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63)
63.
발작적으로 옷을 쳐냈다. 어깨에 얹혀있던 궁복이 바닥을 굴렀지만, 궁녀는 오늘 만큼은 꼭 의복을 정제하겠다는 비장함 마저 엿보인다.
“저하.”
그리고는 새 의복을 꺼내 다시 내 어깨 위에 얹는다.
“이것 치워라.”
“저하, 날이 춥사옵니다. 의복을 입지 않으시면 반드시…”
“치우래도!”
별안간 소리를 내질렀다.
벙찐 얼굴의 궁녀들.
내 뒤에 따라오는 궁녀들의 손에는 여벌옷이 스무 벌이나 들려있다.
저 많은 예복을 보는 순간.
“하”
갑갑함이 밀려온다.
저 옷을 입는 순간, 예를 갖추고 아버지를 보아야 한다.
지금 걸치고 있는 백의 무명적삼마저 찢어발기고 싶을 만큼 목 끝이 간지럽다.
이 두려움의 끝에는 뭐가 닿아있는지 나조차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 저하, 입으셔야 합니다.”
“닥치래도!”
발작적으로 병사의 허리춤에 매인 칼을 뽑아 궁녀를 찔렀다.
푸욱!
“어억!”
시뻘건 피가 백의를 물들이고 얼굴에 잔뜩 튀었다.
“헥, 헥”
궁녀들은 공포에 몸서리치며 머리를 쳐 박고 움츠렸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이 되지를 않는다.
“후욱, 후욱”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지금은 그냥.
“으아아아아아!”
가만히 있으면 돌아버릴 것 같아, 의복을 찢어발겼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들어 찢어버리고, 칼로 그어버렸다.
겁에 질린 궁녀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고, 나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휘릭- 휘릭-!
그래도 가슴속에 가득 찬 이 울화통은 멈추지를 않는다.
움직임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찌, 어찌 살아야한단 말인가.”
뜨거운 무언가가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식기를 반복한다.
-오케이!
무전기에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모니터에서 촬영본을 확인했다.
연기를 확인하던 임창태 감독님이 돌연 물었다.
“지금 기분 어때? 시원해?”
“….”
시원하냐고?
만족스럽게 연기했냐는 질문인지, 아니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반어법인지.
감독님의 질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나는, 조금 다르게 답했다.
“갑갑합니다.”
이선의 심정을 말한 것이었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이 갑갑함.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현실을 타파할 수 없을 것 같은 막막함.
그러자 임창태 감독이 크게 콧소리를 뿜어내며 웃었다.
“내 생각도 그래!”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임창태 감독님은 모니터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저기서 똥을 싸도 이선이야”
대사, 몰입감, 호흡 따위는 뛰어넘은 이선, 그 완벽한 상태.
아무래도, 배역에 몰입해서 답한 내 말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
촬영이 끝나고 유경성 선배님과 홍봉한 강삼재 선배님에게 각자 다른 핑계를 대며, 숙소 근처 막걸리 집으로 불러냈다.
양측 다, 후배 주연배우가 싹싹하게 술 마시자고 하는 모습이 귀여웠는지 흔쾌히 응하셨는데.
“경성 씨가 왜 여기 계십니까?”
“… 그러는 그 쪽들은?”
아이고.
입구에서 세분이 딱 맞닥드려 버렸다.
“그야 우리는 재희가 술이나 한 잔 하자고…”
“… 뭐?”
세 분이 나를 동시에 바라보셨다.
선배님들은 내가 일부러 이 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을 알고 얼굴을 구기셨는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선배님들의 등을 밀어내며 자리로 안내했다.
“자자, 일단 앉으십시오.”
그리고 나는.
“사장님! 노가리 세트에 맥주 주세요.”
주문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크흠!”
“… 염병.”
다행스러운 점은, 세분 모두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나가시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가만히 놔두면 낫는 상처가 있고, 극약처방이 필요한 외상이 있는데. 내 경우에는 후자였다.
3개월의 레이스는 짧다.
양측 사이의 간극이 단순한 ‘자존심’ 싸움 이외에는 아무 알맹이도 없는 상황에서 굳이 팀 사기를 꺾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저희끼리, 술 한잔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유경성 선배가 마른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시커먼 남자 놈들끼리 무슨.”
“그러실까봐 여자도 불렀습니다.”
“응?”
“여자요. 저희 팀에 젊은 여자라면 한 명 뿐이잖습니까?”
그러자 입구에서 막 샤워를 마쳤는지 화장기가 전무한 뽀얀 얼굴에, 가벼운 아디다스 트레이닝 복을 입은 이태리가 가게로 내려왔다.
“여기요.”
내가 손을 흔들자, 한달음에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리고 갓 들어온 전입 신병마냥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인 배우 이태…”
내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앉아요. 앉아.”
