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69)
69.
“이유가 뭐야?”
재익이 형이 물었다.
[신데렐라 신드롬>을 선택 하지 않은 이유야 확실히 말할 수 있다.“사람들 관심이 살벌한 만큼, 현장 분위기도 살벌하겠죠.”
주위의 기대치가 높은 만큼,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을 확률이 높다.
사전 제작을 선택하는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또 이미 높을 대로 높아진 ‘파워 작가’의 권위와 문병철 감독보다 훨씬 심각한 트러블 메이커라는 소문이 자자한 감독.
이 둘 사이에 작업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고.
“근데 안 아쉽겠어? 시청률 15%는 먹고 들어 갈 텐데.”
“네. 별로.”
물론, 이는 회사에 말한 보여 지는 이유일 뿐이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본 능력에 근거한다.
[신데렐라 신드롬>.거품이 너무 많이 껴있다. 작가가 특급 흥행작가라는 점과, 사전 제작이라는 ‘편안함’이 주는 환경이 배우가 몰리게 되는 ‘과열’ 현상으로 까지 이어졌다.
이름값만 믿고 16부 완고 대본을 모두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을 확률도 높다.
또한 ‘기대치가 너무 높다.’
생각보다 성적이 높지 않을 지도 모른다.
내가 진단한 바는 그렇다.
나는 대신, TV-K의 [시간의 띠>에 주목했다.
“근데, 괜찮겠어?”
“뭐가요?”
“장르. 미스터리 스릴러잖아. 이제껏 드라마에서 100억 이상 들였던 액션 드라마나, 전쟁 드라마도 로맨스 없이는 죄다 물 먹었다고. 남자들은 드라마를 잘 안보거든.”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엄청난 몰입감.
한 번 보면, 절대 다음 화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몰입감일 것이다.
그만큼 완성도가 있는 작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 안해요.”
이유는 잘 모르겠다.
마치 ‘영화’ 같은 이야기에 나 조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끌려버렸다.
흥행 여부는, 우선 둘째 문제로 두자면 흥미로운 소재, 실력 있는 작가, 거기에 배우까지.
삼박자가 모두 맞아 떨어진다.
[신데렐라 신드롬>에 뒤지지 않는 빵빵한 자금력으로 내게 강력하게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다는 점도 좋고.“도재희 배우님 생각하면서 쓴 글이라, 다른 사람은 안 됩니다!”
정이연 작가 특유의 확고한 어필도 마음에 들었다.
단 한 가지 극복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면.
케이블이라는 점.
하지만 재익이 형이 딱 잘라 말했다.
“케이블인게 걱정이면,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요즘 케이블은 흠도 아니니까.”
확실히 케이블 채널에 대한 인지도는 매 해 상승하는 추세.
개런티는 오히려 지상파 방송사보다 좋은 편이고, 장면 연출에 있어서도 제약이 덜하다.
하지만 예능이 아닌, ‘드라마’는 여전히 지상파의 벽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케이블에서 5%만 넘어도 대박. 10%는 신기록이라는 말은 괜히 나오는 말이 아니니까.
내가 드라마에 만족하는 의사를 내비치자, 재익이 형도 결심한 듯 말했다.
“케이블에서 신기록을 찍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지상파를 넘어선 케이블! 그 중심에 있는 도재희, 좋은데?”
“…. 일단, 미팅 한번 해볼까요?”
*
TV-K 사옥이 있는 곳은 판교.
경기도지만, 어지간한 서울보다 가까운 판교. 나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하여 카페에서 커피 여섯 잔을 사들고 작가사무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섰다.
그 때, 우연히 정이연 작가와 마주쳤다.
“작가님?”
흰색 와이셔츠에 베이지색 자켓 마이. 딱 달라붙은 블랙 스키니 진에, 머리도 제법 길었다.
“…. 도 배우님?”
정이연 작가는 나를 한 눈에 알아보고는 놀랐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일찍 오셨네요?”
“네.”
그리고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우리에게 걸어왔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과 부딪히는 단화 소리가 그녀의 심리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기색도 한 몫 한다.
내가 물었다.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자 정이연 작가는 얼굴색을 황급히 바꾸며 말했다.
“아, 아뇨. 그게… 여기서 마주칠 줄 알았으면 청심환이라도 먹고 올 걸 그랬네요.”
청심환?
“왜요?”
“속이 조금 울렁거려서.”
“… 제가 불편하신가요?”
