성질머리 드러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더라고.”
“….”
배우에게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사람을 관찰하는 능력.
유경성은 내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 지금 유경성은 자기 얘기를 하면서 동시에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일전에 [숨 닿을 거리>의 정이연 작가에게서 느꼈던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감정.
비슷한 류의 사람들이 풍기는 어떠한 냄새.
이런 걸 말하는 건가?
입을 열지 않았다.
부정하기도, 긍정하기도 애매한 상황.
그러자 유경성은, 장난스럽게 웃어버렸다.
“끌끌, 아니면 말고. 흘려들으라고. 아이고, 술이 취했나… 감독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유경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사라졌다.
“….”
그래. 인정한다.
바로 최근까지만 해도, 임강백과 자존심 싸움을 벌이며 성질머리를 드러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유경성과 내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나는 ‘연기’에 움직이는 사람이지, ‘돈’에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뱉지는 않았다.
유경성의 말처럼, 흘려듣고 필요한 부분만 배우면 된다.
그래.
욕심 가득한 배우의 말년은 초라하구나.
그 욕심을 숨기는 법과, 싸움을 피해가는 법을 배워야겠구나.
딱, 이 정도만.
오늘의 만남에서 주는 메시지는 제법 명확하게 정리된다.
똑바로 커라.
*
유경성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 아이고.”
옛날 스크린에서 날아다니던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백발의 아저씨가 서 있었다.
‘호랑이가 발톱이 다 빠져버렸구나.’
이제는 이 모습에 적응할 법도 한데, 여전히 거울 앞에만 서면 옛날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이토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피부의 온도를 느끼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 술이 취했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렇게 달아오르는 이유가 단순히 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도재희 라고 했던가.’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떠들어버렸다.
‘주연 데뷔’
‘연기파 배우’
‘임강태의 남자.’
몇 가지 공통분모를 통해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는 듯하여, 반가운 마음에 입방정을 떨긴 했지만 자신이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도재희의 욕심 가득한 모습은 ‘눈’이 말해주고 있었지만-
대화 도중, 도무지 감정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끝끝내 감정을 숨기는 모습은, 자신과는 다른 느낌이다.
자신이 ‘돈’과 ‘권력’에 취해 호기롭게 뛰어든 불나방이었다면, 도재희는 날카로움을 촌스러움에 감춘 비수 같다고 할까.
유경성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런 저런, 조언들을 늘어놓긴 했지만 도재희는 자신보다 더욱 프로다.
그 속에 뭐가 숨어있을지 모르지만, 겉으로 감정의 동요를 내비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프로.
‘돈’에 얽매이던 자신과는 다르다.
“… 부럽네.”
시작할 수 있는 젊음이 부러웠고, 타고난 재능도 부럽다. 하지만 가장 부러운 것은 따로 있음을 또 인정해야 했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좁쌀만큼 좁은 바닥에서 기고만장했던 자신의 과거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가능성.
유경성은 인상을 구겼다.
이토록 거울 속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상상 속에서, 도재희의 얼굴과 자신의 과거의 얼굴이 묘하게 디졸브 된다.
“아.”
알았다.
자신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살고 있음을.
*
임학두 위원장을 통해, 창(唱)과 판소리 수업을 추천받았다.
전주를 지키는 국악단체인 ‘동이소리’의 대표이자 KTN의 [국악장터>를 10년간 진행하며 유명세를 얻은 박우리 명창.
하지만 미팅 첫날, 딱 잘라낸 부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4개월이요? 그것 가지곤 부족해요. 최소 1년은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극이 소리를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나, 배역 자체가 ‘명창’이나 ‘소리꾼’이 아니기에 임창태 감독은, 내게 절대 부담 갖지 말라고 하였다.
어떻게든 찍어야 하는 상황에서, 제작사에서 내놓은 방법은 하나.
창(唱)이 등장하는 장면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연습기간을 두 달 정도를 늘리는 것.
