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4)
74.
[신데렐라 신드롬>작가와 배우 커리어에 ‘표절 논란’이라는 오점을 만든 작품.
내 눈에 보이던 (-2)는, 이런 일을 예견했던 것일까.
경고였을까.
세간의 온갖 관심이 모조리 집중되었던 신데렐라는 12시가 되기도 전에 마법이 풀려버렸다.
알고보니 신데렐라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처량한 신세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자님이 유리 구두를 들고 찾아오는 해피엔딩 따위도 없었고, 말 그대로 ‘표절 신드롬’으로 끝나버렸다.
14%, 16%로 시작했던 시청률은 ‘표절 논란’이 시작된 직후에는 잠시 반짝 치솟는 듯 보이더니- 논란이 거세질수록 시청률은 눈에 보일만큼 현저하게 떨어졌고.
9%.
시작만 거창하고 마무리는 그저 그런 드라마로 끝났다.
“미니시리즈의 여왕도… 옛말이네 이제.”
입과 펜으로 드라마계의 ‘탑 클래스’ 작가로서 권위를 구가하던 박혜숙 작가는 이제, 작가 ‘기본소양’에 대한 증명을 해야 했으며, ‘표절’이라는 타이틀은 평생 달고 다닐 꼬리표가 되었다.
“그러게요. 전작들 죄다 표절 시비 걸렸으니, 한 동안 방송국보다 변호사 사무실을 더 자주 가겠네요.”
“그래. 그래도 한 일이년 뒷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다시 복귀하겠지.”
복귀. 새삼 더럽게 느껴지지만, 이게 생리다.
박혜숙 작가가 쓴 글은 이제껏 큰 성공을 거두어왔고, 대중들의 기억 속에서 잠시 잊혀 지고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또 다시 나타나겠지.
“그래도, 지금이 중요하잖아?”
“그렇죠.”
나는 재익이 형의 말에 웃음 지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죠.”
[신데렐라 신드롬>은 외부적으로 몇가지를 바꾸어 놓았다.먼저, 윤제훈 연출이 쓴 [아드리안의 하루>는 영화 매거진인 ‘20th 시네마’에서 제작 지원을 하겠다고 발표했고, 조만간 본격적인 촬영을 앞두고 있다.
정이연 작가는 비어있는 ‘미니시리즈 왕좌’를 향해 크게 한 발 성큼 내딛었다.
[숨 닿을 거리>를 통해 데뷔와 동시에 거둔 큰 성공.그 이후,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던진 새로운 도전.
모두가 흥행 필패를 예상했던 [시간의 띠>는 정이연 작가를 ‘미니시리즈 차세대 여왕’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고.
나는, 박시현이 물었던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던질 수 있었다.
“내가 왜, [신데렐라 신드롬>을 거절하고 이 작품을 골랐냐고?”
이제는 말해 줄 수 있다.
아니, 굳이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보고 있다.
모두 만류했고, 걱정했던 작품을 내가 선택한 이유.
[83/100] (+13)내 눈에만 보이는 믿기 힘든 점수가 아니라.
남들에게 증명할 수 있는 가시화된 행보.
[[시간의 띠>첫 방송부터 대박. 지상파 제치고 시청률 1위] [11%! 연일 자체시청률 경신! 케이블 드라마의 역사가 된, [시간의 띠>] [시청률 고공행진, 매주 늘어나는 이유는? “미친 몰입 감”] [정이연이 쓰고, 도재희가 연기하면 “뜬다.”] [클리셰만 넘치던 드라마 판에 정이연이 쏘아올린 작은 공. 드라마에서 배제되던 마이너 장르도 함께 주목받나?]말해 줄 수 있었다.
이게 내가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의 전부라고.
여름의 끝.
가을의 시작에 일어난 마법.
이 마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처음 [시간의 띠> 촬영 당시에 퍼진 기묘한 현장 분위기를 기억한다.
촬영장에 파다하게 퍼진, 어딘지 모를 ‘기시감.’
모든 배우들이 마치, [청춘 열차> 이전의 ‘내’ 분위기를 풍겼다.
배우들의 눈이 유독 빛나는 이유에 대해 짐작컨대.
아마도, ‘욕심’.
