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
7.
상암동 인근 중국집에 모였다.
박찬익 팀장을 필두로 L&K 배우인 송문교와 내가 중국집에 들어섰고, 그 뒤로 여주와 서브 남주를 맡은 소윤과 김균오가 들어왔다.
스텝으로는 제작사 파랑새미디어의 제작총괄 PD와, 제작PD, 라인 PD. 캐스팅 디렉터. 거기에 문병철 감독님과 휘하 연출부들까지.
촬영, 조명 감독님들을 제외하고, [청춘열차>의 헤드급은 전원 모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늘 모임의 목적은 한 가지다.
“수정 된 대본들은, 전부 읽어봤죠?”
작가님과 감독님이 몇날 며칠을 합숙하다시피 하며 고쳐온 대본을 두고, 감독님이 마지막 안타를 날리는 자리.
문병철 감독님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땠어요?”
대본이 바뀌었다.
남주와 여주 주변 인물들이 죄다 가지치기 당했다.
쓸데없이 많던 고정단역들은 모두 사라지고, 여주의 친구 역할과 남주의 친구 역할인 ‘김도훈’ 역할이 크고 광범위해졌다.
스토리 일각에서 세컨드 러브라인만 담당하던 내 배역이, 어느새 여주와 남주 사이를 잇는 오작교 역할까지 병행한다.
사이즈가 커진 상황.
“좋던데요? 훨씬 매끄럽게 술술 읽혔습니다.”
“그래요?”
박찬익 팀장은 프로였다. 확실히, 문병철 감독이 원하는 대답만을 골라서 말했다.
“네. 인물 관계는 확실히 축소되었지만, 대신 배우 Top5 체제로 훨씬 스토리가 더 탄탄해진 느낌입니다.”
사실 이는, 박찬익 팀장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원톱’ 송문교 캐릭터도 건재하고, 내 캐릭터는 더욱 살아났으니까.
물론, 당장에는 조슬혜라는 출혈이 있었지만, 회차가 진행됨에 따라 나중에 다른 역할로 다시 꽂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 역시 박 팀장님이 대본 보는 눈이 있어요. 어쨌거나 잘 나왔다니 다행이네요. 요 며칠간 대본 바꾸느라, 작가님이랑 아주 골머리를 썩었다고.”
문병철 감독님은 흡족하게 웃으며 내 쪽으로 힐끔 눈을 돌리셨다.
“좋아요, 좋아.”
그리고 아주 믿음직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시더니, 이내 다시 대화에 열중하기 시작하셨다.
“문교 씨 아버지 역할은 최태혁 선생님으로 낙점되었고… 소윤 양 엄마 역할은, 오미란 배우시죠? L&K에.”
“네. 오미란 선배님과 진행 중에 있습니다.”
조연들의 캐스팅 진행상황. 그 외에도 세트장 위치며, 로케이션 진행 상황과 첫 리딩 날짜며, 회식에 대한 전반적인 대화들이 오갔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의 대화에 내가 낄 틈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얌전히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진 중식 코스요리를 음미하며 사람들의 안색을 살폈다.
송문교 무덤덤하게 음식 먹는 것에만 열중했고, 아이돌 출신이라는 소윤은 연신 밝게 미소를 지으며.
“우와, 그럼 파주에 세트장이 지어지고 있는 건가요? 으흥, 기대된다.”
감독님의 옆자리에 찰싹 달라붙어서, 리액션을 담당했다.
홍일점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소윤이 촬영장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할 확률이 높아보였다.
“저는 김균오라고 합니다.”
과거엔 잘나가는 일진이자, 세상 다 가진 캐릭터 ‘김강혁’을 연기하게 될 모델 김균오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나와 송문교를 향해 인사했다.
“….”
하지만 송문교는 그런 김균오를 지나가듯 보더니,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말했다.
“아, 네.”
… 건방짐이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김균오는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최대한 밝게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저는 도재희 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예명이신가요?”
“아뇨. 본명입니다.”
“아아, 저도 본명이거든요. 하하.”
김균오.
모델 출신 배우들이 강세를 보이는 요즘, 10대들의 라이징 스타라는 별명답게, ‘요즘 여자’들이 정말 좋아하게 생겼다.
나나, 송문교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닌데, 우리보다 머리 반쯤 더 커 보이는 훤칠한 키부터,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하게 들어있는 눈, 코, 입 모두 뚜렷하다.
왜, 사진 찍을 때 옆에 서기 꺼려지는 그런 얼굴이랄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 저는 스물여덟 입니다.”
“저 보다 형이시네요. 전 다섯이거든요. 군대 다녀오셨죠?”
“아, 네.”
“크으. 아직 저는 미필이거든요.”
하지만 의외로 친화력은 좋아보였다.
“그래도 현역 욕심은 있어요. 모델 형들이 제가 군대 가면 저더러 고문관일거라며 엄청 고생할거라고 공익으로 빠지라는데, 사실 남자로 태어났으면 기왕 가는 군대, 고문관 같은 걸로 좀 빡세게 다녀오면 이미지에도 좋잖아요.”
“…. 예?”
