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6)
6.
모든 이등병들은 전입 온 순간, 이런 다짐을 하지 않을까.
‘나는 짬 차면 절대 박 병장, 저 개새끼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권력을 손에 쥐고 나면, 변한다.
유순했던 김 이병도, 김 병장이 되고나면 박 병장에게 당했던 그대로 대물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거울처럼.
자, 권력은 이렇게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이건 일종의 조건반사.
그리고 여기.
처음으로 떳떳한 권력을 쥐게 된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임주원의 패배감 짙은 눈빛, 항상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던 조슬혜의 황당하다는 눈빛. 그리고, 사무실 한 켠에서 나를 무심하게 노려보고 있는 송문교의 불편한 눈빛.
적대감 가득한 이 모든 눈빛들이 하나로 뭉쳐 내게 경고하고 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L&K 내에서 암묵적으로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궤도를 이탈했다.
톱니바퀴 가장 아래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던 고철 나사 하나가, 톱니바퀴의 판도를 뒤집은 것이다.
그 만큼, 이번 내 발탁은 회사에서 이례적인 일이었다.
데뷔 하긴 했지만, 포털사이트에 이름조차 뜨지 않는 무명. 경력이라고는 연극영화과 워크샵 몇 작품과 상업극 한 두 개가 전부인 중고.
신인이지만 동시에 중고였던 내가 합격한 [청춘열차>의 배역은, 미니시리즈 세 번째 남자조연.
“세상에나, 캐릭터를 바꿔가면서 대본을 수정 하신다고? 감독님 재희한테 제대로 꽂히셨나 본데?”
거기다, 비중이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질지 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내 오디션을 기점으로, 대본이 새롭게 수정될 것이라는 통보 까지 받는 기염을 토해냈으니까.
대본이 바뀐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배역도 함께 바뀐다.
이로서, 오디션 합격이 예상되었던 조슬혜의 여자고정단역인 ‘금수저 동창1’ 역할도, 새롭게 바뀐 대본에는 살아 있으리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아 좆같네.”
조슬혜가 일각에서 불만을 터뜨렸다.
“내 캐릭터 사라지기만 해봐. 진짜! 아!”
그리고 아주 냉담한 눈으로 나를 흘겨본다. 하지만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성난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오빠, 저랑 얘기 좀 해요.”
“야. 조슬혜.”
박찬익 팀장이 옆에서 조슬혜를 만류하려 했지만, 나는 그런 박찬익 팀장에게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와 조슬혜는 복도로 나왔다.
“말해.”
조슬혜는 내게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 보였지만, 복도로 나오자마자 180도 얼굴색을 바꾸며 내게 말했다.
“오빠. 저 진짜 오랜만에 오디션 붙은 거 아시죠?”
알지, 너도 꼴통이니까.
눈빛이 아주 간절해 보인다.
“저 이거 진짜 하고 싶거든요? 근데 수정대본에서 캐릭터 사라지면, 저 어떻게요? 감독님한테 오빠가 말 좀 잘해주시면 안돼요?”
“뭐?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초짜 배우가 어떻게 감독과 작가의 권한을 침범하겠는가. 물론 주연급들 중에서 그러지 않는 배우가 없을 정도로 흔한 일이지만, 난 그럴 입장도, 힘도, 생각도 전혀 없다.
“감독님이 오빠한테 완전 꽂혔다면서요.”
하지만 조슬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난감한 부탁을 해온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런 부탁을 듣는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
“아냐, 그런 거.”
“오빠 때문에 오디션 다시 본다는 말도 있던데…”
“누가 그래?”
“다들요. 매니저 오빠들도 다 그러던데요? 오빠가 마지막에 오디션 잘 봐서, 일이 많이 틀어졌다고. 대본도 바뀌고, 배역도 바뀔 거라고.”
“….”
그래. 판이 바뀌었다.
[청춘열차> 문병철 감독님은, 내 마지막 오디션을 기점으로 합격이 예정되어 있던 배우들에게 합격 통보할 것을 보류했다. 대본이 바뀌면, 배역도 함께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그 과정에서 단역 몇 개가 사라지는 것은, 이 바닥에서 흘러가는 일 중, 아주 사소한 일이다.
