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7)
77.
야외‘극장’이 아니다.
그냥 사람들이 붐비는 메인 스트릿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젊은 외국인 배우들의 연기.
배우들은 모두 세 명.
“….”
나는 적잖이 놀랐다.
버스킹 하면, 기본적으로 음악을 떠올리니까.
하지만 음악을 비롯해 마술, 행위예술, 현대미술, 탭댄스, 그리고 뮤지컬 연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뒤섞인 곳이 바로 이곳, 웨스트엔드.
나는 그 자리에 홀린 듯 멈춰서, 이들을 바라보았다.
뮤지컬인가.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배우들의 연기는 한 에피소드 당 10분을 넘어가지 않는 단막극이었다.
야외 환경에 맞게, 긴 대사보다는 벌스, 감정, 표정, 몸짓으로 액팅을 극대화 하는 배우들.
과연, 뮤지컬의 본고장답 달까.
노래에는 큰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듣기만 해도 귀가 즐거울 지경이었다.
연기하는 장면은, 국내에도 너무나 잘 알려진 세계 4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하이라이트.
나 역시 연극영화과 재학 당시, Phantom of the Opera의 높은 음역 대를 소화하기 위해 연습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꽥꽥 질러대는 여학생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이 정말 못 들어줄 정도였지. 프로 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은 곡이니까.
그런데 웬걸.
“….”
이 아마추어 배우들은 그 높은 음역 대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버린다. 힘들어하는 기색하나 없이, 오히려 여유롭기 까지 한 모습.
북적이는 길거리를 완벽한 ‘극장’으로 바꿔버리며 청중들의 열띤 박수를 얻어낸다.
“Woh!!”
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고, 나 역시 이들 틈에서 박수를 쳤다. 유료공연의 수준은 어느 정도 길래, 이 정도 수준의 배우들이 길에서 공연을 하는 거지?
짧은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저마다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는 주머니에서 20파운드(한화로 약 2만9천원) 지폐 한 장을 꺼내 모금함에 집어넣었다.
“Thank you.”
그러자 방금 전, Phantom of the Opera를 완창한 여배우가 눈웃음을 지어보였고, 나 역시 희미하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등을 돌리려는데, 남자 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 어?”
남자 배우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지만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고, 고맙다고 내게 똑같이 인사했다.
나는 웃어 보이며 뒷걸음질로 광장을 벗어났다.
여행 첫 날에 마주한, 짧지만 특별한 공연 한 편.
뇌리에 남는 좋은 추억 한 편정도.
하지만 이들과의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
시차 적응을 끝낸 가벼워진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빅토리아 여왕 극장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헤이마켓 호텔.
어제는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 내에 있는 미니바에서 와인을 곁들였다.
그리고 죽은 듯이 자고 일어난 지금.
나는 부스스하게 치솟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텐을 열어젖히니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고풍스러운 런던의 거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20분.
나는 곧바로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은 뒤, 방을 빠져나왔다.
호텔 분위기는, 고급스러운 느낌 보다는 오히려 동화 속에 나오는 런던의 오래된 목조 저택 같은 푸근한 분위기.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꾸며진 호텔 로비를 지나, 1층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서는 버섯스프와 와플&샌드위치, 딸기와 커피를 단품으로 주문했다. 오늘 일정은, 인근의 세인트 폴 대성당과 타워 브릿지를 둘러보는 것.
그 전에, 마제스티 극장에서 열리는 ‘오페라의 유령’을 아침 일찍 데이시트로 예매할 예정이다.
일정을 빡빡하게 잡지는 않았다.
하루 종일 여유롭게 런던을 산책하듯 거닐고, 밤에는 어젯 밤에 나를 ‘오페라’로 초대했던, 그 뮤지컬 한 편을 관람하는 것이 오늘의 일정.
호텔 식당에서 여유롭게 조식을 먹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재익이 형이다.
“여보세요?”
– 거긴 아침이지? 일찍 일어났네?
“아침 먹으려고요. 한국은 오후죠?”
– 응. 별일 없지?
“없어요.”
너무 조용할 만큼 아무 일도 없지.
어제 런던에 도착했는데, 무슨 일이 있으면 안 되지.
재익이 형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 다행이다. 근데, 여긴 별 일 있어.
“응? 무슨 일이요?”
– 네 공항 사진 SNS에 쫙 돌아다니고 있어. 알지?
“….”
나는 입을 다물었다.
몰랐는데요.
난 어제까지만 해도 비행기 타고 있었다고.
– 네 팬들이 허리 아프게 이코노미 타고 런던까지 갔다고 난리야 아주.
