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66)
66.
임창태 감독은 뿌듯함을 숨길 수 없었다.
“너무 좋아! 바로 다시 가자고!”
사극은 기본적으로 여배우에게 그리 친절한 장르가 아니다.
특정 인물을 제외하고는 주류 배우가 남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 거기다 촬영 현장역시 다수가 남자 배우다.
젊은 여자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 사극의 경우, 신인 여배우라면 기가 죽을 수도 있는 무대다.
기라성 같은 선생님들이 즐비한 곳.
그렇기에 이태리를 캐스팅 한 것이다.
이유는, 싹싹해 보였고. 어른들에게 불편하지 않고 서글서글하게 다가갔으며. 또 연기에 있어서도 도전하려는 욕구가 용감해 보였기 때문.
“감독님이 제대로 보셨는데요?”
임창태 사단의 일원인 오디오 감독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칭찬하는 대상은 이태리.
이태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혜경궁 홍씨’를 연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잔인할 정도로 매정한 인물.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 이유를 명확하게 캐치하여 호감과 비호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탄다.
“그렇지. 제대로 봤지.”
하지만 임창태 감독이 만족한 부분은 이태리가 아니라 그 맞은편에 앉아있는 도재희였다.
‘… 도와주고 있어.’
도재희.
도재희는 대사를 완벽하게 숙지한 상태로 캐릭터를 ‘요리’하며 이태리의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도록 ‘조절’ 해주고 있다.
동궁 침전.
이태리, 아니 혜경궁 홍씨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의복을 정제하고 가서 전하를 뵈십시오.”
자식 된 도리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았으니, 어서 옷을 차려입고 인사를 올리라는 부인의 말.
하지만 이선은 넋이라도 나간 광인(狂人)마냥 허공을 주시하며 말했다.
“마음 둘 곳이 없어 외로웠고, 내 항상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웠네. 또한, 자네의 품 역시.”
홍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을 어찌 남에게 넘기시옵니까.”
“그래, 내 자초한 일이지. 궁색한 모습을 감추지 않았고, 편히 살고자 속에 치미는 대로 살았네. 그렇기에 떳떳했지. 이게 내 모습이야. 자네가 외면했던 내 본 모습. 어떤가? 이래도 나를 짐승이라 할 텐가?”
“…..”
“대답하기도 싫은 모양이군. 세손을 데려오게. 내 할 말이 있으니.”
한 치 앞도 물러서지 않는 대화.
어떻게 저 모습을, 데뷔 2년차 배우라고 할 수 있겠는가.
베테랑이 따로 없다.
이태리의 리액션이 넘치려하면 대사로 눌러주고. 감정이 부족하면 어미를 강하게 쳐내며 억지로 리액션을 끌어낸다.
이태리에게 부족한 캐릭터 이해도를, 멱살을 잡고 도와주는 것이다.
본래 연기란, 한 쪽이 너무 뛰어나도 그림이 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이 아주 딱 좋은 상태.
“세손은 지금 감기 기운이 있어….”
“자식을 아비에게 보여주기도 싫다는 말인가? 그래. 그럼 대신 전해주게. 아비의 선택은, 스스로 꼭두각시가 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동궁 세트 내에서는 사도세자가 담담하게 뿜어내는 무게감만으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였다.
– 오케이!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이태리는 큰 숨을 골라내며 심장에 손을 얹었다.
이태리 자신도 알고 있었다.
방금도 NG를 낼 뻔 했다는 사실을.
홍씨라는 인물은, 가벼이 연기할 수 없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물이다. 방금 씬도 NG가 나와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도재희가 한 움큼 떠먹여 주었다.
그런 이태리에게 유경성이 다가왔다.
유경성도 척 보고 눈치 챘다.
순간, 혜경궁 홍씨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태리의 동공이 흔들렸다는 것을.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도재희가 정신 차리라고 채찍질 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NG가 나왔을 것이다.
“끌끌, 힘들지?”
힘들지? 라는 질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태리가 고개를 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그러자 유경성이 말했다.
“아니, 버거울걸? 그러니까 넘어서려고 하지 말고. 잘 이용해봐. 굳이 부술 필요 있나? 부드럽게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지. 지금처럼.”
그 말에 이태리는 아차 싶었다.
‘… 알고 계셨구나.’
힘들지? 라는 말은 도재희를 말한 것이었다.
그 때, 곁을 지나던 홍봉한 강삼재 같은 배우들도 다가왔다.
이들이 이태리에게 말했다.
