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6)
76.
나는 내 여행에 앞서, 부모님께도 해외여행을 권해드렸다.
어머니는 두 손을 모아 눈을 빛내며 되물으셨다.
“해외여행?”
“네.”
“정말?”
“그럼요. 평소에 가고 싶었던 곳 있으세요?”
“허허, 갑작스러워서. 그런 게 있을 리가…”
아버지 역시,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셨지만 조금 부담스러운 얼굴이셨다.
아이, 그런 걱정 마시라니까.
미국도 좋고, 유럽도 좋고.
“어디든 좋아요. 저는 함께 못가겠지만…”
회사원이 휴가를 쓰기에는 시기가 여의치 않은 11월.
내 스케줄과 아버지 휴가일정이 달라, 당장 여행을 함께 가지는 못하겠지만.
“이제껏 외국 한 번 못 나가보셨잖아요. 두 분, 좋은 추억 만들고 오세요.”
무릇, 좋은 건 가족과 함께 나눠야지.
하지만 아버지는 역시, 부담스러운 듯 보였다.
“비행기 오래 타는 게 걱정이지. 기껏해야 제주도 갈 때나 타본 비행긴데. 갑자기 해외여행은 아무래도 좀… 아앗.”
어머니의 옆구리 공격에 아버지가 입을 꾹 다무셨고 어머니는 입 꼬리를 올리며 말씀하셨다.
“우리는 알아서 잘 다녀 올 테니 걱정 말고. 아들이나 조심히 잘 다녀와.”
“푸흡. 네.”
어머니가 확실히 결단력이 있으시다니까.
*
무릇,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쓰고, 여행도 다녀본 사람이 잘 다니는 법이 아니겠는가.
내 야심찬 해외여행 준비는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요새 뜨는 핫플! 베트남 다낭 여행패키지.] [연말연시 해외여행지 추천 Top 5] [겨울추천 호주 자유여행! 성향으로 찾는 세 가지 스타일]혼자 국내 여행해 조차 본 적 없는 여행 초보가, 범람하는 여행 정보 홍수 속에서 여행지를 고르는 일이 쉽지 않다.
아시아권은 제외하고.
미국도 짧게라도 다녀왔으니 우선 제외.
‘보름치기 서유럽 자유여행’ 이라는 제목의 블로그가 내 눈길을 끌었다.
“… 유럽이라.”
정확히는 영국 런던에서 시작해 프랑스 파리, 디종 스위스 인터라켄을 거쳐 이탈리아를 방점으로 찍고 로마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대략 20일 내외의 자유여행.
도시 간의 이동을 최소화하고, 굵직굵직한 대도시 위주로 둘러보는 루트인데.
막연하게 휴양지에서의 휴식을 떠올렸던 머릿속이 말끔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괜찮은데.”
기왕 나갔다 오는 거, 혼자 휴양지에서 뭐 하겠어.
여기저기 둘러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오는 게 낫겠지?
“…”
이런 나조차 확신을 하지 못하던 유럽 여행에 내 눈을 잡아끄는 키워드 하나가 있었다.
‘웨스트 엔드’
오, 재밌겠는데.
*
영국에서는 유로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영국에서 사용할 파운드도 넉넉하게 환전했다.
유럽에는 소매치기가 많다는 어느 블로그의 말을 참고하여 선글라스로 여행 초보 느낌을 지우고, 지갑은 이중 삼중으로 꽁꽁 감췄다.
여권과 혹시나 준비한 국제면허증도 함께.
물론 선글라스는, ‘배우 도재희’를 감추기 위한 목적이 더 강하다.
“어?”
하지만 선글라스 따위, 내 정체를 숨길 수는 없었다.
티켓을 확인하는 항공사 직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짐짓, 놀란 기색을 보였다.
“…”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내가 손가락을 입에 살짝 가져다대자.
“흠흠.”
금세 기색을 감추고는 빙긋 사무용 미소를 지어 보인다.
“드라마 잘 보고 있어요. 즐거운 여행 되세요.”
나 역시 사무용 미소로 화답했다.
“네, 감사합니다.”
질질질-.
캐리어 위에 배낭을 올려 인천국제공항 탑승동으로 들어섰다.
비행 출발 시각은 오후 13시 15분.
비행기에서 12시간을 앉아있어야 하는 장시간 비행에 들어가기에 앞서, 나는 인근 10번 게이트 인근 햄버거 가게 앞에 멈춰섰다.
우와, 사람이 너무 많잖아.