“아, 그런 것은 아닌데 작년과는… 상황이 여러모로 다르니까요.”
이제는 같은 작품에서 으쌰으쌰 하던 관계가 아니다.
어느새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작가와.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배우.
둘 사이의 간극은, 지난 반 년 사이에 더 벌어져 있었다.
“그나저나 미팅에 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아,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단지, 자리가 사람을 바꾸었을 뿐. 사적인 대화 보다는, 공적인 대화가 주를 이루었을 뿐이다.
함께 들어선 사무실에는 감독님과 제작PD, 보조 작가들이 앉아있었다.
가운데 앉아있는 남자가 바로, 박상인 감독.
SBC에서 입봉을 했지만, 고액의 개런티로 스카웃 제의를 받아 TV-K로 넘어 온 실력 있는 40대 감독.
그가 내게 악수를 청했다.
“하! 여기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
대화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이 자리는 [시간의 띠>에 나를 캐스팅하기 위한 설득의 자리.
이들은 자신들이 케이블이라는 점이 시청률에 발목 잡을 수 있음을 인정했지만, 오히려 케이블이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어필했다.
“저희는 장르나, 연출 기법 등에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지상파보다 규정이 약해요.”
그 결과가 바로 [시간의 띠>다.
“화성 연쇄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했던 영화나 연극, 드라마는 이미 많죠. 하지만 저희는 여기에 ‘꿈’이라는 매개체를 접목했습니다.”
꿈을 이용해 과거를 오가며, 주인공이 행동한 범위로 현실이 바뀐다.
덩달아 과거도 함께 바뀐다.
“이 과정을 통해 과거의 잘못된 범죄를 바꾸는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좋았지만 현실의 많은 것들이 바뀌는 것을 깨닫게 되죠. 자신이 꿈을 손대면 손댈수록, 겉잡을 수없이 이 사회가 바뀌어 갑니다.”
흥미롭다.
확실히 케이블만이 할 수 있는 드라마로서의 ‘도전’인 셈이다.
어쩌면, 3/4분기 미니시리즈는 방송 삼사의 전쟁이 아니라.
SBC [신데렐라 신드롬>과 TV-K의 [시간의 띠>가 정면으로 맞붙는 싸움이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클리셰를 제대로 사용한 대중적인 음식이냐, 아니면 쉐프가 처음 공개한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신 메뉴냐.
물론 장르적인 가치에서만.
시청률은 확실히 지상파가 우세하겠지.
제법 호기심이 동했다.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드라마가 곧바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편성은 어떻게 됩니까?”
재익이 형의 질문에 박상인 감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섭외 현황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 역시 확정된 바가 없습니다.”
재익이 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말씀은, 저희가 처음입니까?”
“네.”
“…..”
재익이 형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
“왜요?”
“음, 우선 국장님의 기대가 상당합니다. 정이연 작가가 대본을 워낙 잘 뽑아주었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캐스팅에 공을 들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무나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희가 접촉하고자 했던 배우들은 모두 저희 드라마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죠.”
케이블드라마에, 드라마에서 마이너 한 장르까지.
특히 로맨스가 배제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나 역시, ‘정이연’이라는 이름과 ‘완성도’를 보지 않았다면 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을 테니까.
“거기다 SBC에 박혜숙 작가가 복귀하지 않았습니까. 이름 있는 배우들은 죄다 거기로 눈길이 가 있는 상태죠. 저희 완전 찬밥 신세입니다.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배우가 없어서 슛을 못 들어가는 겁니다.”
상황이 정리가 된다.
눈은 높아서 S급 배우들을 캐스팅 하고 싶지만, 캐스팅이 쉽지가 않다.
편성 예정 날짜를 받지 못하는 것도, 촬영이 늦어져 어쩌면 뒤로 밀려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일 것.
“SBC [신데렐라 신드롬>과 정면으로 붙어서 승산이 없다는 판단이 들면, 방송 일정 자체가 뒤로 밀려날지도 모릅니다.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박상인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제가 설득을 해야 하는데,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오히려 이렇게 부정적인 말씀만 드리게 되네요. 답답합니다.”
그러면서 눈치를 본다.
그 때, 정이연 작가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저희에게 꼭 도 배우님이 필요한 겁니다!”
이 낭낭한 외침에 나와 재익이 형, 박상인 감독까지 벙찐 얼굴로 정이연 작가를 바라보았다.
“….”
“… 정 작.”
