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62)
62.
차에서 내려 이들에게 다가가니, 조연출이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오셨군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별일은 아닙니다. 왜 으레 있는 기 싸움이죠. 이게 첫날부터라 문제지만.”
알 만하다.
잘나가던 동네 대장이 잠시 쉬는 동안, 그 밑에 있던 2인자들이 대장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영원히 쉴 줄 알았던 대장이 돌연 필드로 돌아와 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해 봐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똥 덩어리들에게 개똥같은 짓거리 하지 말라고 했다.”
“….”
아무래도, 별일 인 것 같은데.
“제가 말려볼게요.”
앞으로 다가가, 선배님들에게 말했다.
“저… 선배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러자 이들의 시선이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꽂혔다.
마치, ‘또 뭐야? 말리지 말라고 했지!’ 라고 묻는 듯 했는데.
“끄응.”
그게 나라서 함부로 말하지는 못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선배님들”
내 말에 입을 꾹 다물고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노려보며 씩씩 거리던 홍봉한과 강삼재 선배님은, 돌연 등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그냥 참겠는데. 앞으로 예의는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홍봉한과 강삼재 선배님들이 사라지자, 유경성 선배가 셔츠 윗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며 킬킬 웃었다.
“… 속으로 같잖은 생각들은 다 하는 개똥벌레들이 겉으로는 아주 신사 납셨네.”
그리고는 유경성 선배가 나를 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그치?”
마치 그 눈은 ‘너는 이해하지?’ 라고 묻는 듯 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마주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선배님이 제게 성질머리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좋을 거 하나도 없다고.”
그러자 유경성이 껄껄 거리며 웃었다.
“너는 죽이라고. 아직 젊잖아.”
이 남자는, 적어도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
촬영장에서는 스탭을 제외하고는 마음 터놓고 말할 배우는 적어도 나 밖에 없다.
나는 어느 정도, 이런 유경성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끝물인데. 자존심 죽이면서 살 필요 있나.”
유경성이 나를 볼 때면,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하면서, 옛날의 자신을 떠올리는 듯 했으니까.
“감독님 은퇴작 도우면서, 나도 나름대로 마지막을 멋지게 준비하는 거다. 말년에 저런 비열한 것들한테 고개 숙일 필요는 없잖아.”
고개 숙이지 않고, 어깨 피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
그것 나름대로 멋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내게는 아직 먼 이야기겠지.
*
“….”
조연출에게 선배님들이 싸움이 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유경성 선배가 주차장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홍봉한과 강삼재 선배들이 조연출이 나눠준 김밥과 커피를 받아들고 안으로 들어가려했고.
배가 고팠던 유경성 선배가 김밥은 어디서 받았냐고 물었는데, 홍봉한과 강삼재는 그런 유경성 선배를 무시하며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은 것.
그러자 열이 뻗친 유경성 선배가 ‘개똥벌레 같은 것들이.’ 라고 내뱉으면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이고.
잠깐이지만,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취소다.
무슨, 고작 김밥 한 줄 때문에.
하지만 조연출은 자기 잘못이라고 했다.
“유경성 선배님은 회사 없이 하시거든요. 매니저도 없으시니 제가 더 챙겼어야 하는데…”
“아, 회사가 없으세요?”
“네. 그래서 복귀 시기가 늦어진 이유도 있죠. 아무래도 업계에서 ‘태도불량’으로 낙인 찍혔으니까요. 그 불같은 성질도 복귀를 늦추는 계기가 되었고.”
그건 몰랐는데.
매니저 없이 활동하는 배우는, 의외로 많다.
회사 없이 에이전시를 통해 작품을 소개 받아, 촬영 오는 배우들.
하지만 대부분 단역이다.
이렇게 ‘주연급’에서는 매우 드문 경우다. 회사가 없어도 최소한 매니저 역할을 해주는 누군가는 동행하고는 했으니까.
혼자 연기하고, 혼자 운전하고, 혼자 밥도 챙기는 말년 배우의 모습.
어쩐지, 애처로운 마음도 들었다.
