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1)
81.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 여행의 막바지.
두 가지,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
하나는 엘리나 오코너.
또 다른 하나는, 머나먼 땅에서 들려온 한국 소식.
[양치기 청년> 총 제작비 1억5천만 원.손익분기점 대략 12만 명.
홍보도 제대로 되지 않는 독립영화가 극장에 개봉하면 손익분기점의 20%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독립 영화는 일반 대중들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장르가 아니니까.
그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가 아무리 유명하더라도.
해외영화제에서 제 아무리 굵직한 상을 타고 귀국하더라도.
‘지루할 것 같은데?’
‘예술영화잖아.’
‘그런 영화가 있었어?’
대다수가 개봉 했는지도 모른 채, 영화는 극장에서 내려가고 만다.
물론, 뒤늦게 입소문을 타 VOD와 DVD로 역주행하거나, 극장에 다시 걸리며 재상영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극소수.
그런데 [양치기 청년>은 작지만 또 한 번의 기적을 더 연출했다.
– [양치기 청년> 손익분기점 돌파! 현재 13만 2천명! 축하한다. 재희!
로마에 도착하기 직전, 재익이 형으로부터 받은 기분 좋은 문자.
내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며 미소 짓자, 엘라니가 물었다.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음, 있죠.”
“뭔데요?”
으음.
“팝 스타 엘라니 오코너가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든 어딘가 어설픈 곡이, 예상치도 못하게 메가 히트를 쳤다면 어떨까요?”
내 질문에 엘라니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제 최고 히트곡이 처음 만든 곡인걸요?”
“….”
아, 그랬구나.
천재는 역시 다르구나.
하지만 엘라니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요. 그 영화 말이구나. 선댄스.”
“네, 맞아요.”
“잘 되었나 보네요?”
13만 2천명.
상업 영화에게는 초라한 숫자일 수는 있지만, 독립영화계에서는 ‘천만’이나 다름없는 유례를 찾기 힘든 스코어.
내가 그 어느 때보다 기쁜 이유는, 단순히 러닝개런티로 계약을 맺은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겨서가 아니다.
[양치기 청년>은 내 마음 속의 ‘집’과도 같은 영화다.조금 덜 익었을 무렵 찍었지만, 가장 늦게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영화.
내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
이 영화는 빠르게 ‘입 소문’을 타 대중들이 상영하는 극장을 찾아가서 보도록 만들고 있다.
아직, 스코어는 현재 진행형이다.
“축하해요. 재희”
기쁨은 나누면 두 배로 기쁘다고 했던가.
“고마워요. 엘라니.”
갑작스레 생긴 내 여행 메이트.
엘라니가 스케줄을 피해 도망친 선택이 옳은지 나쁜지에 대해서는 내가 왈가왈부 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그녀가 지는 것이니까.
그냥, 가볍게 생각하자.
로마를 잘 아는, 좋은 여행 친구가 생겼다고.
“후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로마에서 파파라치가 붙으면 나를 믿고 카메라를 부숴버려요.”
“… 에?”
“아니면, 셔터가 터지기 전에 파파라치 턱에 주먹을 꽂아버리던가.”
“….”
아니, 파파라치라고?
이러면 더 이상 좋은 여행 친구가 아니잖아.
엘라니가 헤벌쭉 웃으며 말했다.
“근데 없을 거예요. 보통 공항 주변에 숨어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쪽은 제가 전문이기도 하고요.”
“….”
아, 그러세요.
어느새 고속열차는 세 시간 만에 고속 이탈리아 서부를 관통해 로마 테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로마.
내 여행의 종착지.
지난 20일 간의 여정의 끝.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발칸반도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패딩 속을 헤집는다.
패딩 점퍼를 끝까지 올렸다.
그 사이, 엘라니가 내 짐을 거들어주겠다며 반대쪽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괜찮아요.”
“에이, 도와줄게요.”
“….”
그래봐야 티도 안 난다고요.
엘라니가 내게 물었다.
“근데, 숙소는 있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그럼요. 오늘 묵을 숙소는 예약해뒀죠.”
“저는 없어요.”
“….”
알아요. 도망쳤잖아.
“지갑은 있어요. 걱정 마요.”
엘라니는 새하얀 패딩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곤 헤벌쭉 웃으며 양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신난다!”
“….”
편해지면 한 없이 편해지는 스타일인가? 아니면 원래 천성이 낙천적인거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다 쳐다보잖아요.”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양쪽 다 말리고 싶다고.
*
테르미니 역에서 나보나 광장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다행히 엘라니가 묵을 1인실도 아슬아슬하게 예약할 수 있었다.
어둑어둑한 광장을 황홀하게 비추는 가로등.
주황빛 세상으로 물든- 조용한 나보나 광장을 가로질러 숙소 앞에 섰다.
C-Rough Hotel.
역사적인 건축물의 내부만 개조해 만든 5성급 호텔.
“식사 해야죠?”
“그래야죠.”
“짐만 풀고 바로 나와요. 아주 근사한 식당을 알고 있으니까.”