하지만 정이연 작가는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도 배우님이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는 순간! 모든 상황은 바뀔 겁니다. 관심 없던 배우들도 관심을 가지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감독님?”
“어? 어, 어, 그렇지.”
박상인 감독이 고개를 폭풍처럼 고개를 끄덕였고, 정이연 작가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저희에게 도 배우님이 꼭 필요합니다!”
“….”
아무래도, 청심환을 먹고 온 것 같지?
*
미팅이 끝나고 차량 안에서 우리끼리 투표가 시작되었다.
재미있겠다는 의견 2.
재미없겠다는 의견 1.
근데 의외로, 재미없겠다는 의견은 재익이 형이었다.
“내가 말한대로 케이블인 점은 문제가 아니야. 근데, 그 어떤 유명 배우도 선택하지 않은 작품이라는 게 걸려. 실패할 게 뻔한 작품이라고 다들 생각하는 거잖아. 이유가 있을 거라고.”
실패할 작품에 굳이 열과 성을 쏟아 3-4개월을 날리며 커리어에 오점을 남기느니 보다 확실한 작품을 선택해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가자는 재익이 형의 말.
그래. 어쨌든 맞는 말이다.
재익이 형은 철저하게 ‘L&K’ 입장에서 배우 도재희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니까.
그 때, 대중적인 여성들과 취향이 완벽히 다른 영미 씨가 반박하며 [시간의 띠>에 한 표를 던졌다.
“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저라면 볼 듯.”
그러자 재익이 형이 이 때다 싶어 물고 늘어졌다.
“봐 봐! 영미 씨가 재밌을 것 같다고 했지? 분명 들었지? 그럼 망해. 확실하다고.”
“…. 뭐라는 거야. 실장님. 제 눈이 어때서요.”
“영미 씨 취향은 완전 매니악 하다고. 밤마다 B급 좀비 나오는 오컬트 영화 보면서. 요즘 여자들이 누가 그런 거 봐?”
“뭐라고요!”
“…..”
나 역시 이 상황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은 인정한다.
모두가 하고 싶어 안달 난 작품을 내가 외면했고.
모두가 외면한 작품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이 아이러니.
하지만, 이와 비슷한 상황은 이미 겪은 적이 있지 않은가.
[피셔>는 418만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긴 했지만, 손익분기점을 2만명 차이로 넘기지 못했고. [양치기 청년>은 선댄스, 로테르담을 돌고 돌아 전주와 극장가에 자리 잡기 직전이다.아이러니.
세상일은 눈에 보이는 대로 돌아가지 않고, 항상 의외의 반전을 낳는다는 이 아이러니.
“그래도, 재희 네가 하고 싶다면 하는 거지 뭐.”
그래.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한다.
*
이틀 후, 판교의 TV-K [시간의 띠> 사무실에 놀라운 소식 하나가 날아들었다.
“… 하, 하겠다는데요?”
“응? 누가? 재희 씨가?”
“네, 네!”
“됐어!”
[신데렐라 신드롬> 사무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하지만 공통된 의견은 역시, 종이 뭉치가 잔뜩 날아들었다는 사실이다.
허공을 나르는 종이에 적혀있는 것은, 눈을 낮춰 현실적으로 섭외가 가능한 배우들의 이름들.
박상인 연출이 보기만 해도 화가 치민다는 듯 말했다.
“이거 전부 세절시켜버려!”
“네!”
그리고 박상인 감독은 곧 바로 정이연 작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 섭외 성공!
다음 행보는 거침없었다.
“제작 PD님은 L&K 홍보팀 연락해서 보도자료 어떻게 낼 건지 상의 해주시고! 민식아! 섭외 명단 전부 가져와!”
내부 조연출과 캐스팅 디렉터가 다시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섭외 명단에는 최소 ‘유아름’ 이상 급의 스타 명단들이 대거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모두 섭외에 실패한 배우들.
하지만, 도재희가 주연이라는 사실이 이들에게 들어간다면?
“좋아, 해보자고.”
상황은 바뀔지도 모른다.
박상인 연출은 형광펜으로 거침없이 배우 이름 위에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도, 여기도, 여기도! 싹 다 연락 새로 돌리자고요! 미팅 새로 잡자고!”
모처럼 사무실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도재희가 출연한다는 사실 만으로, 캐스팅에 연달아 실패를 거듭하던 지난날과는 아예 다른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편견을 깬 반전!
반격의 시작!
박상인 감독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책 먹는 배우님 – 6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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