차가워보이던 첫인상과 전혀 다른 백치미까지 함께 선보이며 철저하게 친화력을 높여 주신다.
어이, 세상 다 가진 얼굴로 그러지 마.
그러니까 고문관 소리를 듣는 거야.
그에 반해 소윤은.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저는 그룹 ‘애프터 픽시’의 소윤 입니다!”
어렸을 적, 첫사랑을 닮은 풋풋한 외모다.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웃을 때 마다 눈이 반달 모양이 되는 귀여운 강아지 상에 활달한 성격을 가진 아이.
하지만 가끔은.
“아이, 선배님 뭐에요!”
걸걸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받아 칠 줄도 아는 당찬 면모도 있어보였다.
작중 캐릭터가, ‘남사친, 여사친’이기 때문에 귀여우면서도 걸걸한 매력을 보여야 하는데, 이미지에 제법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박청아’ 라는 요즘 유망한 신인 여배우가 소윤 친구이자, 내 여자 친구 역할로 캐스팅 되면서 [청춘열차>의 Top5가 완성되었다.
박청아는 감독님 대화, 배우들 대화를 기웃거리며 연신 방긋방긋 웃기만 한다.
웃는 모습이, 꽤나 예쁘게 생겼다.
“근데요. 선배님이 ‘김도훈’ 역할 맞으시죠?”
그 때 소윤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맞아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윤과 김균오는 구면인지 서로 마주보며 ‘맞네.’ ‘역시’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응? 뭐? 왜 네들끼리 얘기하는 건데.
“… 왜요?”
내 물음에 소윤은 진지한 얼굴로 숟가락을 흔들며 소리 질렀다.
“대본이 바뀐다! 이유 인 즉슨! 연기의 신이 강림하셨다!”
“….”
“…. ?”
“헤에?”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일동 소윤에게 쏠리자, 자기도 무안했는지 숟가락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놓으며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 라고, 저희 매니저 오빠가 말했거든요. ‘김도훈’ 역할이 연기 잘하기로 소문났다고. 헤헤, 대본 통째로 달달 외우시고 오디션 보셨다면서요?”
소문이 났어?
고작 오디션 하나로 다른 회사까지 소문이 돌 정도면, 캐스팅 디렉터님이 나를 그 만큼 인상 깊게 봤다는 건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윤 쟤도 제정신이 아니구나.
“외우긴 했는데…”
“어맛! 대단하셔라.”
아이돌 쪽 보다 예능으로 먼저 떴다더니, 확실히 가지고 있는 분위기 자체가 조금 방방 뛴다.
차분한 역할은 못하겠는데.
“선배님! 진짜 대단하세요! 열정 짱!”
소윤이 엄지를 치켜들며 푼수 같이 웃어버린다. 귀엽긴 하다만… 역시, 제정신은 아니군.
그 때, 송문교가 돌연 인상을 구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나가버렸다.
“야, 문교야. 어디가?”
박찬익 팀장이 황급히 만류하려 했지만, 송문교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화장실.”
이라고 중얼거리더니 밖으로 휭 나가버렸다.
저런 예의 없는 자식.
마치, 대화의 중심이 내가 되는 것이 못마땅한 모양인데 그런 송문교를 바라보는 문병철 감독님의 표정도 그리 곱지만은 않다.
“그, 급했나본데요?”
박찬익 팀장도 어색하게 감싸며 표정을 구겼다.
일단은 주연 배우니까 잘 달래가면서 해야 할 텐데.
흐음, 어찌되려나.
*
송문교는 첫 리딩이 있는 오늘에서야 조금 다급한 표정이었다.
SBC 3층 대본리딩실에 도착한 송문교는 자신의 자리 위에 놓여있는 ‘송문교 배우님’ 이라 정성껏 프린팅 된 새 대본을 받아들고, 그제야 황급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로맨스 연기가 다 거기서 거기지.’ 라고 거들먹거리며,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흐음.”
가장 상석인 감독님과 송문교 자리로부터 세 자리 정도 떨어진 내 자리에도 역시, 물과 음료수와 함께 대본이 놓여져 있었다.
‘도재희 배우님.’
이름이 프린팅 되어 가지런히 쌓여있는 1회에서 4회짜리 코팅대본이다.
대본 읽기에 바쁜 송문교에 반해, 나는 한번 쓱 만져보는 것이면 충분했다.
[이미 흡수한 대본입니다.]이미 흡수했다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흘러나왔다.
회사에 뒹굴고 있는 쪽대본을 통해 죄다 흡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건 기념품이군.’
나는 예쁘게 이름이 찍힌 코팅 대본을 펼치지도 않고, 가지런히 손을 모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배역들의 대사가 굴러다니고 있다. 대본을 볼 필요도 없다.
잠자코 기다리자, TV에서나 보던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이 리딩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최태혁, 오미란 등등.
[청춘 열차> 스토리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맡아주실 선생님들이다.나는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가장 당당하고 밝은 모습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신인 배우 도재희 입니다.”
이들이, 다 내 편이 되어 줄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뒤로, 작가님을 포함하여 문병철 감독님이 들어왔다.
“다들 왔나요?”
리딩이 시작되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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