사람들 다 쳐다보게 뭐하는 거야.
이태리 입장에서는, 극중 남편과 아빠, 시아버지가 앉아있는 불편한 술자리였을지도 모르지만.
다행히도 표정은 밝아보였다.
“저도 술 좋아합니다. 예뻐해 주십시오!”
그나저나 저, 괴상한 군대 말투는 어디서 배운 거야?
하지만 선배님들 반응은 나쁘지 않다.
“시커먼 놈들끼리 있는 것 보다는 낫네.”
“클클. 적당히 마셔요. 술은 잘 마셔요?”
“말씀 편히 해주십시오!”
극을 이끌어갈 주조연급 배우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정말이지 기념비적인 일이지.
[청춘열차>의 소윤이나, [숨 닿을 거리>의 유아름 같이 달달한 성격은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깍듯하면서 엉뚱한 면이 있는 이태리는 선배님들이 좋아할 모습을 다 갖추었다.“술 한 잔 더 드립니까?”
“응?”
“큭큭큭, 말투 뭐야, 컨셉이야? 일부로 그러는 거야?”
거기다 은근히 중독성 있는 말투까지.
선배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자리에서 같은 대화를 나누고 같이 웃는 것은 이미 풀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근데, 자네 이름이 왜 이태리야? 예명이야?”
“본명입니다.”
“아, 그래?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어?”
“….”
아, 이 분위기 뭐야.
홍봉한 선배의 썩은 아재 개그에 유경성 선배가 눈알을 부라리며 중얼거렸다.
“염병하네. 분위기 봐라. 부장님이야? 애 이름 가지고 뭐하는 짓이야. 다 늙어가지고.”
“… 뭐요?”
아아, 제발 좀.
어쨌든, 드디어 선배님들이 서로 대화를 트셨다.
이 괄목할 성과에 기뻐해야 하나.
“자자. 선배님들.”
나는 아재개그에 몸서리치며,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유경성 선배님의 팔을 붙잡고 억지로 잔을 들어 올렸다.
“한잔 하시죠.”
“크흠.”
“흠!”
이들 사이에 맺혀있는 꽁한 감정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렇게 자주 얼굴을 보다면 금방 풀리겠지.
앞으로 이런 자리를 매일 매일 만들어줄 요량이다.
매일 같이 보다보면, 좀 나아지겠지.
내 생각은 이렇다.
자존심 싸움이 하고 싶다면, 제발.
카메라 앞에서만 하고.
카메라 뒤에서는 좀 웃자고요.
*
첫 촬영은 여러 가지를 암시했다.
물론, 좋은 쪽으로.
중견 배우들과의 불화를 예감했음에도 강행했던 ‘유경성’의 캐스팅은, 영화에 숨어있는 유일한 ‘불안감’ 으로 작용했지만. 그것은 금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나경언이라는 자의 상소를 내 받아 보았다. 내게 이러는 연유가 무엇이냐? 정말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본인 스스로 타고난 ‘영조’ 역임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우연한 인연으로 대세 도재희의 마음을 돌리는 것에 성공한 임창태 사단.
도재희X유경성.
이 두 명의 배우는, 전라북도 부안의 테마파크 안에서는 완벽한 부자(父子)로 살았다.
“선배님, 식사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끌끌, 어제 갔던 국밥집 괜찮던데. 거기로 갈까?”
둘의 관계는 사적으로는 가까운 듯 보였지만, 기이하게도 슛 사인이 떨어지면 멀기만 한 영조와 이선으로 차갑게 변했다.
욕심, 실망, 불신에서 증오. 복합적인 눈빛 연기가 일품인 유경성과, 그냥 ‘사도세자’ 그 자체인 도재희.
거기다 첫 촬영에서 일어난 말다툼 이후, 홍봉한과 강삼재 같은 배우들은 유경성에게 자극이라도 받듯, 열연을 펼쳤다.
“대리 청정을 하고 계시는 세자 저하의 만행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사옵니다!”
“간밤에 무고한 이들을 해하고, 동궁에 무녀와 비구니를 불러들여 관에 들어간다 하옵니다. 산 자가 어찌 관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이해하기 힘든 기행이옵니다.”
하루하루가 피 튀기는 연기 배틀이 아닐 수 없었다.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씬들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현장 분위기는 점점 물살을 타고 있었다.
“이거, 예감이 오지 않아?”
“… 나도 그 생각했어. 너랑 똑같은 생각.”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에 만족하려 했던, 작은 욕심.
메가 흥행까지는 기대하지 않던 스탭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 것에도 성공했다.
“어쩌면… 500만도 찍겠는데.”
“700만 넘을지도 모르지. 나라면 두 번 봤을 거거든.”