이 사소한 일이 자존심만큼 소중했던 조슬혜는, 아주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수정대본 공개되기 전에, 확정된 배우들이랑 감독님 만나서 미팅 하신다면서요. 그 때 감독님 만나서 ‘금수저 동창1’ 역할, 그거 필요하지 않아요? 이 말 한 마디면 되잖아요. 정말 부탁드려요.”
“….”
“제발요.”
그런데 어쩐지, 이 장면이 내게 낯설지가 않다.
나도 조슬혜처럼, 예전에 이와 비슷한 부탁을 누군가에게 한 적이 있던가.
… 시발.
잊고 싶은 과거가 떠올라 버렸다.
비슷한 상황이었다. 송문교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영화에 급하게 단역 한 명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나는 송문교에게 부탁했었지. 제발, 그거 나 시켜달라고.
그때, 송문교는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왜?”
“… 네?”
조슬혜의 눈동자가 커진다.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대본은 작가님과 감독님 권한인거 몰라? 진짜 나한테 이런 부탁 하는 이유가 뭐야?”
“…. 오빠.”
“나 때문에 오디션 새로 볼지도 모른다고, 지금 나한테 책임지라고 말 하고 싶은 거야?”
조슬혜는 세상 다 잃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아주 짧게 지나갔다. 점점, 표독스럽게 변해간다.
본심이 나오는 것이다.
“… 오빠 때문이잖아요.”
“뭐?”
“이게 다 오빠 때문이라고. 왜 대사는 혼자 외워가고 지랄인데? 그렇게 튀고 싶었냐고!”
조슬혜는 자유연기만 봤어도, 내가 붙고 임주원이 떨어지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여겼다.
‘대본을 혼자 다 외워간 못난 오빠’에게 철저하게 유리하게 돌아갔던 오디션 현장이라고 생각했고, 만약 임주원이 붙었다면, 대본이 수정되며 자신의 배역이 날아가는 위기도 없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이 온갖 화풀이를 내게 뿜어내고 있다. 동시에 내 표정도 덩달아 차갑게 변했다.
“… 이거, 완전 구제불능이네.”
하지만, 틀렸다.
오디션을 자유연기를 보든, 지정연기를 안 보든, 앞치기로 보고, 뒷치기로 후려쳤든, 어떻게 보든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나는 자유연기 독백 대본을 위해, 내가 보지 않은 영화 다섯 권의 대본을 머릿속에 집어넣었으니까.
“뭐, 뭐라고요? 구, 구제불능?”
“야, 조슬혜.”
“….”
“만약 대본수정 중에 네 배역이 사라지면, 네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되는 거야. 네가 달랑달랑 언제 잘려도 상관없는 수준 밖에 못 보여 준거라고. 그런데 지금 누굴 탓해?”
“… 허? 하…!”
내 악담에 조슬혜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내 입에서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리려다, 멈춰서며 말했다.
“적어도 주제 파악은 하는 줄 알았는데.”
조슬혜의 얼굴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
“슬혜가 뭐래?”
박찬익 팀장의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꼴통이 지껄이는 골빈 소리를 굳이 떠벌리고 다닐 필요는 없다.
조슬혜. 확실히 화술에 대한 센스는 있어서 거울 보는 시간을 줄이고 대본을 더 읽는다면 언젠가는 붙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 시간이 빨리 찾아오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박찬익 팀장은, 대 알 것 같다는 얼굴로 말했다.
“… 표정 보니 대충은 알겠다. 걔가 좀 욕심이 많잖아. 배알 꼴려서 그러는 거니까, 네가 이해해라.”
나는 박찬익 팀장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내게 아무런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공정해가 기회는 부여해주었다. 악감정은 없다.
“어디보자, 어디까지 얘기했지?”
“감독님에 대해서요.”
“아, 그래. 문병철 감독.”
