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79)
79.
오래된 극장대신, 고풍스러운 런던의 거리를 배경삼아 연기하던 어딘가 어설픈 팬텀과 프리마돈나.
우리는 길거리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인근 술집에 들어섰다.
내가 맥주 네 잔과 감자튀김 값을 모두 결제하자 아리아나가 황급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오늘은 저희건 저희가 살게요.”
“괜찮아요.”
“아무리 그래도.. 매일 얻어먹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맥주 집도 알게 되었는걸요.”
그러자, 런던이 고향이라는 행거가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여기가, 현지인들 아니면 잘 모르는 곳이긴 하죠. 관광객들 코스와는 동떨어져 있으니까.”
런던이 맥주로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으나, 소호(SoHo)시내에서 조금 외곽에 위치한 Bell’s Beer의 수제 맥주 맛은 특별했다.
맥주의 풍미를 돋구어주는 하얀 거품의 부드러움이 일품.
멘솔향이 아주 살짝 나면서 알싸한 맛이 나기도 했는데, 짙은 풍미는 흑맥주 저리 가라다.
“공짜 술만큼 맛있는 술도 없죠. 제이가, 한국에서 유명한 스타라고 하니까. 감사히 얻어먹겠습니다. 으하하!”
혼자 하는 여행.
휴식과 낭만을 기대하고 떠난 여행이지만, 솔직히 조금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환경에서 지내왔으니까.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아무리 멋진 곳을 둘러보아도,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이 놀라운 인연.
맥주 몇 잔에 훌륭한 공연을 공짜로 보고 사람들 앞에서 가슴 뛰는 무대를 선보였는데 오히려 맥주로 퉁 치려니, 내 쪽이 더 미안하다고.
그 때, 아리아나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얼마나 유명한 거예요? 아까 그 한국인 학생이 엄청 반가워하던데.”
“오, 그러게? 샘이 에든버러 영화제에서 제이 얼굴을 본 게, 지난 7월 이니까… 아직 네 달 밖에 안 지났잖아? 제이, 말 좀 해봐요. 그렇게 유명했어요?”
“내가 말했잖아. 연기도 엄청 잘하고 유명하다니까? 맞죠, 제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이제 막 조금씩 찾아주시는 분들이 생겼을 뿐이지.”
“와, 그래도 대단한데?”
행거가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우리도 누가 좀 찾아줬으면 좋겠다.”
“하하.”
나는 확신한다.
당신들은 조만간,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컬 트리오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그럼, 당연하지.
가창력도 가창력이지만, 뮤지컬에 관심 없는 나 같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하는 걸.
그 때, 샘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아무래도 구글에 제이 검색해 봐야겠어. 뭐라고 검색해야 하지?”
“제이라고 치니까 안 나오네. 제이? 풀 네임이 뭐였죠?”
한 자 한 자 끊어서 스펠링도 함께 말해주었다.
“도재희.”
구글에 영어로 내 이름을 치면 뭐가 나올까.
나도 모르겠네.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던 아리아나의 눈이 커졌다.
“우와.”
“뭐야, 뭔데? 응?”
“이게 다 뭐야…?”
그러자 샘과 행거가 관심을 보였다.
간단한 약력.
국내의 독립스타상, 신인 연기상, 최우수 연기상, 베스트 커플 상.
뭐, 이런 것들을 떠나서 선댄스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심사위원들에게 극찬을 받았다는 내용이나. 한국에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의 주연이라는 사실들이 한국 기사를 인용하여 짤막하게 나와 있었다.
“정말? 이 정도라고?”
나를 제일 먼저 알아보았던 샘 역시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이, 이 정도로 대단한 사람일 줄은…미처 몰랐네…”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라는데?”
“정말?”
“…”
뭐, 확실히 [이선>을 통해서 인지도를 끌어올리긴 했으니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장르가 사극 아니겠는가.
“혹시, 유튜브에 검색해도 나올까? 연기 동영상 좀 보고 싶은데.”
내게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들은 어느새 유튜브에 올라가있는 [이선>의 예고편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뒤주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장면.
