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60)
60.
어느 자리에 앉던,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 있는 (가제)[사도세자>의 대본 리딩.
나는 [양치기 청년> 때와 마찬가지로 이런 ‘호기심’ ‘경계’ ‘의구심’ 어린 시선들이 내게 쏠릴 것이라 예상했다.
데뷔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신인.
길었던 무명생활을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벼락 스타.
이런 시선들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빠르게 승승장구한 커리어.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라는 말처럼.
매번 그래왔듯.
이번에도 역시 그런 편협한 시선들을 뒤집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판단은 기우였다.
서울시 노원구에 위치한 비교적 허름한 영화사 ‘숲’의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작년과는 모든 것들이 뒤바뀌어 있었다.
“와! 도재희!”
내 등장에 적대감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렇게 연기를 잘한다며?’
[피셔>의 회식자리에서 시작된, 영화 [삭제>에서 임강백과의 신경전은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나간 상태였고.‘작년에 상은 어마어마하게 받았던데.’
서울독립영화제의 독립스타 상과 더불어, 최근 영화제에서 대상을 휩쓸고 있는 박진우 연출의 [양치기 청년>은, 내 등에 톡톡히 후광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작년 연말에 있었던 방송 삼사 연기 대상.
나는 이곳에서 세 개의 상을 수상했다.
SBC [청춘 열차>를 통해 받은 남자 신인연기상.
MKC 베스트 커플 상과 미니시리즈 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까지.
대상은 아니었다.
[숨 닿을 거리>로 치솟긴 했지만, 연기 대상을 노릴 정도의 인지도는 아니었을 뿐더러, 대상 수상자는 대하사극 [역모>의 임명한 선생님. 느닷없이 치고 올라온 라이징 스타에게는 2등 정도의 상이 보기에도 좋은 그림일 것이다.어쨌든.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개인타이틀 4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기며, 나는 당당하게 몇 단계를 수직상승하며 올라왔다.
“PD, 감독, 작가들한테 이름이 계속 오르내린 다던데.”
“그 뿐인가요? 투자자들이 엄청 좋아하죠. 아직 치솟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치솟을 포텐을 가진 배우.”
“에이, 이미 치솟았지.”
작은 물결 여럿이 모이면 파도가 되듯.
배우 도재희라는 파도는 이들에게 제법 거세게 일었다.
송문교나 임주원 같이 경쟁자가 치고 올라가는 모습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더 없이 무서운 해일을 동반했고.
새로운 뉴 페이스를 원하는 감독과 작가들에게는 캐스팅 보드 최상단에 이름을 올리는 파도 역할을 했다.
“우리 영화로 일찍 물어오길 잘 했지. 안 그래?”
“그럼요! 저희랑 비슷한 시기에 들어가는 영화들 다 긴장하고 있을 걸요? 증명된 에이스잖아요.”
재익이 형도 한 술 더 떴다.
“요즘에는 재희 차기작 관련 전화 받는 게 하루 업무의 시작과 끝이라니까요? 어찌나 시도 때도 없이 물어보는지…”
더 이상 나에 대한 증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2019년을 새롭게 써내려갈 스타 탄생의 시작.
리딩 현장은 시작 전부터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시작 해볼까요?”
“감독님. 아직 선배님 한 분 안 오셨습니다.”
“음, 누구?”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있으면 매사가 다 좋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어딜 가나 구설수에 오르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
오늘 리딩에서 도마 위에 오른 사람은.
“유경성 선배님이요.”
조연출의 말에 임창태 감독님이 그러려니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잠시 기다려야지.”
유경성 선배.
그가, 문을 열고 영화사 사무실로 들어서자 뜨겁던 분위기가 빠르게 식었다.
5분을 지각한 것을 제외하면 그가 딱히, 분란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유경성 선배님의 번뜩이는 안광은, 주변 분위기를 딱딱하게 만드는 그런 아우라가 존재했으니까.
또 여전히 포털사이트에 배우 유경성을 검색하면, 연관검색어로 ‘개런티 갑질’이 최상단에 위치한다.
하지만, 유경성 선배는 이런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중지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말했다.
“… 이거, 어째 분위기가 어째 싸하네요.”
그러자 조연출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두 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그럴 리가요 선배님. 어서 안으로 드시죠.”
어색해진 공기를 가볍게 하려는 움직임이었고,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자 유경성 선배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이야, 우리 후배님. 알고 보니 어마어마한 분이더라고?”
연말에 상을 싹쓸이 한 것을 본 모양이다.
그제야 가만히 앉아있던 다른 배우들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유경성을 맞이했다.
“크, 크흠!”
“경성 씨, 오랜만입니다.”
하지만 어딘가 불편한 분위기다.
