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1)
71.
나이만 먹는 인간이 되지는 말자.
언젠가 다짐했던 말.
살아가면서 슬프고, 아프고, 시리고, 따뜻한 크고 작은 순간들을 모두 가슴 속에 품은 채. 배우로서 이를 기억하고 다짐하자며 되새긴, 나 자신과의 약속.
그렇게 순간순간들을 충실하게 보내고 나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나이 벌써 서른.
작년과 무엇이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딱히.”
[양치기 청년>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큰 호평을 받았고, 나는 백상예술대상에서 [피셔>를 통해 ‘남자 조연 연기상’을 수상했다.2019년도 어느새 절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시간의 띠> 촬영 역시, 절반 넘게 진행되었다.
여전히 내 일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이렇게 외부적으로는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자면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는 그다지 달라진 점을 찾기가 힘들다.
여전히 성공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20대에 마구잡이로 들이받던 것처럼 혈기왕성하다.
30.5세의 도재희.
서른이 되면 뭐라도 조금 변할 줄 알았는데, 왜 그대로일까.
왜 이렇게 속이 갑갑할까.
내 나름대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환경이 그대로잖아.’
호박이 호박 밭에서 줄긋고는 ‘나 수박이야!’ 라고 말해봐야 소용없듯.
결국 ‘나’라는 인간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 [이선>에서 홍봉한 강삼재 선배들이 그랬듯.
나이를 먹으며, 겉으로는 젠틀함을 ‘드러낼’ 수는 있겠지만, 그들 역시 속에는 어린아이가 살고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인정하자.
어린 아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들.
이 ‘달아오름’이 나를 어린 도재희로 만들고 있다.
대결 구도가 잡히기 시작했다.
“편성 날짜가 확정되었어요. SBC 쪽은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는 기자 말로는 9월 첫째 주 월요일로 잡힐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9월 6일 금요일.”
“그럼, 같은 주에 맞붙는 건가요?”
“네. 변수가 없다면요.”
SBC[신데렐라 신드롬> VS TV-K [시간의 띠>
같은 주에 동시에 브라운관에 공개되는 두 사전 제작 드라마.
하지만, 언론들은 이 대결 구도를 가지고 시끌시끌하게 떠들지는 않았다.
“어차피 ‘박혜숙’ 아니겠어?”
기자들 다수가 SBC [신데렐라 신드롬>의 성공을 점쳤으니까.
오히려 [신데렐라 신드롬>과 맞붙는 KTN, MKC의 3/4분기 미니시리즈가 무엇이냐에 관심을 가졌다.
“뭐가 되었든, 박혜숙 작가 압승이지.”
로맨스 없는 케이블 드라마. ‘도재희’가 있으니 눈여겨보긴 하겠지만, 글쎄.
딱, 언더 독(Under dog).
[시간의 띠>의 성공을 점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자연스럽게 언론의 관심에서 자유로웠다.그랬기에 지난 두 달간의 촬영은 겉으로는 조용한 듯 보였다.
하지만 ‘진짜’ 대결 구도는 이미,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신데렐라 신드롬>의 ‘박혜숙 작가’그녀가 계속해서 ‘싸움’을 부추겼다.
“도재희 걔, 내 작품 까고 간 곳이 고작 케이블이야? 어이가 없네. 정말.”
원래 이 바닥, 영원한 아군도 영원한 적군도 없다고 했다.
내게 꽃다발을 들고 함께 하자고 청혼하던 어제의 아군이, 잠시 등을 돌리자 뒤에서 칼을 들고 웃고 있다.
“그딴 드라마 같지도 않은 드라마에 밀려? 하, 자존심 상해서.”
내가 자기 작품을 거절하고 케이블 드라마와 계약한 것을 빌미로, 박혜숙 작가는 줄곧 내 이름을 언급하며 싸움을 붙였다.
“사람 잘못 봤지 뭐. 그딴 대본 쓰는 작가나, 선택하는 배우나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면박을 주고. 자신의 작품을 선택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
주변인들에게 물타기를 한다.
‘침몰하는 배’에 비유하며, 반드시 필패할 드라마라고 오명을 뒤집어 씌운다.