이미, 점심시간대라 가게는 포화상태였지만 딱히 다른 곳도 다르지 않았기에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간신히 구석 자리 하나를 차지한 나는, 주문한 치즈버거를 입에 물었다.
앙.
시선은 살짝 아래로 감자튀김만 바라보았고, 선글라스는 절대 벗지 않았다.
지난 2-3년 간.
집-촬영장만 반복해서 오갔다. 사적인 모임을 가더라도 내 옆에는 대부분 재익이 형이 있었고. 이렇게 혼자 사람 많은 곳에 있었던 적은 없었는데.
“….”
마치, 어미에게서 독립한 새끼 사자라도 된 기분.
아니 수풀에 혼자 버려진 토끼인가.
모자라도 쓰고 올 걸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휴대폰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려온다.
– 치이즈! 찰칵!
불빛이 번뜩이자, 습관처럼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돌아보니, 이미 가게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도재희?”
“우와, 배우 맞죠? 안녕하세요.”
“….”
아, 들켜버렸어.
아니라도 딱 잡아 땔 수도 없는 노릇이다.
죄 진 것도 아니고.
나는 선글라스를 벗고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숨 집어 삼키는 소리가 주변에서 연신 들려왔다.
“헉! 도졌다.”
“진짜 도재희야?”
“도재희가 왜 혼자 버거나라에 있어?”
“….”
아하하, 그러게요.
제가 왜 여기 있을까요.
“시, 식사 맛있게 하세요오.”
자신감이 떨어져 어미가 뚝 떨어져 버린다.
특정 목표가 없는 괴상한 인사를 뱉은 나는 최대한 빠르게 식사를 마치려고 했지만. 주변에서 계속 사진을 찍어대는 터라 식사를 마칠 수가 없었다.
“저기, 죄송한데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아, 넵.”
“그럼 저도 부탁 드릴게요.”
한 용기 있는 소녀 팬의 등장에 현장은 순식간에 팬 사인회 현장으로 바뀌었고.
“사진 찍어도 되요?”
“오! 저도!”
기내 탑승 직전까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진을 찍었다.
“줄 서세요. 줄!”
“제가 먼저 왔다니까요.”
“아하하하…”
유명 배우에겐, 일정 범위 이상 들어올 수 없는 결계가 있다고 했던가.
다 뻥이었다.
용기 있는 한 사람이 결계를 부숴버리면 너도나도 달려온다고.
*
“여기도 천만, 저기도 천만.”
L&K 엔터 휴게실.
시놉시스, 투자 현황, 투자 수익률을 예상한 시장분석 사례들이 너저분하게 놓여있는 테이블 한쪽 귀퉁이에 앉아있던 박찬익 팀장이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요새 천만 시대잖아. 천만이 누구 집 개 이름은 아니지만, 그 만큼 많다고. 근데 왜 유독 재희만 고집하는 거야? 재희 말고 다른 배우들 추천해도 되잖아.”
앞에서 짜장면을 입에 밀어 넣던 황재익이 말했다.
“그야 흥행 보증 때문이죠. 재희가 찍었다 하면, 작품은 대박인데. 손익 손실 난 영화는 [피셔> 뿐이잖아요.”
“알지, 아는데. 답답해서 그러지. 요즘 전화기 울리는 건 죄다 재희 찾는 전화들뿐이니까. 동나이대 딴 애들은 손가락 빨고 일일 들어가게 생겼어.”
이미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남자 배역 중 캐스팅 1순위가 된지 오래.
L&K입장에서 도재희가 벌어들이는 금액이 상당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입장이지만.
영향력 있는 작품에 들어 가야하는데, 다들 도재희만 찾아 일거리가 줄어든 기타 소속 배우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니, 매니지먼트 팀 입장에서도 골머리를 썩을 일이다.
박찬익 팀장이 물었다.
“재희는 뭐해?”
“여행 갔죠. 유럽 간다던데.”
“아, 휴가 냈다고 했지? 가기 전에 작품 얘기는 좀 해봤어?”
“네. 영화 몇 개 던져봤는데 다녀와서 보겠다는데 별 수 있나요.”
“그래? 감독님들한테 둘러댈 핑계는 있겠네. 한 달 뒤에나 한국 들어온답니다. 흐흐. 사고는 안치겠지?”
“사고 칠 성격은 아니죠. 아시잖아요. 자기 건들지만 않으면 성질 안 부리는 거.”
그 때,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다른 매니저 한 명이 말했다.
“재희 실검 1위…? 뭐야? 재희 휴가 갔다며? 스케줄 있어?”
“….”