사실 분위기가 이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기본적으로 (가제)[사도세자>는 사극이고, 그만큼 나이대가 많은 배우들이 참여한다.
즉, 여기모인 수많은 40, 50대 배우들은 유경성의 커리어 황금기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이고, 동시에 그의 몰락에 미소 지으며 유경성의 밥줄을 나눠먹던 사람들이다.
“이거, 복귀하셨다는 이야기는 듣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뵈니 느낌이 다르네요. 저, 기억하십니까?”
“경성 씨. 오랜만입니다. 저 아시지요?”
‘질투심’, ‘경계’, ‘의구심’으로 만들어진 시선들이 유경성에게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
하지만 유경성은 나에게 보내던 호감과는 다르게, 다른 배우들에게는 눈에서 살얼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 임창태 감독과 나를 한정식 집에서 만났을 때 나를 무시했던 것처럼, 노(老)배우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는 나와 임창태 감독님에게만 인사했다.
그리고는 뒤늦게 물었다.
“이 분들은 누굽니까?”
대놓고 면박.
유경성을 의식하던 50대 배우들이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으, 으흠!”
“저, 저희를… 모르십니까?”
… 알겠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다.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절대 굽히는 법을 모르는 남자.
지금 자신의 위치와는 관계없이, 성격만큼은 옛날 ‘전성기’를 구가하던 유경성이다.
‘발톱이 빠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라 이건가.’
이런 태도가, 수십 년을 살아남은 노배우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저마다 불쾌한 기색을 뿜어냈지만, 임창태 감독이 앞에 있다.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 배우들은 저마다 속으로 욕지기를 삼키며, 자리에 앉아 대본을 펼쳐들었다.
나는, 유경성에게 일종의 흥미로움을 느꼈다.
내게 한 조언.
‘더러운 성질머리 드러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더라고.’
그런데, 본인은 정작 그 성질머리를 제대로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결국 사람은 변하지 않는 다는 건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한 물 갔다고 평가받는 왕년의 스타가 이들에게 어떻게 주먹을 날리는지. 아니면 단순한 허세인지.
“읽어볼까요.”
*
조연출이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블랙아웃 상태에서 떠오르는 1762년 영조 38년. 자막과 동시에, 혜경궁 홍씨의 타이트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품에 안겨있는 어린 이산. 빠르게 지나가는 홍봉한과 영빈, 그리고 영조. 모두가 무덤덤하게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이 집중된 곳은 궁궐 중앙에 애처로이 서 있는 뒤주. 그런데, 소리가 들린다.”
콩콩콩!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머릿속에는 사도세자, 이선의 외침들이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하지만, 나는 아직 대사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또 다시 테이블을 두드렸다.
쿵쿵쿵.
조금씩 힘이 생긴다. 조금만 더 해볼까.
쿵쿵. 쿵. 쿵쿵쿵!
탄력이라도 받듯, 움직임과 함께 이선의 감정들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친다. 목에 핏대가 서고, 이마에는 힘줄이 돋아난다. 눈에서는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감정이 뒤섞여 나오고, 용수철이 튕겨져 나오듯 발작하며 소리쳤다.
“아바마마!”
쿵쿵! 쿵!
“살려주시옵소서!”
삽시간에 긴장감이 요동친다.
“제발 살려주시옵소서어어어!”
조금 드라이 하게 시작할까, 가벼운 마음으로 장내에 들어섰던 배우들에게 날리는 외침이기도 했다.
단순히 대본을 읽으러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제껏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 했듯, 모두가 배우로서의 최소한의 역량을 증명해야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유경성 선배님 불을 뿜으며 말했다.
“잡신에게 들려 미쳐버린 세자에게 어찌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내 외침을, 호기롭게 받아친다.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몰입감으로 대사를 던진다.
또 다시 장내의 분위기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열심히 해.’
‘적당히 란 없어.’
마치, 내 생각을 정확히 읽고 말하는 듯 했다.
유경성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다. 좌중을 얼려버릴 것 같은 독특한 분위기였다.
“죽으라. 그래야 모두가 산다.”
내가 본 유경성은 영조였다.
52년간 조선을 이끈 성군이었지만- 천민 후궁의 배에서 태어났다는 열등감과, 형(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 논란.
스타라는 이름의 왕좌에서 물러난 지금, 시기와 질투를 받는 실제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유경성의 얼굴은 설득력까지 갖추고 있다.
“영빈(사도의 생모). 혼절할 듯한 얼굴로 급기야 쓰러지고. 이를 무덤덤하게 바라보는 영조의 얼굴. 턱수염이 떨려온다.”
나와 유경성 선배는 의외로 호흡이 잘 맞는 부분이 있었다.