마치, ‘된 통 깨져봐라.’ 라는 식으로 내게 창피를 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지만.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안다. 일부러 내 귀에 들리도록 말했으니까.
소문을 접한 박상인 연출이 말했다.
“일전에 박혜숙 작가님 작품과도 접촉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미팅도 하지 않고 거절하셨다는 얘기도.”
“아, 네. 근데 그걸 어떻게…”
“아아, 저 SBC 출신이잖습니까. 그쪽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말년 조연출 때, 박 작가님 작품 같이 했었습니다. 그게 박혜숙 작가님 데뷔작이셨으니, 7년 정도.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셈이네요.”
“아…”
“박혜숙 작가님. 실력 있는 스타 작가 시죠. 그건 반박하지 못 할 겁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
“그만큼 무서운 분입니다. 작가로서의 권위가 대단하신 분이죠. 히트작 몇 개 쓰시더니, 연출도 배우도 모두 자신의 아래로 보시는 분이에요. 지금 이렇게 유치하게 구시는 이유요. 자기 작품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다.”
박상인 연출의 말이 맞다.
의도적으로 나를 비롯해서 [시간의 띠> 제작진의 성질을 긁어내고 있다.
재익이 형은 내게 조언했다.
“무시해. 저렇게 나올 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잖아? 박혜숙 작가, 원래 입이 거칠기로 유명하거든. 그래봐야 너한테 할 수 있는 일 없어. 자기들끼리 뒤에서 욕하는 게 전부지.”
교과서 같은 반응이다.
그래.
이렇게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말고는 박혜숙 작가가 내게 할 수 있는 짓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은 박혜숙 작가 쪽일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찾아가서 대판 따질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은 이렇게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다.
답답함.
“무조건 참아야 됩니까?”
“… 어?”
“제가 피해자가 되어야 해요?”
이런 ‘불편한 상황’들이, 어른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세상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너무 많고, 그 어린아이들을 이기는 방법들은 대부분 너무 유치하기 때문이다.
같이 유치해지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는 세계.
“참자. 더러워도 어쩌겠냐? 너만큼 힘든 사람이 감독님이고 작가님이야.”
정이연 작가도 참 척박한 환경에서 싸우고 있구나 싶다.
잘나가는 신인 밟아 죽이려는 놈들은 어디에나 있고, 시기와 질투가 따라붙지 않는 곳이 없다.
“어쨌든 ‘박혜숙 작가’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잖아.”
나쁘지 않지.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87년 운동권 학생들이 이럴까.
우리 팀은 보이지 않는 어떠한 ‘응집력’으로 뭉친 듯 했다.
힘들게 작품이 시작한 만큼, 반드시 퀄리티 있게 완성시키겠다는 집념. 절대지지 않겠다는 동기부여.
그런 것들이 여기저기 엿보인다.
“이럴 때, 시청률로 누르는 게 가장 훌륭한 복수 아니야? 네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지.”
재익이 형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100% 확신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 쉽지는 않겠지만.”
재익이 형은 여전히 이 드라마의 불확실함을 걱정하고 있다. 아니, 사실 이 불안함은 스탭들에게도 전반적으로 깔려있다.
성공할 수 있을까.
이 두려움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는 사람은 나와 박상인 연출, 정이연 작가 셋뿐이고.
“할 수 있어요.”
나는 다짐하듯 말했다.
“형 말대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줄게요.”
그 날은 의외로 멀리 있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간단했다.
*
여름.
[시간의 띠> 촬영이 막바지로 치닫는 여름의 초입.영화 [삭제> 가 개봉했다.
지난 해 겨울, 임강백이 주연을 맡았고 내가 특별출연으로 총 4회 촬영에 참여했던 작품.
캐릭터는 나름대로 임팩트 있었지만, 특별 출연에 개런티도 이미 받은 작품이라 사실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는 내 관심 밖이었다.
오히려 한 달도 남지 않은 영화 [이선>의 개봉을 기다리던 상황이었는데.
[삭제>의 이경우 연출은 내게 간곡히 부탁해왔다.– 도 배우님, 스케줄 괜찮으시면 하루만 무대 인사에 참여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예?”
– 첫날 기자 간담회만이라도 부탁드립니다. 다들 도 배우님 참석 여부를 궁금해 하고 있거든요.