“이런 경성 선배님 성격 상, 이런 일을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닙니다. 임 감독님도 특별히 신경 쓰라고 말씀 하셨고요.”
이 분도 영화판에서 경력이 상당하시지.
입봉을 미루며, 벌써 15년 넘게 영화판에 계셨으니 유경성과도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
“그래도 캐스팅 하신 이유는, 임강태 감독님과의 인연 때문이시겠죠?”
“뭐, 그렇죠. 비단 이유가 그것 뿐만은 아니지만.”
“그럼요?”
“연기죠. 감독이 배우를 찾는데 이것만큼 확실한 이유가 있을까요.”
제 아무리 문제아라고 손가락질 받아도, 찾을 수밖에 없는 유경성의 연기력.
“임 감독님은 경성 선배님의 진가를 잘 알고 계시거든요.”
감독님 자신이 데뷔 시킨 제자나 다름없는 유경성을 다시 스크린으로 불러들인 것은, 사제지간의 연 보다 그 실력에 대한 신뢰가 먼저였을 것이다.
어쩐지 부러운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내가 작업했던 감독들에게 이런 배우로 기억될까.
적어도, [청춘열차>의 문병철 감독이나, [양치기 청년>의 박진우 연출에게는 그런 배우로 남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제는 임창태 감독의 마지막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
“어쨌든, 재희 씨가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을 것 같은데, 제가 잘 챙겨야죠.”
내가 말했다.
“저도 챙기겠습니다.”
“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재익이 형도 거들며 말했다.
“선배님 식사는 앞으로 저희가 챙길게요. 김밥 같은 것도 앞으로는 제가 맡겠습니다.”
조연출이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러실 것 까진….”
“가족인데요, 뭘. 앞으로 3개월 동안 가족이지 않습니까?”
재익이 형의 넉살에 조연출이 기분 좋게 웃음 지었다.
“그렇군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이제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제가 너무 불편합니다.”
“아하하! 천천히 놓겠습니다.”
나는 조연출과의 대화를 끝내고, 한창 촬영 준비 중인 현장을 거닐며 생각했다.
유경성 선배도, 다른 선배님들도.
양 쪽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
누구의 편을 들기보다는, 최대한 싸움 없이 이 현장을 이끌어나가는 것이 내 능력이기도 할 터.
나는 그 어떤 작품보다 ‘연기 외적인’ 능력이 많이 필요한 현장이 아닐까 생각했다.
선배들 사이에서 구박받지 않는 예쁜 후배.
후배지만, 선배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주연.
“저, 서, 선배님.”
그리고 후배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든든한 선배.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등을 돌렸다.
그곳에는 소례복(小禮服)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아, 오랜만이에요.”
이태리.
혜경궁 홍씨 역을 맡은 스물여덟 살의 여배우.
영조의 며느리이자 정조의 어머니. 동시에 내 정실부인 역인. 데뷔년도는 나와 같지만, 나이가 많아서 내가 선배다.
“괘, 괜찮습니까?”
“예?”
내가 되묻자, 이태리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치마를 움켜쥐고 말했다.
“… 의상이요.”
“아. 예쁘네요.”
내 말에 이태리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저러니까 눈이 안보일 정도로 작아진다.
“감사합니다!”
데뷔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했지만, 그 동안 단역과 고정단역을 전전하다, 제대로 주목받는 것은 이게 첫 작품이라고 하였다.
어쩌면, 다시 찾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기회.
신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대다. 부디, 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휘휘, 바람을 들이마시며 화려하게 꽃단장 중인 창덕궁 야외 세트 중심에 섰다.
그러자, 이태리가 물었다.
“근데 선배님은 추운데 왜 밖에서 대기하십니까?”
1월의 바람은 싸늘했지만 나는 대기실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그 동안 많이 배웠지.
나는 임명한 선생님이 내게 그랬듯, 별 다른 의미 없다는 듯 가볍게 말했다.
“혼자 쉬면 눈치 보이잖아요. 후후.”
열심히 일하고 있는 스탭들을 향한 말이었지만, 완벽하게 잘못 알아들은 이태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선배님도 다른 선배님 눈치를 보십니까?”
“….”