[청춘열차> 문병철 감독.들어보니, 생각보다 상대하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SBC 드라마국 PD로, 최근 작업했던 드라마 두 작품의 성적이 연달아 좋지 않아, SBC 드라마국 내에서 입지가 많이 좁아진 상태다.
미니시리즈 메가폰을 잡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까 싶을 정도고, 이번 작품을 실패하면 주말드라마로 밀려나거나, 기획 쪽으로 빠질지도 모른다고 한다.
“지금 감독님 심정은 9회말 타선에 들어선 투 아웃 마지막 타자의 심장이실 거다. 이럴 때, 홈런 한 방 빵! 날리셔야 하는데…”
“입지가 좁아진 이유가 뭐죠? 단순히 성적이 좋지 않아서?”
“아니지, PD가 무슨 계약직도 아니고.”
그래. 지상파 PD가 동네 구멍가게 직원도 아니고 당장의 시청률 때문에 좌천당할 파리 목숨들은 아닐 것이다.
더군다나, 감독님 전작들을 살펴보니, 시청률을 말아먹은 것도 아니었다.
동시간대 타 방송사 드라마에 비해 시청률이 저조했을 뿐이지, 모두 이름은 들어본 적 있을 정도의 유명세는 있었다.
“결정적인 이유는 시청률 때문이 아니야. 감독님 스타일 때문이지. 문병철 감독님이랑 작업했던 주연 배우들의 컴플레인이 몇 작품 째 계속해서 나왔거든.”
“컴플레인?”
“그래. 감독님 스타일이 좀, 남다르시거든. 이거 봐라. 갑자기 너한테 꽂혀서 대본이고 배우고 바꾸시겠다는 거 보면, 대충 짐작가지 않아?”
감독님은, 철저히 현장 중심적인 스타일이라고 한다.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실제 현장 분위기가 안 맞으면, 현장의 판을 아예 뒤집어 버리거나, 콘티를 아예 뜯어고쳐서 새로 만든다.
즉, 만드는 타입.
자연스럽게 촬영은 딜레이 될 수밖에 없고, 제작사 입장에서는 추가로 돈이 나가니 미친다. 대본은 계속해서 바뀌니, 배우들 입장에서는 기껏 준비해 온 대사가 바뀌면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대본 수정은 빈번히 일어날 거야. 하루 전날에 수정 쪽 대본 날아오는 일도 빈번할거고.”
연출이 자기 확신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의미다.
하지만 그게 과하면, 확실히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진다.
무능함과, 뚜렷함은 한 끗 차이지만, 다르다.
“실력 있는 감독님이긴 해. 하지만 매 작품마다 주연 배우랑 트러블을 만들어낸 트러블 메이커야. 중간에서 대처 잘 해야 한다.”
예술(藝術)을 핑계로 권력을 휘둘러서, 실제로 분량이 줄어든 배우가 있는가 하면, 늘어난 배역이 있다고 했다.
물론, 회차 계약이 정해져있으니, 아예 뺄 수는 없고 비중을 확 줄여버리는 것이다.
“… 그렇군요.”
얼추 감독님 스타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가 잘 보일지도 머릿속에 계산이 선다.
결국은, ‘말 잘 듣는 싹싹한 놈’을 좋아한다는 거다.
그 때, 궁금한 점 하나가 생겼다.
“근데, 송문교는 감독님이 직접 뽑으신 거래요?”
‘말 안 듣는 건방진 놈’인 송문교를 감독님이 직접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역시나 였다.
“… 제작사에서 입김이 좀 들어가긴 했는데, 왜?”
“아니에요.”
어쩐지, 송문교가 말아먹은 영화 제작사랑 같은 곳이더니.
영화로 손해 본 거, 드라마로 우려먹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냥 모르는 척 해줘.”
“아, 네.”
이러면 오히려, 나 보다 송문교가 걱정이지 않은가.
배우로서 자존심 강한 송문교의 스타일을 짐작컨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꼰대 감독님 밑에서 얼마나 잘 버틸 수 있을까.
“픽.”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촬영 분위기를 흐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지 뭐.
확실한 것은, 패가 내 쪽으로 유리하게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 책 먹는 배우님 – 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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