“Crazy man!!”
하긴, 사정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영조는 크레이지맨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펍에서 사극을 돌려보며 비명을 지르는 외국인들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광경인걸.
동영상을 다 보고 난 샘이 내게 물었다.
“제이, 어렵게 대하지 않아도 되죠?”
아이, 참.
샘, 얼굴이 화끈거리는 질문이라고.
“물론이죠.”
나라는 사람은 변한 게 없는 데 말이야.
그 때, 동영상을 확인하던 아리아나가 말했다.
“어? 근데 이건 뭐야? 트라팔가 버스킹?”
… 응?
유튜브에는 올린 지 2시간도 안된 ‘트라팔가 버스킹’ 동영상이 내 이름과 함께 올라가 있었다.
아마도, 그 유학인 학생이 올린 듯 했다.
조회 수는 고작 370회.
동영상을 돌려보던 샘, 행거, 아리아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동양에서 날아온, 이름 모를 스타와 함께 한 무대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이런 건 바로 트위터에 올려야지!”
“좋아 나도!”
저마다 SNS에 동영상을 공유하며 퍼 나르기 시작했다.
“근데 제이, 원래 뮤지컬 했던 건 아니죠?”
“전혀요.”
내 대답에 아리아나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
역시라니.
“노래 배운 느낌은 아니었지?”
“그렇지. 배운 티는 안 났지.”
“….”
고오맙다.
하지만 이들의 말은 마지막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정말 다시 보고 싶은 동영상이네요. 기교를 떠나서, 너무 완성도 높은 연기였어요.”
“맞아. 소름 돋는 가창력은 아니지만, 계속 보고 싶은 느낌. 음… 출발선에 서 있는 천재를 본 느낌이랄까?”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이 아니라. 심장을 울리는 노래였어요.”
심장을 울리는 노래라니.
그저 뮤지컬 배우 흉내만 내게 너무나 과한 극찬이다.
나는 어색함에.
“흠흠.”
헛기침을 하며 맥주잔으로 입을 가렸다.
하지만 입 꼬리는 자꾸만 올라간다.
목을 축이고 내가 말했다.
“오히려 당신들이 제 심장을 울렸어요. 안개 가득한 런던에서 뛸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그러자 아리아나가 아주 예쁜 얼굴로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제이.”
내가 말했다.
“건배 할까요?”
“좋아요. 뭘 위해서?”
“당신들의 웨스트엔드 빠른 데뷔를 위해.”
그러자 샘이 활기찬 목소리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제이의 즐거운 여행을 위해!”
챙!
두꺼운 맥주잔이 강하게 부딪혔다.
술잔을 털어 넣자, 아리아나가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 다음에 런던에 오면 여왕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는 우리를 볼 수 있을 거예요. 후후.”
강한 어조였지만, 다분히 장난기 가득한 말.
맞아.
나는 확신한다.
“물론이죠. 런던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보이는 포스터에 당신들 얼굴이 있기를 기대할게요. 그리고 말할게요. 아! 저들이 내 친구들이야 라고. 후후.”
아리아나가 감격이라도 한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 연락하고 지내도 되죠?”
“그럼요. 한국 들어가면 연락 할게요.”
취기는 전혀 들지 않는 멀쩡한 상태지만- 어딘가 기분이 몽롱해져 온다.
좋은데.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고 있다.
*
하지만 내 여행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던 내 런던 여행의 마지막은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나는 잠만 잤고. 숙소에서도 푹 휴식을 취했다.
프랑스에서의 여행의 목표는, 미식 탐방.
개선문을 구경하고, 세계 모든 관광객들이 그러하듯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식당에서는 전채 요리로 연어 테린을 먹었다.
손바닥만 한 커다란 연어 훈제구이를 칼과 포크로 썰어, 요거트 크림치즈 등에 찍어먹는 음식.
캐비어를 빵에 찍어 먹기도 하고, 메인으로 나온 스테이크 요리는 입에서 녹을 정도였다.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거리 미술가에게 내 캐리커쳐를 부탁하기도 했고.