“소리가 등장하는 장면만 집중적으로 배우는 수밖에 없겠네요.”
소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총 세 장면.
하지만 이 중, 한 장면은 감정 연기에 입각하여 소리에서 오열로 변하게 되니, 실질적으로는 두 장면을 위한 6개월의 준비과정인 셈이다.
임창태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는 방법은 노력뿐이다.
준비해야 할 과제는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사극은 기본적으로 소화해야 할 역량이 다양하게 필요하다.
승마, 검술, 궁술 같은 장면도 소화해내야 하는데. 무술팀이 동행한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기본’은 할 수 있어야 한다.
광주의 승마장에서 승마를 연습하고, 경기도 남양주의 액션 스쿨에서 검술을 훈련하는 이 과정만 놓고 봐도.
촬영에 비해 결코 호락호락한 스케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웃어 봐요. 치-이-즈!”
“치이즈.”
물론, 이러한 과정 하나하나가 기자들 앞에서 진행된다.
일종의 퍼포먼스나 다름없지만, 이 또한 홍보의 일부.
[도재희의 연기열정. 사극필수코스 승마 연습 삼매경.] [‘명창’ 박우리가 극찬한 배우 도재희. “연습실 귀신” 별명 지어줘] [(사진)활시위를 당긴 채, 포즈를 취하는 도재희. 과녁중앙을 뚫을 기세] [(가제)임강태의 [사도세자>. 크랭크인은 언제?]특별한 일정 없이 승마장과 소리연습실을 오간 2018년의 겨울은, 과녁 중앙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처럼 쏜살같이 날아갔고.
2달이 흘렀다.
*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오빠.”
“영미 씨도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나는?”
“실장님도요.”
“영미 씨, 새해 인사부터 너무 차별하는 거 아냐?”
지난 1년간 열심히 달려온 재익이 형이나, 영미 씨도. 그리고 나도.
2019년이라는 이름의 무언가 달라질 것 같은 ‘새해’를 맞이했다.
“그나저나 세월 정말 빠르지 않아요? 작년 이맘때에 [청춘열차> 찍고 있었는데.”
“그러게요.”
1년을 너무 가파르게 달려왔다.
영화도 두 개나 찍고, 드라마도 하나 더 찍었으니까.
아, 특별출연도 빼놓으면 안 되지.
거기다, [술김에> CF도 했구나.
“내가 CF 얘기 했던가?”
“CF요?”
마침 CF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재차 물었다.
그러자 재익이 형이 룸 미러를 보며 말했다.
“응. 자동차 CF 들어왔는데, 내가 말 안했던가?”
“….”
안하셨는데요.
“그제 들어왔어. 네가 메인모델이고 2억 2천에 6개월.”
“….”
2억 2천이라니.
[숨 닿을 거리>를 통해 3개월 내내 생방스케줄을 치르면서 번 돈은 3억이 넘는다.분명 게임머니처럼 느껴질 만큼, 상상하기 조차 힘든 큰돈이지만. 하루내지 이틀 만에 촬영이 끝나는 CF로 억 소리 나는 돈이 들어오니, 정말 CF는 돈 버는 기계구나 싶다.
최근 (가제)[사도세자> 개런티는 2억 7천만원에 도장을 찍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사를 조금 미뤘다가 더 큰 집을 알아볼 걸 그랬다.
“근데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왜요?”
“더 올려야지. 이제 어엿한 ‘대세 배우’ 인데.”
… 어쩌면, 건물을 살 수도 있을지도.
하지만 ‘돈’에 연연하지는 않기로 했다.
작품도, 대중들의 평가도, 개런티도 흐름을 탔으니까.
또 새해를 맞이하여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스케줄부터 ‘돈’ 타령을 할 수는 없잖아.
그래.
새 해 첫 공식 스케줄.
지금 가는 곳은, 임강태 사단의 본거지인 ‘영화사 숲’의 사무실.
오늘은 대본 리딩이 있다.
[ 책 먹는 배우님 – 5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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