“이건 유경성씨 말이 맞지. 구렁이 담 넘듯 술술 이용해보라고.”
“그래. 받아들여서 흡수하는 것도 실력이야. 잘 하고 있어. 잘 하고 있는 애 너무 기죽이지 말자고. 껄껄.”
후배들의 연기라는 매개체로 유경성과 다른 배우들 의견이 처음으로 일치한 순간이었다.
냉랭한 촬영장 분위기에 녹색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좋은 징조지만, 이태리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어쩌다 각오하라고 큰 소리 쳤을까. 열흘간의 촬영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에 취해서 그랬던 것 같다.
이태리는 여유로운 얼굴로 임창태 감독님 옆에서 웃고 있는 도재희를 바라보았다.
‘넘지 못하면, 이용하라고…’
주먹을 꽉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정신을 추스르고 다음 장면을 준비해야했다.
*
영화 촬영 일정 때문에 로테르담 영화제가 열리는 네덜란드로 날아가지는 못했지만. 그 덕분에 어느새 영화는, 막바지 촬영까지 이어졌다.
제목이 사도세자에서, [이선>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던 것처럼.
나는 ‘세자’가 아닌,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들’의 감정 선에 집중하여 연기했다.
사극은 ‘곡선’이다.
직선처럼 방방 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중점을 두고, 배우들 간의 조화를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선의 캐릭터는 쉽게 다가가려고 하면 품고 있는 그 방대한 에너지 때문에 확 튀게 된다.
잘 정제하여야 기품 있는 칼이 되듯.
조심스럽게 연기해야했다.
어떤 남자배우가 보더라도 탐낼 만큼 매력적인 역할.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탐하듯, 연기할 건덕지가 많은 배역.
“아무것도 없구나. 네 놈을 죽여도, 이 울화통은 가시길 않는구나.”
광소와 비소가 적절하게 섞여있고.
가슴 한 구석에 있는 공허함과 막막함. 속 시원하게 털어놓을 곳 하나 없는 공포가 배역 자체를 지배하고 있다.
솨아아아아!
동궁전 뒤 뜰.
강우기에서 뿜어내는 억수 같은 비를 맞으며 괴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절그렁!
손에서 떨어진 검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고, 뜰 바닥에는 영조의 내관인 강삼재가 죽어있다.
“… 쥐새끼 같은 놈”
머릿속에서는 천둥과 벼락이 울린다. 나는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 보고 있는 지미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하늘, 비.
세상을 씻어 내릴 기세로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내 얼굴과 옷을 적시지만.
이 허한 마음 달랠 길이 없다.
빗소리를 뚫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둥! 두두둥 둥! 두두둥! 두둥!
징- 지잉- 징- 지잉!
쇳소리가 선두 역할을 하고, 정박에 두드려지는 징 소리에 맞춰 봇물 터지듯- 창이 터져 나왔다.
“죽은- 세자- 아아-! 이기 보단”
쿵! 쿵, 쿵!
덩! 덩, 덕!
“살아- 생전-! 빈껍데기로오- 살았으니-!”
굿 장단이 점점 빨라진다.
“한- 순간 도오-! 산 백성으로. 자식으로- 오오-”
무빙 카메라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굿 장단 속도에 맞춰, 빠르게 도는 카메라.
나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들어 발작적으로 위로 튀어 오르고. 내 머릿속을 두드리는 뇌성보화 천존에게 발악하듯 소리쳤다.
“죽기밖에– 더 하랴아아아-!”
단 한순간도 살아있는 인간 ‘이선’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통렬한 외침.
소리로 한(恨)을 뿜어내자, 안광이 희번득 거린다.
통렬하게 외치고 있다.
거기- 듣는 이 아무도 없소?
나는 꼭두각시가 아니오.
“나는 그리 살기 싫소.”
하지만 이 간절한 외침은 끝끝내 닿지 못했다.
역사가 기록한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
러닝타임의 절정에 치달은 영화는, 돌고 돌아 오프닝 타이틀 첫 장면으로 돌아왔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 낮의 정전 앞.
무릎을 꿇고 있는 이선.
그 앞에서 아들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영조.
“죽으라.”
검과 함께 자결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하지만, 어찌 죽을 수 있겠는가.
해가 저물 때 까지 이어진 실랑이의 끝은.
“뒤주를 대령하라!”
궁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뒤주. 그리고 그 안에 구겨지듯, 빨려 들어가며.
“사, 살려주십시오!”
발악하는 나.
“으아아아아앙!”