임창태 감동의 영화가, 인물의 감정 선에 집중하여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영화라고는 하지만. ‘대세’라고 불리는 스펙타클한 천만 영화들에 비하면, 다소 단조롭다.
손익분기점은 매번 넘겼지만, 200만 3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지 못하는 이유.
임창태 감독의 비교적 대사위주의 감성.
헌데, 이런 단점까지 모두 연기로 커버해버린다.
단순한 대사바리 씬 일 뿐인데도, 주고받는 대사 사이에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다.
액션영화 못지않게, 강하게 몰입하게 되는 이유다.
“임 감독님, 데뷔작이 제일 성적이 좋았지?”
“그랬지. [봄에 마실 물>. 당시랑 지금이랑은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
“확실히 유경성 선배라는 카드를 쓴 이유가 있었네.”
“거기다 재희는 신의 한수고.”
촬영 분위기는 자리 잡혀간다.
기 싸움은 줄어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에 충실 한다.
동시에 매일 매일 확신하고 있었다.
이 영화, 된다고.
*
가끔은, 시리도록 차가운 공격적인 모습보다.
뜨거운 경쟁심이,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열흘간의 첫번째 촬영 일정이 끝났다.
하지만 나와 이태리의 촬영이 끝났을 뿐이지, 이곳 테마파크에서는 4일 내내 선배님들과 우리 아역 배우들의 촬영이 예정되어있다.
나와 이태리가 없는 사이, 우리 선배님들 또 싸우시지는 않겠지?
어쨌든.
다음 촬영 일정인, 전주 촬영소의 실내세트가 아직 완성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 앞으로 열흘 정도 휴식이 주어진 셈이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재희야 고생했어! 열흘 뒤에 보자!”
피곤했지. 카니발 뒷자석에 늘어져 버너 위 오징어마냥 꿈틀거리고 싶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에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이태리가 나를 붙잡았다.
“저, 선배님.”
테마파크 입구.
이태리가 내 옷깃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다.
“마,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리고 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세트장 안내지도와 함께 붙어있는 영화 촬영 협조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영화 [이선> 촬영 안내.
감독 : 임창태
출연 : 도재희, 유경성, 이태리.
*촬영으로 인해 색칠된(그림) 인근 세트장은 관람이 불가합니다.
*소란은 삼가 해 주십시오.
*휴대폰은 반드시 꺼주십시오.
“…..”
입구 외벽에 붙어있어 매일 아침에 보게 되는, 새삼 새로울 것도 없는 안내문.
“저게 왜요?”
그러자 이태리가 말했다.
“조금 뜬금 없는 얘기일 수도 있는데… 꼭 선배님께 말씀 드리고 싶었어서요.”
“말씀해보세요.”
“저기 적혀있는 제 이름을 보면, 가끔 현실이 맞는지 의심하고는 했습니다. 매일 아침이, 새로워서… ”
고작 안내문에 세 번째로 적힌 이름가지고 이러다니, 포스터라도 나오면 울겠다.
“….”
하지만, 저 마음이 어떤지 잘 알 것 같았다.
조금만 힘을 줘도 끊어져버리는, 얇은 한 줄의 희망을 붙잡고 여기까지 당겨온 거다.
그 믿지 못할 결실이 눈에 보이는 환희의 순간.
뭐, 이것도 둔감해지지만.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저 이 작품, 캐스팅 된게 아니라 오디션 봐서 들어온 거 말씀 드렸던가요?”
“네. 그랬죠.”
지난 2년간, 단역과 고정단역을 오가다 ‘임창태 감독의 은퇴작’ 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내고 기회를 잡았다고 했다.
[청춘열차> 이전의 나처럼.“오디션 보면서, 매일 매일 이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왔습니다. 배우로서 당당할 수 있는 순간을요.”
그녀가 갑자기 이런 말을 왜 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다짐이다.
내가 조승희와 임명한을 [피셔> 현장에서 처음 보고 느꼈던 감정.
저들과 어깨를 당당히 하고 싶은 욕망, 이제야 한발을 내딛었다는 뿌듯함.
그녀는 내게서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태리가 환하게 미소 짓더니 다짐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투정부리듯 말했다.
“이번 촬영에는 밀렸지만, 다음 촬영부터는 조금 달라져 있을 겁니다. 각오하세요!”
“아아….”
상대를 이겨먹어야 올라가는 세상.
이태리는, 내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도전장을 내던졌다.
나는 장난스럽게 미소지으며 화답했다.
“그럼요. 얼마든지요.”
선배고 후배고, 모두가 경쟁을 벌여야하는 무대.
오히려, 가슴이 두근 거리는 이런 선의의 경쟁은 환영이다.
그 동안, 너무 다양한 사람들과 싸워서 몰랐는데 말이야.
지금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역시, 카메라 뒤에서는 웃는 것이 좋다.
[ 책 먹는 배우님 – 63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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