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8)
78.
저녁 7시 30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전용 극장인 마제스티 극장에 들어섰다.
극장의 분위기는, 가스통 루르의 원작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정말 ‘오래된 극장’ 분위기.
생각보다 좁고 낡은 내부와 스산한 무대는 그 침침한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든다.
내 자리는 우측 중앙.
무대는 생각보다 폭이 좁았고, 그 무대를 내려다보며 3,4층의 오밀조밀한 객석에서 관람했다.
극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공연 중간에 ‘팬텀’이 객석 출입구에서 등장하는 장면 같은, 관객들이 깜짝 놀라 자지러지는 연출들은 흥미로웠다.
극장이 좁았기에 가능했으리라.
출연자는 바스티안 요셉과 미람다 라는 걸출한 뮤지컬 스타, 연기도 좋고 노래도 좋았지만.
… 뭐랄까.
“공연 어땠어요?”
공연이 끝나고 근처 펍(PUB)에서 만난 아리아나의 질문에 나는 곧바로 대답 하지 못했다.
“음, 좋았어요.”
그냥 어물쩡 둘러댔을 뿐이다.
왜 나는 웨스트엔드를 대표하는 프로들의 공연에서 ‘음악의 천사’를 찾지 못했을까.
오픈 런(OPEN RUN).
기간을 정해두지 않고 매일 매일 똑같은 공연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웨스트엔드 대부분의 공연이 오픈 런을 넘어 [전용> 극장의 형태를 취했다.
트리플 캐스팅이라고는 하지만, 배우들은 별다른 긴장감 없이 매일 똑같은 공연을 해야 한다. 몇 달을 그렇게 반복하다보면 처음 무대에 오르던 그 긴장감은 사라지고, 자연스럽게 권태로움에 빠질 수 있겠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오히려 내 앞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는 이들. 샘, 행거, 아리아나가 부르고 싸구려 앰프에서 나오던 노래가 훨씬 마음을 울렸다.
내가 물었다.
“오늘 버스킹은 어땠어요?”
조금 이른 저녁을 먹고, 이들과 헤어진 나는 공연을 보았고.
이들은 어제처럼 똑같이 피카딜리 서커스의 메인 스트릿에서 공연을 했다.
“죽여줬죠.”
아리아나가 입 꼬리를 올렸다.
연한 금발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아리아나가 무대에서 크리스틴을 연기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음, 훌륭한데.
나는 메고 있던 백 팩에서 프로그램 북 세권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샘, 행거, 아리아나에게 각각 하나 씩 건네주었다.
“여기요. 바스티안 요셉? 라울 역을 맡았던 배우 사인은 못 받았어요.”
뮤지컬 스타들의 사인이 그려진 프로그램 북이다.
스테이지 도어.
배우와 크루들이 드나드는 문인데,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은 이 스테이지 도어 앞에서 퇴근하는 배우들을 기다린다.
퇴근 준비를 마친 배우들이 이 문을 통해 나오면, 그 때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는 것.
나는 이들의 부탁을 받고 스테이지 도어 앞에서 영국 뮤지컬 스타들의 사인을 받아주었다.
사인을 해주기는 했지만, 받아 본 것은 처음이야.
조금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우와, 고마워요.”
아리아나가 환하게 웃어보였고 샘과 행거는 들떠서 펍이 떠나갈 듯 소리를 질렀다.
“고마워요 제이!”
이렇게 기뻐하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하하, 그냥 사인 받아준 것일 뿐인데 그렇게 기쁠까.
그 때, 샘이 내게 물었다.
“제이, 유럽 여행 중이라고 했죠?”
“네.”
“런던에 얼마나 머무나요?”
“사흘 후에 출국이에요. 프랑스로.”
“아, 그래요?”
그 질문을 끝으로 샘과 행거, 아리아나는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아주 음흉하게.
“….”
뭐지?
아리아나는 마치,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어린아이 같이 내게 물었다.
“그럼 내일 모레, 또 볼 수 있을까요?”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는 그 사이 푹 쉬고, 푹 마시고, 런던 이모저모를 돌아다녔다.
첫 여행지인 런던에서의 여행이 끝나기 하루 전 날.
런던의 ‘음악의 천사’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트라팔가 광장으로 향했다.