팬들?
“제가 런던에 있는 걸 알아요?”
– 그럼. 출발 전에 기내에서 찍힌 사진도 있는데. 승무원도 사진 찍어달라고 했지? 그것도 다 알아.
“….”
아, 그러세요.
나에 대해 많이 아시네.
혹시, 공항에서 부터 누가 날 따라와서 감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농담이다.
– 출국 날짜가 언제야?
“27일?”
– 로마에서지? 그거 퍼스트 클래스로 바꿔줄게.
“예? 이코노미는 제가 타고 싶어서 탄 건데요?”
돈이야 당장 풍족하게 여행할 만큼 벌어뒀지만, 뭐랄까.
큰돈을 펑펑 쓰며 놀기에는 내 간이 작다고 할까.
딱히 ‘저축만이 답이야!’ 라는 생각도 아니지만, 그래도 퍼스트 클래스는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돈이 얼만데.
하지만 회사입장은 다른 모양이다.
– 돈 몇 백보다는, 도재희 컨디션이 중요하니까. 네 체면도 있고. 회사 체면도 있고.
“….”
–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따라가고 싶은데, 혼자 가는 첫 여행이잖아.
재익이 형은 똑같은 말을 강조했다.
‘너 같이 노는 애들 많지 않아.’
후배며 매니저며, 하다못해 경호원이라도 동행해서 짐 다 들고 다니게 하고, 자기 개인 스케줄에 써먹으려는 스타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 행동은 ‘신선’ 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급’에 어울리지 않다는 말.
“음”
뭔가 기스 날까 우려되는 ‘상품’이 된 것 같아서 찝찝하면서도 일리 있는 말이다.
그렇기에 나는 승낙했다.
“알겠어요. 한국 들어가서 봬요.”
전화를 끊자마자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검색하고 SNS를 뒤져보았다.
엄청난 양의 기사들과 사진들.
입이 쩍 벌어진다.
“도대체 이런 건 언제 찍힌 거야.”
히드로 공항에 내린 직후에 찍힌 사진도 있다.
이거, 무서워지는데.
아무래도 선글라스 끼고 다녀야 할 것 같은걸.
*
아침 일찍 마제스티 극장에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표를 예매했다. 극장이 문을 여는 9시 전후로 해서, 당일 티켓을 싸게 판매하는 ‘데이시트’
가장 좋은 좌석은 이미 예약이 꽉 차 있었지만, 55파운드 짜리 좌석을 37파운드에 구매했으니, 운이 좋은 편이다.
아낄 수 있는 건 이렇게 아껴야지.
이렇게 싸게 구입했지만, 제 값을 내고 봤어도 한국보다 오히려 티켓 값이 싼 편이니 확실히 본고장은 다르다.
간 김에 프로그램 북도 함께 구매했는데, 캐스트와 크루들의 정보, 배우들이 부르게 될 뮤지컬 넘버를 포함한 뮤지컬 상세 정보가 가득 담겨있다.
가격은 10파운드(한화로 대략 1만 4천원).
정말 전부 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것을 놓칠 수는 없지.
5파운드를 더 내고 스크립트 북(대본)까지 구입했다.
지금도 영어로 일상 대화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지만.
[뮤지컬 ‘Phantom of the Opera’를 흡수하시겠습니까?]대본을 통째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면 모국어로 보듯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을 테니까.
점심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제이미 올리버 레스토랑.
새우가 일품인 생면 파스타에 갈릭 브레드를 먹고 빨간 2층 버스를 타고 세인트 폴 대성당에 도착했다.
높은 빌딩 사이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한국의 광화문처럼,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에 위치한 세인트 폴 성당의 고풍스러운 외관은, 확실히 특별해 보인다.
뭐랄까, 당당함 사이에 있는 부드러움이랄까.
멀지 않은 거리에 오밀조밀하게 관광지들이 모여 있다고 했기에 지도를 찾아보지 않고 관광객들 인파 사이에 묻혀 함께 걸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런던의 대표적인 랜드 마크로 꼽히는 타워 브릿지를 바라보며 돌계단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휘날리고, 커피가 싸늘하게 식어갈 무렵.
절대 쉽지 않은 인연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응?”
어젯밤, 런던에 막 도착한 나를 환영하듯 들려온 뮤지컬 한 소절.
Phantom of the Opera.
똑같은 노래가 앰프에 실려, 바람에 실려.
내 귀를 두드린다.
나는 노랫소리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소리는 아주 가까이에서 나고 있었다.
어딜까.
타워 브릿지를 관통하고 있는 탬스 강변에 펼쳐진 작은 바위무대.
