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5)
75.
뭐, 그렇다고 당장 여행을 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소화해야할 스케줄이 산더미였으니까.
지난여름, 영화 [이선> 이후에, 극장가와는 당분간 인연이 없을 것이라 여겼던 내 얼굴이 또 다시 극장에 걸렸다.
그 주인공은, 지난 1년간 세계를 주유하고 선댄스를 비롯해 총 4개의 영화제에서 상을 받고, 5군데의 영화제에 초청 받은 [양치기 청년>
내 얼굴이 강조된 새로운 단독 포스터와 함께 정식으로 극장에 걸렸다.
포스터에는 예전 포스터에는 없던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한 정보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상영되는 극장은 독립영화극장이 아닌, 일반극장.
전국에 있는 모든 상영관에 다 걸린 것은 아니고, 광역시를 비롯한 큰 도시 위주로 걸리긴 했지만.
‘반드시 제 영화를 극장에 걸 겁니다.’
박진우 연출은, 나와의 약속을 모두 지킨 셈이다.
일반관객 GV에 배우가 따라나서는 경우는 드문 일이지만, 이 영화만큼은 함께 하고 싶었던 나는.
압구정 아트시네마 하우스에서 열린 [양치기 청년> GV에 참석했다.
기자들의 뜨거운 사진 세례를 받으며 극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근 9개월 만에 박진우 연출을 만났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이거, 몰라보겠습니다. 감독님?”
“으하하, 머리가 많이 길었지요.”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머리는 파리지앵을 연상케 하는 긴 장발이었고 그 사이에 살은 많이 빠져 동글동글하던 인상이 꽤나 날렵하게 변했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영화 상영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던 터라, VIP대기룸에서 대기했다.
“축하드립니다.”
내 축하 인사로 시작된 대화.
하지만 박진우 연출은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야 말로 축하드립니다. 임창태 감독님의 영화에 참여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천만 배우라니.”
“운이 좋았습니다.”
“운으로만 되는 일인가요? 정말 용이 되셨습니다.”
“감독님은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박진우 연출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외영화제를 돌며 수많은 감독들과 만났던 일. 미국에서 구체적으로 영화 작업에 들어갈 뻔 했으나, 엎어진 일.
그리고 본인 이름의 영화사를 세운 일.
나는 놀라 되물었다.
“영화사요?”
“예. 실은 그 동안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 주변사람들과 더 오래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기회를 만나 하게 되었지요.”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박진우 연출은 무언가 할 말이라도 남아있는 듯 했다.
“그게… 실은, 그 동안 많이 고민했습니다.”
“어떤 고민이요?”
“제게 확답을 주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민했습니다. 제 차기작에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 아.”
일전에 미국에서 내게 보내주었던 대본.
제목이 뭐였던가.
… 기억이 나질 않는다.
솔직한 말로 박진우 연출이 내게 보여주었던 [양치기 청년>의 임팩트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판단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렇게 답변을 차일피일 미루다, 어느새 여기까지.
박진우 연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래 고민했습니다. 이유가 뭘까, 왜 도 배우님을 사로잡지 못했는가. 하하…”
“그런 게 아니라…”
하지만 변명일 뿐이다.
“글이 좋았다면, 도 배우님 성격상 아마 바로 연락을 주셨겠지요?”
“….”
맞는 말이다.
박진우 연출은 대신 확실한 ‘무기’를 들고 왔다.
“그래서 새로 썼습니다. 국내에 머무르는 동안, 확실하게 차기작을 준비했지요. 도 배우님 마음에 들도록.”
나를 위한 영화.
“영화사는 본래 첫 작품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 기념비적인 영화를 꼭 도 배우님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박진우 연출의 화끈한 구혼.
마치, 처음 SAFA 사무실에서 나와 마주하던 날.
내 등에 반드시 날개를 달아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그 자신감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스친 옛 생각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핫”
“왜, 웃으십니까?”
“저 생각보다 입맛이 깐깐합니다.”
“으하하! 알고 있습니다. 작품 보는 눈이 탁월하신 것. 하시는 작품마다 일정 기준 이상 흥행을 하셨지 않습니까? 특히 주연으로 출연하신 영화는 모두 성공하셨지요.”