“너무 마음에 들어요.”
이 캐리커쳐는 내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밤에는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고, 즉흥적으로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와인 바에 앉아 와인을 마셨다.
나는 파리가 주는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있었지만, 역시 내 입맛에는 소주가 맞다.
부글부글 라면사리가 들어간 돼지김치찌개에 시원한 소주가 생각나는 밤이다.
재익이 형에게 말하면, 또 촌스럽다고 놀리겠지만.
런던에서 미처 즐기지 못한 혼자만의 휴식은, TGV를 타고 스위스 바젤을 지나- 스위스 인터라켄에 도착해서도 계속되었다.
인터라켄.
‘호수의 사이’ 라는 지명의 유래에 어울리는, 호수와 알프스를 품은 아름다운 대휴양지.
눈으로 뒤덮여있는 알프스가 한 눈에 들어오고, 산과 들을 잇는 케이블카. 그 아래 펼쳐진 절경 같은 호수들.
산과 목장이 함께 한, 스위스 최대의 휴양지.
이곳에서 나는, 짧지만 충분한 휴식을 마치고- 내 여행의 마지막인, 이탈리아로 향했다.
유럽은 나라 사이를 기차로 운행한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있고, 위로는 경계에 가로막혀있는 한국에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스템.
스위스 슈피츠에서 내려 이탈레아 밀라노 행 기차로 환승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내가 구한 티켓은 총 4인 테이블에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고 앉는 좌석이었다.
1등석이라 좌석 간의 간격은 넓었지만, 전체적으로 열차 내부는 사람들로 빼곡한 느낌.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내 좌석 번호를 확인하고 객실로 들어섰다.
4인석 중, 이미 3명이 앉아있었다.
다부진 체격의 남자 두 명과, 스위스의 하얀 설산을 닮은 눈부신 백 금발에 까만 선글라스를 낀 여자 한 명.
어딘가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저, 실례합니다.”
내 등장에 통로 쪽에 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비켜주었고, 나는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어폰을 빼내며 눈인사를 건네며 웃어보였다.
하지만 반응은 묵묵부답.
나는 말없이 창가 쪽에 앉았고, 백금발의 여자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남자 둘은 마치 우리를 감싸듯 통로 쪽에 자리했다.
“….”
이제껏 기차 여행을 하며 마주했던 인연들과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선뜻 말을 걸기 힘든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남자들은 정장만 입지 않았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컴컴한 색의 점퍼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여자는 하늘하늘 거리는 원피스 위에 하얀 패딩 점퍼를 걸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었다.
음, 이런 그림을 어디서 보았더라.
아! 생각났다.
마치, 공주님을 호위하는 경호원이랄까?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이다.
“….”
여자는 키는 160cm가 될까 싶을 정도로 작은 체구지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다리를 꼬아 다리를 까딱, 까딱이는 모습.
그녀는 내 등장부터 나를 계속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정체가 뭘까.
하지만 나는, 이내 상상하기를 포기하고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이어폰이 꽂힌 귀에서는 Billy Crudup의 Sing Along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창 밖에서는 스위스가 마치, 짧은 필름영화 돌아가듯 사라지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맞이하게 될 이탈리아.
그 속에서의 여정을 속으로 상상하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려고 했는데.
“….”
눈이 떠졌다.
바로 지척에서 느껴진 인기척 때문.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휴대전화가 들려있었고. 휴대전화를 앞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나는 조금 놀라 몸을 뒤로 젖혔다.
… 뭐야.
휴대전화에서는 ‘내’ 동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런던 트라팔가 뮤지컬 버스킹.
그리고 여자는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슬쩍 내리며 말했다.
“도재희, 맞죠?”
그녀의 눈동자는 스위스의 브리엔츠 호수를 닮은 영롱한 푸른색이었고.
“트라팔가Trafalgar에 이 남자.”
유럽에서는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아주 유창한 미국식 영어 발음이었다.
[ 책 먹는 배우님 – 7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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