그곳에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가까이 다가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어라.”
어제 만났던 그 배우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런던의 유령처럼, 런던 어디에도 있었다.
유랑극단처럼 길에서 노래를 했고, 연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마치, 유령에 홀린 ‘크리스틴(오페라의 유령 여주인공)’처럼, 이들의 노랫소리를 따라 걸었고.
노래 한 소절이 끝나고 다음 소절을 준비하던 남자 배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을 번쩍 뜨더니 환하게 웃으며 내게 손짓했다.
“이봐요!”
“….”
어젯밤의 나를 알아본 것이다.
동양인이라서, 나를 알아본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여기에 동양인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멋쩍게 손을 들어올렸다.
하하.
안녕하세요.
*
샘, 행거, 아리아나.
미래의 뮤지컬 스타를 꿈꾸는 영국 배우들.
우연한 기외에 인연이 닿은 이들과 나는 따뜻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들은 웨스트엔드 무대에 서는 것을 목표로, 길에서 노래를 연습하고 연기를 한다.
이들이 나를 알아본 것은.
“나, 그 영화 봤다고.”
영화 [양치기 청년> 때문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금발 청년 샘은, 고향 에든버러에 초청된 [양치기 청년>을 보았고, 나를 기억했다고.
“어젯밤에 봤을 때는 확신을 못 했거든. 그 사람이 왜 여기 있겠어? 한국에 있겠지. 그런데 오늘 낮에 보니까 딱 알아봤다고. 아! 내가 본 그 사람이구나!”
호들갑을 떠는 샘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털이 복슬복슬한 행거가 말했다.
“맞아. 샘이 어제부터 매일 ‘제이’ 얘기만 했다고. 나, 아무래도 엄청난 ‘스타’를 본 것 같다고 말이야.”
“하하!”
재희, 라는 이름보다는 ‘제이’가 부르기 편한 것 같아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이들이 나를 알아봐서가 아니라, 대화 자체가 시종일관 유쾌했다.
높은 웨스트엔드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길에서 연기를 하고 자신들을 알리려는 이들의 노력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실패를 비관하지 않고, 나아가려면 웬만큼 낙관적인 성격이 아니라면 힘들 테니까.
이들의 처지를 동정할 필요도 없다.
확신한다! 이들은 해낼 것이라고.
“그나저나, 매일 그렇게 노래를 하는 겁니까?”
내 질문에 아리아나가 말했다.
“네. 보통은 매일.”
내가 유령에 이끌린 ‘크리스틴’처럼 당신들을 따라다녔다고 말하자 아리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스팟에서 노래를 했고, 아주 높은 확률로 겹쳤을 뿐이에요.”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관광객들의 눈에는 정말 신선하게 보일 테니까. 당장 SNS에 올리지 않고 어찌, 배기겠는가.
그 때, 샘이 내가 벗어둔 코트 위에 가지런히 올려져있는 ‘오페라의 유령’ 프로그램 북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이도, 공연에 관심 있어요?”
“아. 오늘 공연을 보러 갈 겁니다. 어제 여러분들 공연이 제 호기심을 자극했거든요. 정말 최고의 공연이었어요.”
내 말에 아리아나는 재미있다는 듯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이에게도 음악의 천사가 내려왔네요?”
“응?”
음악의 천사란, 오페라의 유령에서 ‘크리스틴’이 ‘유령’을 생각하는 단어를 지칭한다.
현혹, 혹은 허울.
“저희 노래로는 충분하지 못했나 보군요. 후후.”
“아뇨, 그럴 리가요.”
아리아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요. ‘제이, 당신이 런던에 도착하면 반드시 음악의 천사를 보내주마’ 라고요. 라울”
이는 오페라의 유령의 대사를 현 상황에 맞춰 장난스럽게 바꾼 것이었다.
나 역시 그에 화답하듯 장난스럽게 오페라의 유령의 대사를 외었다.
“맞아요. 의심할 것 없죠. 아리아나. 나는 런던에 도착했고, 지금 ‘음악의 천사’의 방문을 받았어요. 바로, 당신들이죠.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요.”
그리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당신들이 내게 좋은 추억을 안겨주었다는, 칭찬이 내포된 말이었지만- 이들은 그런 것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놀라며 입을 뜨악하게 벌렸다.
“제이.”
“네?”
“한국에서는 배우들이 뮤지컬 대사를 외우고 다니나요?”
아아, 아니지.
그럴리가.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래요. 후후.”
“오….”
장난 스럽게 던졌던 한 마디.
이게, 도재희 유튜브의 시작이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7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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