맡은 바 소임인 ‘연기’에 목숨 건 인간들 마냥 분위기를 다잡아 버린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조연들이 바빠졌다.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대사를 느닷없이 외우며 본인 대사를 읖조리기도 했다.
그리고 임창태 감독은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유경성의 연기는 계속 이어졌다.
“말해보라. 늙은 개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그, 그것이…”
“나를 두고 한 말이더냐? 늙은 개는 죽어 마땅하니, 나 역시 늙었으니 죽어야겠구나.”
“그것이 아니오라…”
“말해보라!”
“느, 늙고 병들어 미쳐버리기 전에 죽고 싶다고 한 적은 있사옵니다…”
연기가 강렬하게 뇌리에 꽂힌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리라.
*
홍봉한(사도의 장인) 역을 맡은 노배우는 리딩 중에 일어난 이 때 아닌 연기 배틀에 장단을 맞출 수가 없었다.
서로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잡아먹을 듯 으르렁 거린다.
완벽한 군주이고자 하는 영조와, 자유분방한 반골 기질이 다분한 사도의 싸움.
“와.”
둘이 맞붙는 씬에서는 넋을 놓고 보고 있다 본인 대사를 놓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특히나 한 때는 ‘괴물’로 불리던 유경성의 연기력은 전혀 녹슬지 않았고, 오히려 거친 풍파를 겪어내며 더욱 단단해져있었다.
유경성이 무너지고 2000년대 후반, 그 빈자리를 탐했던 배우 중 한 사람으로서, 이번 기회에 영화에서 유경성을 제대로 꺾어보고자 했던 생각마저 처참히 무너질 정도.
그런데 그런 ‘괴물’에 전혀 밀리지 않고 오히려 초장부터 압도하는 ‘사도’ 도재희의 연기는.
“술! 아니, 술 말고 칼을 가져오라! 자결하라 명하는 왕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는가! 차라리 칼로 내 몸을 베겠다!”
“…..”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드는 몰입감을 선사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임창태 감독과 조연출 역시 마찬가지다.
‘미쳤구나.’
지문을 읽으면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까, 기대감을 품게 된 조연출의 까만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있었고.
임창태 감독은 조금 심심했던 (가제)[사도세자>의 새 제목을 떠올리고 있었다. 도재희의 연기를 보면서, 제목을 바꿔야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
“…. 뒤주를 바라보는 영조의 무표정한 얼굴. 아주 느리게 달리 인(in).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지듯, 공허한 얼굴. 마치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쓸쓸함. 복합적인 얼굴에서, 빠르게 블랙아웃. 엔딩 크레딧 올라간다.”
“끝.”
카메라가 불을 뿜듯, 쉴 새 없이 플레시를 터뜨리게 만든 리딩 현장이 한 바탕 끝이 났다.
아주 커다란 호흡을 뱉어내며, 몰입에서 빠져나오는 유경성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도재희의 얼굴.
리딩이 끝났음에도 독기 가득하던 그 얼굴에 ‘사도 이선’이 겹쳐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동시에 혀를 내둘렀다.
‘뭐 저런 자식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세상에 인재는 많다는 생각에 피식,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과거를 추억하며 살고 있는 자신이지만. 옛날의 자신보다 훨씬 낫지 않은가.
그 때, 임창태 감독이 박수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짝짝짝짝.
빠르게 퍼져나간 박수소리에는 간간히 환호성이 섞여 나왔다. 기자의 얼굴에는 마치, 영화라도 한 편 감상한 것 같은 즐거움이 배어있다.
“자, 휴식 시간을 갖기 전에 발표 하나 하겠습니다.”
임창태 감독이 손사래를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곰곰이 제목을 떠올려보았는데… 제목으로 이건 어떤지 좀 들어보십시오.”
영화의 제목을 바꾼다.
정체성마저 흔들어 버리는, 제법 중요한 순간.
“[이선>이 어떻습니까. ‘세자’ 보다는, ‘인간’ 이선의 삶에 충실한 제목으로.”
사도세자가 정말 광인이었건, 아니건.
영조가 형을 죽였던, 죽이지 않았건.
역사적인 논쟁을 떠나, 동궁에서부터 시작된 ‘인간 이선’과 ‘아버지 영조’의 비극에 초점을 맞춘 제목.
더불어 정말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대본과 일체화된 연기를 보여준 도재희의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메인은 도재희니까.’
나는 바뀐 영화 제목이 썩 마음에 들었다.
더욱 내게 포커스가 맞춰진 영화라는 느낌.
거기다, 영화 [이선>을 통해 유경성과 중견배우들의 자존심 싸움은 계속 되겠지만.
위에서 이 싸움을 보며 즐기는 사람은, 결국 나다.
[ 책 먹는 배우님 – 60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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