세손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만, 그 보다 혜경궁 홍씨의 시리도록 차가운 눈빛이 가슴에 비수로 날아와 꽂힌다.
왜, 아무 말이 없소?
“죽으라. 네가 죽어야, 이 나라가 산다.”
아, 내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이리도 많구나.
아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지만, 그 보다 더욱 두려운 소리는.
시체가 누워있는 관에 정을 내리치듯, 내 머리 위 뒤주에 망치질을 하는 소리.
쾅! 쾅! 쾅!
두렵다.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시체인가.
이미 죽어버린 껍데기인가?
팔 하나도 제대로 펼 수조차 없는 이곳에 갇혀 계속해서 뒤주를 두드렸다.
“아, 아버지.”
쾅쾅쾅쾅쾅!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더욱 강해지는 망치질 소리.
울음이 터져 나온다.
“사, 살려… 주십시오…”
그 울음 끝에서 또 한 번 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슬픈 노랫소리는 이내 울음으로 변질되었고. 궁 전체를 울렸다.
곡소리만 가득했던 이선의 마지막 팔 일.
여덟 시간도 아니고.
이선은 팔일 동안 뒤주에 갇혀 있었다.
그 원통함을 내 어찌 이해할 수 있겠냐 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이라도.
그래.
조금이라도.
*
도재희의 소리에는 마음을 찌르는 알맹이가 있었다.
수준급은 아니지만, 여긴 판소리 경연장이 아니지 않은가.
설움이 담겨있다.
한(恨)이 담겨 있는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눈물을 빼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임창태 감독은 귀신에라도 씌인 듯 무시무시한 연기를 펼치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 마지막이구나.’
마지막 은퇴작.
필름영화부터의 시작부터 함께했던 임창태의 영화 인생은 어느새, 필름시대의 종말을 지나 멀티 디지털 시대의 중심에 서있다.
파란만장했던 한국 영화의 산 증인.
그가 마지막에 선택한 대본과 배우.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쾌감을 느꼈지만 어딘지 모르게 가슴 한 구석이 무거웠다.
‘이제 끝이구나.’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살아있다는 생동감을 더는 느낄 수 없다.
더는 이 뜨거움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볼 수 없다.
그게 가장 아쉽다.
은퇴를 번복해서라도 한 작품을 더 찍고 싶지만, 또 막상 돌이켜보자면.
이 영화에 쏟아 부은 것만큼 더 찍을 수 있을까.
노력에 대해서는 그 어떤 후회도 없으니까.
임창태 감독 자신만의 장기인 ‘영상미’와 ‘깊이’도 담겼고, 지난 수십 년의 영화 인생에서 익힌 모든 노하우가 총망라 되어있다.
하지만 왜 마음이 무거운 것일까.
어쩌면 지금 저 믿을 수 없는 주연배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모니터를 뚫고 나올 것 같은 독한 눈빛의 이선은, 고작 다음 씬에서는 시들시들 평상 위에 널브러진 시레기 마냥 푹 절어버렸다.
그의 눈에선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정말 며칠 동안 뒤주에 쳐박혀 있던 사람 같이 느껴졌다.
‘다시는 볼 수 없겠지.’
다음에도 또 보고 싶은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십 년 전, [봄에 마실 물>을 통해 유경성을 데뷔시켰을 때 느꼈던 그 희열보다 더 큰 희열.
저 배우와는 꼭, 다시 작품을 하고 싶다는 욕심.
예술가로서의 그 ‘욕심’이 거장의 마지막 작품에 대해 미련을 낳고 있다.
하지만 결국에 임창태 감독은 메가폰을 꽉 움켜쥐고 외칠 수 있었다.
“크랭크업! (촬영종료)”
“수고하셨습니다!”
부안 영상테마파크 전체가 떠나갈 듯 울려 퍼져 나왔다.
그리고 임창태 감독은 한쪽 눈물 한 방울을 훔쳐내며 뒤주 속에서 걸어 나오는 자신의 주연 배우를 바라보았다.
“….”
자신이 독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꺼내서 다듬어낼 원석.
아니, 이미 빛나는 보석인가.
욕심 부리지 말자.
저 배우는, 후배들의 유산이다.
“껄걸, 오늘은 진탕 마실 테니 말리지 말어.”
그리고 자신의 곁을 십수 년간 지켜온 조연출을 향해 웃어보였다.
아들 같은 남자다.
조연출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독님.”
오늘 만큼은, 마셔도 좋겠지.
[ 책 먹는 배우님 – 66화. > 끝ⓒ 맛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