런던에서 여행 중 맑은 하늘을 보는 것은 축복이라고 했던가. 차갑지 않은 공기에 따스하기까지 한 햇빛. 감동 그 자체다.
나는 따뜻한 커피 네 잔을 들고 정오의 광장을 찾았다.
이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분주하게 무언가를 나르고 있는 사람들을 찾으면 되었으니까. 장비라고는 낡은 앰프 하나뿐이지만, 장비를 챙기고 마이크를 설치한다.
“어, 제이!”
샘이 나를 알아보고는 멀리서 손짓했다.
행거와 아리아나도 웃어 보인다.
뮤지컬 버스킹.
벌써 두 번이나 보았지만, 이들의 공연을 보고 있으면 활력을 얻는 기분이다.
나처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딘가에 ‘닿기 위해’ 연기하는 열정.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오히려 내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다.
“그럼, 시작할게요.”
곧 이어, 모든 준비를 끝낸 샘과 행거, 아리아나가 자세를 갖추었다.
의상도, 소품도 대충 망토 하나 두른 것이 전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관계없다는 듯,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한 장면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런던에서의, 아니- 이번 여행에서 내가 즐기는 마지막 공연.
하지만, 애석하게도 관객은 나뿐이었다.
광장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버스킹의 나라답게 이런 공연은 익숙하다는 듯, 저마다 바쁜 걸음을 재촉할 뿐이다.
“…”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연기하는 이들 역시 즐거울 텐데.
나는 사람들을 내가 대신 불러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였다.
“어? 도재희?”
“….”
방금 한국어가 들린 것 같은 기분은 내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야.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저를 아세요?’
아주 사무적인 미소로.
그러자 남자가 소리 질렀다.
“우아아아아악!”
“….”
까, 깜짝이야.
리액션이 너무 강하잖아. 사람들 다 쳐다보는데.
트라팔가 광장 한 복판에서 마주친 사람은 다름 아닌 한국인. 주변에는 외국인 친구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유학생정도로 보였다. 그는 매우 흥분한 듯 보였다.
“뭐지? 뭐야? 지금 촬영 중이에요?”
그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카메라를 찾는다. 하지만 카메라가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생길지도 모르겠어.
“왜 여기 계세요?!”
이렇게 자꾸 시끄럽게 굴면, 바로 SNS에 올라갈 것 같은데. ‘런던 시내 고성방가. 시끌벅적 한인들.’ 이런 제목 따위로 말이야.
“여행 왔어요.”
“으아! 대박, 여기서 연예인을 만나다니. 저는 유학생이거든요. 한국인.”
사실, 이제껏 동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한국인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없었는데.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여행의 묘미는 새로운 곳에서 마주하는 타인의 일상을 함께 공유하는 것.
단순히 푹 쉬고, 배부르게 먹는 것도 좋지만.
전혀 몰랐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주는 설레임도 존재한다.
“….”
아, 물론 나는 그 사람을 모르지만.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볼 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처럼.
“오-예쓰! 감사합니다. 헤이! 제이니! 여기 소개 할게. He is Actor!”
사진을 찍고 나자, 유학생은 주변의 외국인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코리안 탑 스타 베리베리 페이머스 탑스타! 코리안 톰 크루즈.”
“오! Really?”
너도 나도 휴대폰을 꺼내 나와 사진을 찍으려고 한다.
나는 어색하게 양 입 꼬리를 씰룩였다.
“….”
하하, 치이-즈.
그런데, 내 옆에 함께 서 있어준 유학생 친구들 덕분일까.
썰렁하기만 하던 뮤지컬 버스킹 주변의 기류가 변하기 시작했다.
“왜 모여 있지?”
“공연인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think of me”
“오페라의 유령인데?”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멜로디. 길거리에서 펼쳐진 격정적인 진풍경.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아리아나의 황홀한 목소리.
그리고 자신의 꿈을 위해 목청이 터져라 연기하는 배우들.
나는 저들을 바라보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마, 여행길에서 내가 느끼고 싶었던 기분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일종의, 환기.
그 동아 지친 내 일상을 벗어나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복잡한 상념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
그 동안 내 옆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단순히 이런 물리적인 것을 떠나서. 나는 항상 작품에 들어가 있었고, ‘작품’에 참여하는 수십 명의 스탭들은 ‘나’를 따라다녔다.
편의점을 갈 때도, 집 앞에서 술을 마실 때도.