그 말에 짜장면 그릇을 들고 있던 황재익을 비롯한, 박찬익 팀장의 얼굴이 똥 빛으로 변했다.
“뭐?”
“무슨 말이야? 휴가 간 자식이 무슨 1위야.”
이들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생각은 방금 전 까지 떠들어대던 사고.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스쳐지나갔다.
헐레벌떡 휴대폰을 들어 올린 세 사람의 얼굴이 허탈하게 변했다.
“배우 도재희, 버거나라 앞에서 활짝? 공항 팬 사인회 중?”
“인천공항이 난리 난 이유. 도재희 깜짝 등장…?”
“참 나.”
휴대폰을 내려놓은 박찬익 팀장이 짜장면 그릇을 가리키며 말했다.
“먹어, 먹어.”
“….”
그리곤 안도와 짜증이 뒤섞인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리 점심시간이라도 그렇게 기삿거리가 없나. 햄버거 먹는 재희가 실검 1위야? 놀랬잖아!”
그리고 셋은 동시에 왁자한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그래도. 재희니까 이 정도죠. 아이고, 배야. 무슨 햄버거 먹는 사진이 포털 메인에 뜨냐.”
“큭큭, 야. 웃지 마. 나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이거, 재익이 너라도 따라 갔어야 하는 거 아냐?”
“혼자 가겠다고 부득불 우기는데 말릴 수가 있나요. 잘 하겠죠. 재희가 이미지 관리 하나는 끝내주잖아요. 여자도 멀리하고, 술도 조절하고.”
박찬익 팀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먹어, 먹어.”
그리고는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던지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얘는 여행 가서도 화제구만. SNS에 출발 전 기내 사진 올라와있네? 근데, 이거 뭐야. 얘 퍼스트 안 타고 이코노미 탔어? ”
“… 아이고, 재희야…! 돈도 써본 사람이 쓴다더니.”
“저는, 인간적이고 좋은데요?”
“인간적이긴? 재익아. 재희한테 연락해서, 출국 날짜 알아 봐. 표 한장 끊어주게.”
“네”
*
나, 분명 12시간을 비행기에 앉아 있었는데.
시차를 거슬러 런던에 도착하니 17:30분이다.
놀랍기 보다는, 너무 뻐근하다.
아고고 허리야.
“즐거운 여행 되세요.”
나는 지겨운 12시간의 비행동안 말동무가 되어준 영국인 노부부에게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노부부는 내게 싱긋 웃어주었다.
“Welcome to London”
12시간의 비행 동안, 노부부에게 런던에 대해 이것저것 들을 수 있었다.
어디가 유명하고, 어디에는 꼭 가야하고. 어떻게 가는지.
덕분에 몸은 피곤했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호기심과 설레임이 가득 찼다.
30분 이상 공항에 대기하며 입국심사를 거친 뒤에야, 드디어 영국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피카딜리안 지하철 티켓을 구입한 뒤,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40여분을 달려 피카딜리 서커스(Piccadilly Circus)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아”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저녁.
서울과는 다른 너무나 이질적인 건축양식과 빨간 2층 버스를 보니 영국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간판은 휘황찬란하고, 럭셔리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곳.
유럽 여행을 기획하면서, 런던에서 생활하면서 내 중심 반경이 될 이곳.
피카딜리 서커스, 소호, 그리고.
“웨스트엔드”
세계 양대 뮤지컬 거리.
미국에는 브로드웨이가 있고, 영국에는 웨스트엔드가 있지.
셰익스피어의 본고장 영국까지 왔는데 연극 한편 보고, 뮤지컬도 봐야하지 않겠는가?
극장만 50여개가 몰려있는 이 거리는, 상업적으로도 번화한 지역이라 사람들이 가득 몰려있었는데.
“….”
당연한 얘기지만, 선글라스를 벗었음에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일종의 해방감과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어딜 가든 카메라가 따라다니던 삶에서 벗어난, 조그만 일탈.
“좋은데”
술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눈치 보지 않아도 된다.
갑자기 배가고파 지는 걸.
오늘 하루 종일 점심에 기내식으로 먹은 컵라면과 조각 케잌이 전부라고.
여행의 첫날.
오늘을 어떻게 보낼지 정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자는 거지.
그런데, 곧바로 숙소로 가려던 내 발길을 잡아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 뭐지?”
길 한 복판에서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원형 극장마냥,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버스킹?”
… 맞네.
하지만 흔히 아는 밴드들의 버스킹은 아니었다.
마치, 연극 버스킹 같았다.
[ 책 먹는 배우님 – 7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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