“그거, 감독님 영화도 포함입니까?”
“그럼요! 제작비 1억 원도 들지 않은 영화로 이만하면 성공했지요. 하하!”
그래.
내게 미안해하던 모습보다는, 이렇게 당당한 모습이 훨씬 보기 좋다.
“책, 조만간 보내드리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독님.”
이후에 이어진 GV에서도 박진우 연출은 거침없는 입담을 자랑했다.
지난 1년간, 수많은 외신기자들과 해외 명장들 사이에서 성장한 박진우 연출의 ‘경험’은, 이런 조그만 GV 행사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듯 보였다.
영화가 끝나고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들에게는.
“앞으로 나눌 얘기 많으니, 박수는 조금 있다 받겠습니다.” 라고 너스레를 떨었고.
관객들의 다양한 영화 관련 질문에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모르긴 몰라도, 수차례 들은 질문일 것이다.
박진우 연출 옆 자리에 앉아있던 내게도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쩌다 이 영화를 선택하시게 된 겁니까?”
나는 별 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제겐 매우 의미 있는 작품입니다.”
“해당 영화의 영화제 수상과는 별개로, 배우님은 이미 필모그래피를 탄탄하게 쌓고 계셨지 않나요?”
한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에 나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제가 박진우 연출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눈에 띄지 않는 ‘신인’ 시절에 박진우 연출은 나를 믿고 주연을 맡겨주었고.
나 역시 그에 보답했다.
*
올해 11월은, 영화제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촬영도 없었는데 왜 이렇게 정신없이 느껴지는 것일까.
“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재익이 형이 정신없기 때문이 아닐까.
“좀! 좀! 전화 좀 그만 하라고!”
재익이 형은 울리는 전화기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지만, 금세 표정을 180도 바꾸며 전화를 받았다.
“네 L&K 황재익입니다. 아, 네 실장님!”
오랜만에 재익이 형과 술을 마셨다.
장소는 우리 집.
메뉴는 배와 야채, 빨간 초장을 버무려 먹는 막회와 요즘 딱 제철이라는 전어.
보기만 해도 침이 넘어가는 이 안주를 앞에 두고 불행하게도 고사만 지내고 있다.
소주는 한 병도 채 비우질 못하고 재익이 형은 전화기만 붙잡고 있었다.
“네, 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휴.”
전화를 끊자마자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으. 어휴, 이놈의 캐디(캐스팅 디렉터)들. 드라마는 안 하겠다는 데도 끝까지.”
“이번에는 누군데요?”
“KTN. 아주, 모든 방송사 돌아가면서 전화야.”
“안하겠다고 하는데도?”
“응. 너 드라마 찍으면 성공하는 거, 이제는 공식이잖아. 어떻게 해서든 모셔가려고 난리다 난리.”
재익이 형은 전어를 한움큼 입에 넣고는 손가락 여덟 개를 펼쳐보였다.
“이번엔 여덟 장이란다.”
개런티 8천.
현재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남자 배우들 개런티 수준.
불과 데뷔 2년 반 만에 올린 성과다.
지이이잉!
“으아! 또 전화 왔어!”
젓가락을 신경질 적으로 내려놓으며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실소를 지었다.
재익이 형이 오늘 우리 집을 찾은 것도, 이런 이유다.
‘[청춘열차> 문병철 감독 드라마 들어간다는데, 드라마는 정말 안 할 거지?’
‘한 번만 읽어볼래?’
‘이 영화는 어때?’
일, 일, 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주를 털어 넣었다.
꼴깍.
재익이 형이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어디까지 얘기 했었지?”
“음, 영화 얘기하다가 끊어지고. 형이 아직도 제 로드 뛰는 거, 한탄하시다 끊어지고. 이번엔 저 휴가 얘기 하다가 끊어졌죠.”
“아! 휴가!”
나는 휴가를 신청했다.
사실 나 같은 프리랜서에게 휴가가 무슨 의미가 있냐 싶지만, 내 스케줄 잡으려면 회사에다 말을 하는 게 예의지.
연락 안 받고 무작정 잠수 타는 연예인들도 부지기수라더라.
“얼마나?”
“글쎄요. 한달 정도?”
“음, 12월이네? 시상식 전에는 끝나겠네? 다행이다.”