온전히 나 혼자만이 짊어질 수 있는 ‘개인’의 무게와는 다른 너무나도 무겁고 막중한 책임감.
내 잘못은 곧, 작품 전체의 잘못이 되곤 하니까.
“우와.”
그러다 마주하게 된 오로지 나 ‘혼자’ 만의 생활.
새로운 곳에서 마주한 얼굴은- 생각보다 멀리 있는 타인이 얼굴이 아니었다.
내 얼굴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환하게 웃으며, 웃고 즐길 수 있다.
연기하고 있는 저들도.
보고 있는 나도.
나는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몰입했다.
“워우!”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내 모습에 한국인 유학생을 비롯한 관객들이 환호했고.
뮤지컬 갈라 쇼처럼 진행된, 짧은 단막극은 하이라이트인 ‘the pantom of the opera’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뚜- 뚜두두두두두둔- 뚜두두두둔-.
한국에서도 너무나 유명해, 전주만 짧게 들어도 알아차리는 그 음악.
뮤지컬의 본고장에서는 말해 뭐할까.
주변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저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마치, 미니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그 때였다.
무언가 내 손을 붕-! 잡아끄는 듯한, 느낌.
“어? 어, 어….!”
아리아나와 샘, 행거가 내게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자, 잠시만.”
그리고는, 나를 자기네들 쪽으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사람들 앞에 불려나간 나는, 두 팔을 크게 들어올렸다.
‘what?’
조금 과장된 액션. 하지만 뭘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같이 부르자고. 대사는 알잖아요?”
“아, 아니. 저 노래 못해요”
“그냥 같이 부르자고요.”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혔다.
“뭐지? 퍼포먼스인가?”
“아닌 것 같은데? 즉흥으로 불러낸 것 같은데?”
저마다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내 등장을 궁금해 하고 있다.
행거가 웃으며 마이크를 내게 건넸다.
“제이, 런던의 마지막을 즐기자고.”
“….”
아, 이 음악의 악동들.
나는 당황하며 양 손으로 이마를 감쌌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입 꼬리가 자꾸 위로 올라간다.
즐거워.
당황한 얼굴 뒤에 숨겨진 내 본심.
속으로 은근히, 즐겁게 연기하고 노래하는 저들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아이고, 이런.
공연 망쳐도 내 책임지지 말라고.
“저 진짜 노래, 못해요.”
“괜찮아요. 같이 불러요.”
나는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
‘런던 트라팔가, 코리안 뮤지컬 버스킹’
영상에는 세 명의 뮤지컬 배우와, 한 명의 동양인 남자가 다듬어지지 않은 뮤지컬 갈라 쇼를 선보이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게시자는 런던에 거주하는 한국인 유학생.
이 영상이 찍혔던 그 날.
뮤지컬 버스킹을 촬영하던 유학생이 배우들이 일제히 앞으로 나와 도재희를 데려가고 ‘즉흥적’으로 노래를 시작하자, 카메라는 도재희만을 집중했다.
“… 대박.”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동양인이 완벽한 영국 발음으로 노래를 부르자, 반응은 뜨거웠다.
노래에는 자신이 없는지, 처음에는 적당히 흥얼거리는 수준으로 시작하더니 시간이 조금 지날수록 무대에 빠르게 적응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폭발적인 가창력도 아니었고, 뛰어난 기교도 없었지만.
“와”
진솔함이 느껴졌다.
노래도 결국, 3분의 연기가 아니겠는가.
‘팬텀’을 연기한 행거는 도재희의 이런 의외의 모습에, 중간 부터는 마이크를 떼고 노래를 멈춤으로서 도재희에게 솔로를 맡기기도 했다.
노래 이외에도 워낙 즉흥적인 공연이라, 대사가 맞지 않는 장면들이 자주 연출되기는 했지만 이 모든 상황들이 ‘즉흥’ 이라는 것을 이해한 관객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분위기는 부드럽게 반전되었다.
무작정 영상을 찍긴 찍었지만, 절대 이를 혼자 소장할 생각이 없었던 유학생은 도재희에게 물었다.
“이거, 제 SNS에 올려도 되나요?”
도재희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누군가는 올리겠죠?”
유학생의 얼굴은 금세 밝아졌다.
“당연하죠.”
[ 책 먹는 배우님 – 7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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