내게 절대 꿀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경쟁심.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배우 도재희’에게 호감을 품고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
아니지.
배우 도재희라는 이름의 후광을 기대하고 모인 사람들이지.
나, 그동안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구나.
박시현의 말처럼, 이 작품에 참가한 배우들은 모두 ‘나’를 이용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다.
적당히 가식적인 가면을 쓰고.
적당히 웃어주며 인간관계를 맺지만.
그 속에 진심이라고는 없는 관계.
“선배님, 감사합니다.”
기회를 갖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를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내지만.
그 속에는 저마다 비장의 한 수를 숨기고 있다.
[청춘열차>에서 송문교를 넘기 위해 ‘나’를 어필했던 것처럼.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장면에서 진가를 드러내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해 혼을 불태우고 있다.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다.
“아, 형! 저 영장 나왔어요.”
김균오.
“그래서 회사에서는 국가고시 보래요. 잠시 미룰 수 있다나 뭐라나, 근데 그것도 쉽지 않을 거래요. 아아! 저 드라마 방영도 못보고 군대로 끌려가는 건 아니겠죠.”
“….”
허술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사이 칼을 제대로 간 듯 살벌하게 연기를 준비해온 김균오.
“오늘도 대사 다 외워왔어? 이런. 빨리 외워야겠는데.”
후배에게 절대 밀리지 않겠다는 마음을 속에 숨기고 있는 황길강 선배, 배소현 까지.
모두가 자신의 성공과,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 달려간다.
나 역시 이들에게에 ‘적당한 친절’만을 베풀었다.
재익이 형이 말했다.
“살벌하네.”
“음, 저는 좋은데요.”
나는 이런 현장 분위기에 오히려 안도했다.
“시끌시끌 말 많은 현장보다는 낫죠.”
적어도 여기엔, 쓸데없이 물 흐리는 사람은 없다.
전투적으로 연기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작품에게는 도움이 된다.
나는 이들의 열정에 ‘동력’이 된다.
L&K 후배들에게는 넘고 싶은 산을.
동료 배우들에게는 위기감을.
적어도 이렇게 대놓고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 역시 필사적으로 연기할 수 있으니까.
현장 분위기는 나날이 ‘연기 지향’으로 바뀌었고 덕분에 촬영은 상승기류를 타듯 빨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칭찬’ 보다는, ‘도전장’을 던졌고.
탑처럼 쌓여가던 16부작 드라마는, 절정의 완성도를 뽐냈다.
이것이, 올 가을에 불어온 마지막 마법.
절대지지 않겠다는 배우들의 욕심이 불러낸 기적들이.
지상파의 괴물들을 상대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
조연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제대로 각인 시킨 화제의 드라마.
*
[시간의 띠>는 수많은 스타를 만들어냈다.한국의 내로라하는 ‘명배우’ 선배님들과 붙어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은 나.
또한 L&K 신인배우들의 존재감을 단번에 알리며 내일의 스타를 예고하는 드라마가 되었고.
임팩트 있는 연기를 보여준 무명 단역 배우들에게는 ‘다음 작품’을 약속할 수 있는 귀한 드라마가 되었다.
– 영화사에서 오디션 보러 오라고 요즘, 난리입니다. 이게 전부 배우님들 덕분입니다!
내가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보자, 어머니가 물으셨다.
“누구야? 여자?”
“에? 아뇨. 동료 배우요.”
“누구?”
“임제문 선배님이라고, 같이 드라마에 나왔던…”
“아! 그 머리 벗겨진 아저씨?”
“… 네. 어떻게 아셨어요?”
“그 양반, 연기 잘하더라. 잘 됐으면 좋겠네.”
이렇게 지나가는 단역까지 어머니가 기억할 정도면 뭐, 말 다했지.
이런 것이 좋다.
저들의 성공에 내가, 미약하게나마 도움을 준 것 같은 기분.
“출출하지 않아?”
“조금 전에 저녁 먹었는데, 또요?”
“끄응. 치킨이라도 시킬까?”
아버지와 어머니는 치킨을 시키네 마네 실랑이를 벌이시다 결국.
“아들은? 먹을래?”
“치킨, 좋죠.”