“저만 대기실에 있기 눈치 보이는 줄 알았습니다. 어쩐지 추운데 밖에 계시더라니…”
“….”
곧이곧대로 믿는 순수한 캐릭터였어?
아, 어쩐지.
*
기본적으로 영화 [이선>은 연대기별로 진행된다.
오프닝 타이틀이 떠오르기 전, 프롤로그 격으로 뒤주 장면이 보여 지고 난 뒤에 바로 붙는 장면은,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죽음과 늦둥이로 태어난 ‘이선 아역’으로 시작한다.
노론과 소론. 정치적 이념다툼 때문에 아비의 손을 떠나 동궁에서 길러진 ‘아역 이선’의 외로움과 총명함. 아들을 사랑하는 영조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장면들은, 따뜻함마저 감돌지만.
16씬 이후부터는 ‘이선’인 내가 등장하는데 분위기는 완벽히 급변한다.
부자간의 대화 단절, 아들에 대한 불신, 못마땅함, 불만, 자유를 향한 갈망, 왕에 대한 공포심 따위가 뒤섞이는 장면들.
대망의 크랭크 인 첫 촬영은.
의대증(衣帶症 옷 입기를 두려워하는 강박증의 일종)에 걸린 이선을 찍는 35씬으로 정해졌다.
의대증.
왕에 대한 공포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이선은. 의관을 제대로 갖추면, 왕을 보러 가야하니 옷을 입으면 안 된다며 일종의 강박증을 보이는 장면이다.
옷을 걸치려는 궁녀를 칼로 해하고, 곁에 있던 내관을 위협하는 장면.
“재희야. 시작하자!”
“네”
어느 새, 말을 놓는 것이 익숙해진 조연출이 나를 불렀고 백의 무명저고리만 입은 상태로 수염을 붙이고, 피부 분장까지 모두 마친 나는 카메라 앞으로 걸어갔다.
동궁 전으로 지정된 건물 입구부터 야외까지 걸어 내려오며 궁녀와 벌이는 실랑이다.
나는 ‘죽는 궁녀1’ 역을 맡은 단역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촬영이 한 두 번이 아닌 듯 여유로운 모습의 40대 단역배우가 찡긋 웃으며 말했다.
“우와, [피셔> 잘 봤어요. 수염도 잘 어울리시는데요.”
“하하.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조연출이 들고 있는 무전기에서는 임창태 감독의 말이 흘러나왔다.
– 롱 테이크로 쭉 딸 거니까 재희 씨 하고 싶은 대로 한 번 해봐.
내가 하고 싶은 대로라.
콘티는 대충 짜여져있다.
콘티는 감독의 머릿속을 정리해놓은 세계관. 임창태 감독은 내게 그 세계관을 공유해도 좋다고 말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러자 소품 팀과, 의상 팀 스탭들이 내게 달려왔다. 동궁전 입구를 지키는 병사의 허리춤에 칼집을 매달고, 의상 팀은 내 옷매무새를 마지막까지 정리했다.
“리허설 갈게요.”
조연출의 외침에 나는 입구에 궁녀와 함께 섰다.
“여길 이렇게 걸어 나가서, 저 검 뽑아서 쓰면 되는 거죠?”
“네네.”
나는 드라이 하게 움직임을 몇 번 맞춰보았다.
걸어가서 치우고, 신경질적으로 치우고. 급기야는 발작적으로 검을 뽑아 죽인다.
그리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을 억제하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는 이선.
왜 옷을 입고 싶어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은 이미 머릿속에 있다.
오히려.
벌써부터 팔 끝이 간질 간질거리는 기분이다.
틱 장애라도 있는 듯, 눈꼬리가 꿈틀거리고, 입술이 뒤틀릴 것 같다.
그러자 눈치 빠른 조연출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갈까요?”
대답대신 내가 고개를 슬쩍 끄덕이자, 조연출이 무전기에 대고 황급히 말했다.
“바로 갑니다. 스탠바이.”
좌중이 고요해진다.
곧 이어 임창태 감독의 목소리.
– 액션!
[ 책 먹는 배우님 – 6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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