“….”
특별출연 일 뿐인데.
왜, 굳이 무대 인사를 따라 가야하는 건가.
– 부탁드리겠습니다.
“….”
거절하려고 했지만, 막상 감독이 직접 부탁을 해오니 마음이 약해진다. 거기다.
‘도재희 특별출연? 이거 때문에 본다.’
‘닥 도재희. 믿고 보는 도재희.’
‘임강백VS도재희 연기 배틀? 기사 제목 왜 이따구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생각보다 ‘나’를 기다리는 팬들이 많은 것을 확인하고 나니, 궁금하기도 했다.
‘연기 배틀’
극장에 걸리는, 내 두 번째 영화의 반응이.
난 재익이 형에게 물었다.
“… 스케줄 조정 가능할까요?”
“음, 될 것 같아.”
“된다고 하네요?”
내가 참석 의사를 밝히자, 이 경우 연출이 살았다는 얼굴로 말했다.
–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
영화 [삭제>의 무대 인사가 잡혀있는, 영등포 OGV.
개봉은 어제 했고, 오늘부터 서울경기 일대의 영화관 몇 군데를 돌기 시작한다.
물론, 나는 오늘만.
오전에 영등포를 시작으로 오후 저녁에는 신사와 강남에서 마무리.
이 경우 연출을 만나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무대 앞에 서는 배우들은 임강백을 비롯한 주조연 배우들. 그리고 영화를 보러온 나를 ‘특별 손님’처럼 불러내는 형식으로 진행하기로 한 것.
“좋습니다.”
임강백에게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
하지만, 역시 인사를 받아주지는 않았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상영 10분 전 입니다! 입장하겠습니다!”
VIP룸에서 대기하다, 상영 10분 전이라는 이야기에 배우들과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다.
“와.”
빼곡하게 앉아있는 극장 객석이 일순간 흔들렸다.
“와, 배우들이지?”
“도재희도 왔어.”
하지만 그런 흔들거림은 광고에 금세 묻혔고, 주조연급 배우들은 앞좌석 네 줄에 차례대로 자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영화에서 특별히 친한 배우가 없었기에, 세 번째 줄 가장 구석자리에 적당히 자리를 잡았다.
그 때, 누군가 내게 인사를 건네 왔다.
“맞죠?”
“….”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라, 나오려던 말도 틀어 막히고 말았다.
그러자 나를 보며 이죽이죽 웃는 남자.
“… 맞네.”
박시현.
영화만 찍겠다고 선언했지만, 꿀 냄새에 이끌려 드라마를 선택한 남자.
SBC ‘박혜숙 작가’의 [신데렐라 신드롬>에 내 ‘대타’로 들어간 데뷔 10년차 배우.
“… 안녕하세요.”
내가 무표정하게 답하자 박시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거 의외네. 이 영화 나왔어요? 아니면, 지인으로?”
“….”
하지만 얼굴은 전혀 의외인 얼굴이 아니다.
마치, ‘일부러’ 나를 찾아온 것 같은 느낌.
“아아, 난 강백이 형이랑 작품 여러 개 같이 했거든. 지인으로 초대 받아서 왔어.”
묻지도 않은 정보를 너저분하게 늘어놓는 것 까지.
박시현은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같이 봐도 되죠? 나도 혼자 와서.”
임강백 지인이면 임강백 옆에 앉지, 왜 내 옆에 앉으려는 건데?
“…. 네.”
전세 낸 것도 아니고. 거절할 명분은 없는 것이 아쉽다.
나와 개인적인 접점은 없지만, 임강백과 친하고 내 ‘대타’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 아닐 확률이 높다.
“근데,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
박시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네.”
“[신데렐라 신드롬>. 재희 씨한테 먼저 들어갔다며. 이거, 왜 안했어?”
“….”
말을 놓았다, 말았다.
자기 마음대로네. 이 아저씨.
… 뒤질라고.
나는 대답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강백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호랑이굴에 제 발로 들어온 이 느낌.
“응? 내가 묻잖아.”
나는 피식, 웃으며 박시현을 바라보았다.
하, 이래서 어른이 되기는 글렀다.
[ 책 먹는 배우님 – 71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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