대종상을 비롯해서, 방송사 시상식들이 예정되어있는 12월.
올 해에는 연기 대상을 노릴 법도 했지만. 아쉽게도 지상파 방송사와는 작품을 하지 않았다.
기대하는 것은, 대종상과 K어워드 정도.
나는 거실 한 켠에 놓여진 상패들을 바라보며 소주를 또 한잔 넘겼다.
“…”
생각을 하지 말자.
상 생각을 하니까, 또 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잖아.
“그래, 잘 생각 했어. 너 좀 쉬어야 해.”
“형 생각도 그래요?”
“그럼. 이제 자리 잡았으니까, 여유롭게 영화 하고. 네 삶도 가지고 그러면 돼.”
내 삶.
그러고 보면, 지난 시간동안 앞 만보고 달려오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배웠지만.
문성이 형 못 본지도 벌써 1년은 된 것 같은데.
휴가 때 대학로 한 번 가야겠다.
“그럼 일단 러프하게 잡아놓은 11월 일정 죄다 미뤄야겠네.”
“무슨 일정이요?”
“새 CF도 있고. [불칸 SUV> 재계약 건도 있고. 영화인 김장 나눔 행사도 있고. 부안에 영상 테마파크 옆에 새로 지은 거 알지? 거기 개관식도 가야할 것 같고. 또…”
“….”
너무 많은 걸.
날 죽일 셈인가.
“몰라요. 저 죽을 것 같아요.”
내가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고 늘어지자 재익이 형이 낄낄 거렸다.
“그래! 가서 좀 쉬다와. 근데, 어디로 가려고?”
아, 맞아.
나 어디로 가지?
“모르겠어요. 해외여행 제대로 가본 적 없어서, 한 번 가볼 생각인데. 어디로 가죠?”
내가 갔던 해외라고는 영화제나 촬영 로케이션이 전부다.
나이가 서른인데, 나 대체 뭐하고 산거야.
남자 혼자가는 해외 여행, 어디가 좋을까.
미국, 아니 가까운 일본?
“형은 외국 많이 다녔잖아요. 추천할 곳 없어요?”
하지만 재익이 형은 의외로 이런 부분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누가 그래? 외국 자주 간다고. 배우 담당은 죄다 중국 아니면 일본이지. 너 따라 미국도 처음 가봤다.”
“….”
아, 의외인데.
툭 하면 해외 공연나간다고, 힘들어하던 소윤이나, 배소현의 매니저가 떠올랐다.
아이돌 매니저와는 여러모로 다르구나.
“어쨌든, 가급적이면 중국이나 일본 같은 곳은 피해. 거기서는 네 얼굴 다 알아 볼 거니까.”
한류스타라면 한류스타일까.
아직 정식 활동을 한 적은 없지만, 내 드라마는 중국 일본 여기저기에서 방영되고 있으니까.
“음, 정말 그렇겠네요.”
“물론, 너 알아서 잘 하겠지만. 공인이라는 것만 잊지 말고. 요새는 한국인들 외국에 많은거 알고 있지? 실수 하다가 사진 한 장 찍히면 SNS에 그대로 퍼진다?”
“예, 예.”
“술 먹고 싸움하지 말고.”
“제가 앤 가요?”
“그건 아니지만. 네가 좀 불안하긴 하지.”
“….”
고오맙다.
내가 입줄을 삐죽이자, 재익이 형이 재밌다는 듯 웃었다.
“후후, 한 잔 하자! 건배 해야지.”
“건배사는?”
“그 동안 고생했고, 앞으로도 고생할 우리 재희. 첫 해외 여행을 위해!”
잔을 부딪혔다.
쨍!
술 잔을 넘기면서 미소지었만, 한 편으로는 걱정 되기도 한다.
나 혼자 해외 여행이라니.
여권은 어디 있더라. 렌트도 해야겠지? 국제 면허증 발급도 받아야 할테고. 환전도 해야겠지? 환율은?
“….”
에이이이.
걱정 하지 말자.
일 하느라 팍팍하게 늙어버린 내 청춘을 위해서라도.
기왕 마음먹은 거 제대로 놀다 오는 거다.
“마셔요!”
그렇게, 나 홀로 해외여행이 시작되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7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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