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
8.
십여 명의 배우들이 기다란 원형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사이드에 깔려있는 의자에는 제작부, 매니저, 연출부들이 앉아 대기했고 상석에는 감독님과 메인 작가님이 자리했다.
그 좌우에는 송문교와 소윤 주연 배우들이 자리했고 사이사이에 나를 포함한 조연들이 자리했다.
일종의 적막 같은 것이 깔려있었다.
오직, 보도 자료를 제출하기 위한 기자와, 메이킹 영상을 촬영하는 스텝만이 자리를 옮기며 조용한 리딩실의 분위기를 깼다.
햇빛이 잘 들어오는 통유리창이 눈이 부셨는지, 조연출이 창가 블라인드를 내리는 소리를 시작으로 문병철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그럼 리딩에 들어가기에 앞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들어 볼까요?”
오늘 리딩 하게 될 분량은 총 1회에서 4회.
말이 4회 분이지, 이 정도면 한 나절 이상은 걸릴 것이다.
“[청춘열차> 연출을 맡은 문병철입니다.”
문병철 감독님의 소개를 시작으로, 작가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이셨다.
“작가 김혜숙입니다. [청춘열차>는 저와 감독님이 밤새 고민하며 쓴 글입니다. 글로만 존재했던 캐릭터가, 여러분들을 통해 살아 움직일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작가님은 작은 체구에서 은근히 뿜어져 나오는 힘이 있으셨는데, 말씀도 참 단아하게 하신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소개들이 이어졌다.
“‘이우진’ 역할을 맡은 송문교입니다.”
“안녕하세요! 민소윤 역할을 맞은 소윤입니다! 작가님이 배려해주셔서 본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하무인 재벌 남 ‘김강혁’ 역할을 맡은 김균오입니다. 저는 다 필요 없고, 대사만 잘 외워서 가겠습니다.”
“하하하!”
센스 있는 김균오의 인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어쩐지 긴장된다.
CP님 까지 참석해계시는 중요한 자리다.
“‘김도훈’역할을 맡게 된 신인배우 도재희라고 합니다. 제가 가진 능력보다 더 큰 역할을 맡은 것 같습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겠습니다.”
굳이 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자 웃음 대신 박수가 터져 나왔다. 문병철 감독님 역시, 흐뭇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좋아요, 좋아.”
그렇게 배우들의 인사가 한 바퀴 돌아가고, 스텝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자기소개만 10분 넘게 진행될 만큼 많은 인원들이 있었고 나는 한 사람 한 사람 소개를 경청하며 귀 기울였다.
내가 그토록 바라던, ‘배우’로서 이 자리에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즐겼다.
“그럼 얼추 소개는 끝난 것 같은데… 리딩 시작해 볼까요?”
“먼저 1회 1씬 읽겠습니다.”
조연출이 지문을 읽기 시작했고, 1회 리딩이 시작되었다.
“2009년 봄.”
송문교, 소윤, 김균오가 오프닝으로 등장하며 열차를 타고, 화려했지만 나약했던 고교시절로 돌아간다.
국회의원 아버지를 둔 안하무인 고등학생 김강혁은 사고를 쳐도 풀려나기 일쑤다. 하지만 그에 반해 흙 수저에 가진 것이라고는 깡 밖에 없는 이우진은 그 죄를 모두 뒤집어쓴다.
두 남자 사이의 여고생 소윤. 그녀는 둘의 첫사랑 상대다.
“네 말대로 강혁이가 내 친구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을 지경이었지. 동네에서는 나를 건드는 사람도 없고, 비싼 오토바이 타고, 술 먹고 담배피우면 계집애들이 따라다니고. 완전 내 세상이었지. 근데 그거 알아?”
송문교가 내가 능력을 가지고 처음 뱉었던 대사를 시작했다. 1회의 하이라이트이자, 없는 자의 설움을 한껏 드러내는 중요한 장면.
“그 틈바구니에서도 나는 달랐어. 잘나가는 강혁이가 내 친구지만, 나는 애비 없는 후레자식에 시장에서 떡볶이 파는 미혼모의 아들이고, 스무 살이 된 지금. 동일 선상에 있는 줄만 알았던 김강혁이와 내가 사는 세상은 철저하게 다르다고.”
송문교의 감정 씬이 끝나자, 문병철 감독이 잠시 손을 들며 중지 사인을 보였다.
“음, 잠시 만요. 문교 씨. 조금만 더 감정을 숨기듯 해볼까요?”
리딩은 단순히 대사를 맞춰보는 자리가 아니다.
배역들이 품고 있는 색깔을 배우들이 얼마나 잘 소화할 수 있는지 검증하는 자리이며, 감독이 연출 방향과 캐릭터를 가이드 한다. 배우 입장에서는 대본에 의문이 있다면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촬영이 들어가기 전에, 모든 캐릭터 설정들에 대해 합의를 한다.
문병철 감독이 자신의 대사에 대해 지적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양인지, 송문교가 잠시 벙찐 얼굴로 감독님을 바라보며 물었다.
“…. 숨기라고요?”
“네. 지금 문교 씨는 감정을 너무 드러내고 있어요. 마치, 나 여기 있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명색에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하는 대사인데, 좀 더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야 하지 않을 까요?”
“…..”
송문교가 한 방 먹었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제대로.
그 자리에서 감독님에게 대들 배짱은 없는 지, 얼굴을 붉히며 다시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흐음.”
문병철 감독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모양이었지만, 일단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소윤의 연기는, 본인 모습 그대로였다. 어색하지 않고 깔끔하게 술술 넘긴다.
그에 반해, 김균오는 달랐다.