양념치킨 한 마리를 시키셨다.
TV에서는 [시간의 띠> 마지막 방송 직전에 붙는 인기 있는 예능이 흘러나왔다.
몰디브 섬으로 여행을 떠난 배우들 몇몇이 뭉쳐 식당을 차리는 내용의 예능이었는데, 꽤나 재미있어 보인다.
평화로운 토요일 밤.
가족과 함께 치킨을 먹으면서 즐기는 내 드라마의 마지막 방송.
[시간의 띠> 방영 직전에 치킨이 도착했다.따끈따끈한 양념 치킨.
젓가락으로 가슴살을 집어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맥주 생각이 간절해지는데.
“맥주 있나?”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아버지가 물으셨고.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 세 캔을 꺼내왔다.
“고마워.”
또옥.
맥주 캔을 따자마자 곧 이어,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시간의 띠>타이틀이 올라가고, 곧 이어 따라붙는 세 글자.
[최종회>저 글자를 보니 왠지 모르게 입 꼬리가 올라간다.
피식.
씁쓸해지는 마음을 반대로 표현한 내 미소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갸웃거리셨으나 다시 시선을 TV로 돌리셨다.
최종회 타이틀이나, 엔딩 크레딧은 사람을 뭉클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소설이던, 영화던, 드라마던, 게임이던.
사람들은 이야기의 끝을 보기 위해 그렇게 열광하지 않는가.
기다려오던 이야기의 ‘끝’.
사람들은 이 ‘끝’을 기억한다.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에 도달해서야, 함께 호흡했던 인물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안심한다.
나는 흘러나오는 드라마를 멍하니 바라보며, 드라마의 끝이 아닌 ‘시작’을 먼저 떠올렸다.
내 시작.
3개월 전에 끝난 촬영의 모든 장면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대국을 복기하는 프로 기사처럼, 나는 드라마의 순서를 하나하나 되짚었다.
드라마 [시간의 띠>의 주인공은 모든 ‘사건’의 시작을 찾아 무한한 시간 위를 부유한다. 잘못된 시작이 결과를 바꾸는 상황들을 겪으며 항상 절망했다.
시작.
내 시작은 어땠지?
잘못된 결과를 만들지는 않았던가?
드라마 속의 내가 소리치고, 울부짖고, 나와 함께 웃었다.
“….”
그 드라마의 [최종회>가 모두 끝나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남은 맥주를 모두 비워냈다.
빈 맥주 캔만큼,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이는, 비단 나만 느끼는 감정이 아닌 듯 했다.
“고생했다.”
“아들, 고생했어.”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즐거운 얼굴이셨다.
아마, 드라마의 성공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 얼굴이 즐거워 보였으니까.
단지, 그거면 충분하신 것이다.
“읏차! 이제 드라마 뭐 봐야하나?”
“후후, 그러게 말이야. 아들, 일찍 자.”
안방으로 들어가신 부모님을 뒤로하고, 나는 쇼파에 몸을 기대어 드러누웠다.
자리에 눕는 이 순간에도 일 생각이 머리에 스쳐지나간다.
재계약을 요청한 CF들, 계속해서 내 문을 두드리는 영화사들, 읽어만 달라고 쌓이고 있다는 작품 시놉시스들. 참석해달라고 요청하는 수많은 영화 행사들.
나는 머리를 흔들며 일 생각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작품, 작품, 작품.
그 동안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왔다.
하루라도 빠르게 ‘위’로 올라가야한다는 부담감.
조금이라도 쉬면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걱정들이 이제껏 나를 지배했었다.
물론, 그건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역대 흥행 11위. 천만 영화 [이선>
케이블 사상 최고 시청률! 13.2%를 기록한 [시간의 띠>
올 한 해, 영화와 브라운관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뭐랄까, [청춘열차>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내가 서 있는 이 따가운 가시방석에서 잠시 벗어나, 머릿속을 조금 비워내는 거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가야 할 길을 되돌아보는 거지.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예능을 떠올렸다.
외국에 나가 식당을 여는 배우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유명 배우들이 외국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서든 주목받던 배우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것.
“여행이라…”
정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싶다.
기왕이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 책 먹는 배우님 – 74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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