딱 생긴 만큼만 연기 해줬더라면, 올해 신인상은 김균오의 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연기가 부족했다.
“… 아.”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드라마 판에서 ‘인지도 캐스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서브 남주 라고하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나 김강혁이야. 잊었어?”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 매력적인 악당이자 서브 남주를 연기해야 하는데, 얼굴은 차가운데 대사가 너무 순박하다.
“흐음.”
문병철 감독 역시 탐탁치 않은 얼굴로 변했고 내 옆자리에 앉아계신 대 선배님들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정녕, 이것들에게 이 드라마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인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보였다.
나는 속으로 내 차례를 세어보았다. 나는 1회 마지막 장면에 등장한다.
송문교(이우진)의 집에 찾아가 술친구를 해주는 장면.
나는 내 앞의 선행대사를 조그맣게 읖조렸다. 대사가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다.
“씬 43. 우진 집. 우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소주에 마른 안주 따위를 질겅질겅 씹고 있다.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한 얼굴.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나는 조연출의 지문 설명에 맞춰.
콩콩콩.
테이블을 손톱으로 살짝 내리치며 말했다.
“우진아.”
내 대본은 덮여있었고, 대본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내 시선은 내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있는 송문교를 주시했다.
이건, 철저히 의도된 액션이다.
송문교는 내가 시선을 맞춰오자, 대본을 곁눈질로 훑으며 나와 눈을 마주하고 연기하기 시작했다.
“… 도훈이냐?”
“그래. 빨리 문 열어”
유치하지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이 세계는 누군가를 밟아야만 올라설 수 있는 세계니까.
송문교가 나를 밟았던 것처럼.
난 눈으로는 송문교를 노려보고, 입으로는 대사를 완벽하게 뱉어내며, 속으로는 소리쳤다.
‘대사 빨리 해.’
*
1회 리딩이 끝나니 1시간이 훌쩍 지나가있었다. 중간중간 감독님께서 코멘트를 덧붙이시면서 리딩을 끊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
“10분만 쉬겠습니다.”
문병철 감독님이 휴식 시간을 고했고, 10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10분의 휴식 시간에 문병철 감독님은 화장실 대신 내게 다가왔다.
“재희 씨 벌써 대사를 다 외웠어요?”
“네.”
“… 수정대본인데? 이렇게나 빨리?”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4회까지 다 외운 건 아니죠?”
“맞습니다.”
“…..”
“… 재희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독한 구석이 있네?”
그러자 이번에는, 내 옆 자리에 앉아있던 오미란 선배님이 장난스럽게 따져 물었다.
“재희 씨가 이러면… 꼭 우리는 열심히 안하는 것 같잖아요.”
“하하,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이거 말고 현재 하고 있는 작품이 없어서요. 하지만 저와는 다르게 선배님은 바쁘시지 않습니까?”
“홍홍, 그야 그렇지만.”
적당한 치켜세움에, 오미란 선배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왔다.
감독님도, CP님도, 스텝들도, 연기자들도 모두.
‘리딩 부터 대본을 외워온 준비성 철저한 배우.’
이것은 철저하게 내 자양분이 될 것이다.
“자! 감독님 담배 한 대 피우러 가시죠. 아 참, 재희라고 했나?”
“네 선배님.”
“연기 잘하던데? 담배는 피우나?”
“선배님이 가시면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으흫흫. 센스도 있고. 좋아, 한 대 피러 가자고.”
이 바닥이 좁은 건, 대한민국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다.
국내에서 잘 팔리던 배우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들어보지도 못한 신인이 어느 날 갑자기 방송 3사 전부에 얼굴을 비추는지.
결국, 모두 이런 사소한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미지 관리를 하지 못하는 배우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노리며 굶주린 수많은 루키들이 치고 올라온다.
물론, 흥행파워가 인성 따위는 압도해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적어도 송문교는 그 정도 ‘급’ 있는 배우는 아니다.
이 판의 주인공은 나였다.
이후의 2회 리딩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어, 어디였지? 죄, 죄송합니다. 대사를 놓쳤습니다…”
“10씬 24페이지 첫 번째 대사요. ‘네가 먼저 전화 안 받았잖아.’”
“…. 에?”
“지, 지금 또 안 보고 말했지?”
지문을 놓쳐 한참을 헤매는 조연출과 배우들에게 페이지 수 까지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은, 어쩌면 서커스에 가까운 묘기일 것이다.
“봐봐. 대본 아예 다른 페이지 펼쳐놨잖아. 듣기만 하면서 정확하게 흐름을 따라가는 거라고.”
소윤의 표정에는 공포가 깃들었다.
“무, 무서워.”
“… 대박. 이 정도면 그냥 돗자리 깔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균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허공만을 주시했다.
그렇지만 대사가 저절로 떠오르는 걸 어떻게?
자, 이번에는 내 차례.
나는 송문교의 눈을 똑바로 주시하며 말했다.
“야, 이우진. 건방떨지 마. 나 이제 네가 알던 내가 아니야.”
아주, 또렷하게.
“….. 너.”
그러자 송문교의 눈썹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먼저 외쳤다.
“아, 실수했네요. 대사가 이게 아니죠? 헷갈렸어요.”
“… 아하하, 그렇지?”
“재희 씨도 실수 하네. 좋아! 그런 인간적인 모습. 그럴 수 있지. 대본 천천히 보면서 하라고.”
고의적인 실수로 인간미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송문교의 속을 긁어놓는다.
대사라는 핑계, 그리고.
“야, 우진아. 아무래도 앞으로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널 바짝 쫓아가는 사람이 한 명 있거든.
“….”
연기라는 핑계로.
[ 책 먹는 배우님 – 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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