호텔은 전체적으로 화이트&베이지.
로마를 닮은 빈티지 하면서도 세련된 감각을 살렸다. 우드로 마감된 천장과 부드러운 목재 바닥은 따뜻한 느낌을 배로 만든다.
나는 간단하게 짐을 풀고, 윗옷을 갈아입고 패딩대신 코트를 걸치고 1층 로비로 나왔다.
벨벳 소재의 푹신한 쇼파에 앉아, 테이블에 올려진 여행 책자를 휘적휘적 넘겼다.
그러자.
“일찍 나왔네요.”
어느새 푹 눌러쓴 모자에, 마스크. 내가 빌려준 장갑에 목도리까지.
완벽하게 얼굴을 가린 엘라니 오코너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괜찮아요?”
161cm로 키는 작지만, 명품 브랜드에서 모델로 쓰고 싶어 난리라는 이유를 알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꾸미지 않아도, 스스로 빛을 뿜어낸다.
“뭐.”
내가 어물쩡 대답을 회피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엘라니가 내 코트 옷깃을 잡아끌었다.
“가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티칸의 밤거리.
나보나 광장의 가로등 아래에는, 돌담에 앉아 기타를 든 뮤지션들이 보였다.
그들은 신기하게도 엘라니의 [My Home>을 부르고 있었다. 엘라니 오코너의 얼굴은 몰라도.
그녀의 음악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라니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하나 뿐인 관객.
얼굴을 죄 감싼 이 여자가, 엘라니 오코너라는 사실을 알면 이 뮤지션들의 반응은 어떨까.
하지만, 영원히 모르겠지.
“와아”
엘라니는 노래가 끝나자 물개같이 박수를 치고는 기타 케이스에 지폐를 놓고는 말했다.
“이제 가죠.”
11월은 로마에서 비가 가장 자주 오는 날이다.
후두두두둑.
갑작스럽게 쏟아진 빗방울에 나는 이렇다 할 거리 분위기를 느끼지도 못한 채, 엘라니의 손에 이끌려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De Francesco.
11월의 빗방울을 막아 줄, 엘라니가 선택한 식당으로 들어선 우리는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고 자리에 앉았다.
모자와 마스크를 벗어도 얼굴이 보이지 않을 구석자리.
엘라니가 등을 돌리고 앉았다.
하우스 레드 와인 두 잔과, 문어 카르파치오, 트러플 파스타에 화덕피자까지.
하루 종일 기차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음식으로 씻어내듯 음식을 잔뜩 밀어 넣었다.
와, 여기 음식은 진짜다.
“어때요?”
엘라니는 양 볼 가득 음식을 밀어 넣으며 물어왔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음 짓자, 배시시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맛있다니까.”
배가 부르자, 새삼스럽게 지금 이 상황이 또 기이하게 느껴진다.
엘라니 오코너와 여행이라니.
버스킹도 즉흥이더니, 여행도 즉흥이다.
“재희, 내일은 어딜 갈 예정이에요?”
“글쎄요. 바티칸에도 둘러볼 곳이 많다고 하던데.”
“여기는 밤에 봐야 멋져요. 그러니까 식사 마치고 바로 가요.”
오늘?
피곤해서 바로 자려고 했지만, 눈을 빛내며 말하는 엘라니의 표정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내일 낮에는 역시, 스페인 광장에 가야겠죠? 꼭 가보세요.”
스페인 광장이라니.
본격적인 [로마의 휴일>이군.
“당연히 가야죠.”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조와 앤이 우연히 마주하듯.
우연이라는 끈이 만들어낸, 엘라니와의 동반 여행.
내가 물었다.
“근데, 정말 괜찮아요?”
“뭐가요?”
“휴대폰도 꺼놨잖아요. 다들 엄청 걱정 할 텐데.”
“괜찮아요. 그냥 다음 스케줄 맞춰 돌아가기만 하면 되요.”
“다음 스케줄은 뭔데요?”
“LA에서 OST 컨셉 미팅인데… 제가 총괄 아티스트를 맡았거든요.”
천재 싱어 송 라이터가 만드는 영화 음악이라…
그거, 근사한데.
“이거, 비밀이에요.”
입술에서 바람이 새어나왔다.
“푸! 물론이죠.”
엘라니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엄연히 따지자면, 지금도 일하는 중이라고요. 음… 악상을 떠올리는 거죠.”
“레드 와인에 트러플 파스타를 먹으면서?”
“정확해요.”
“푸흡”
그거, 좋은 핑계인데.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옷을 꽁꽁 싸매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새 그쳤지만, 한 차례 쏟아진 폭우에 광장에 있던 인파는 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더 좋지 뭐”
움직임에 비교적 ‘자유’가 생긴 엘라니가 앞장서 걸었고,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찰박찰박.
바닥에 고인 빗물이 기분이 좋다.
우리는 야경이 더 아름다운 천사의 다리를 지나- 테베레 강이 받치고 있는 천사의 성을 구경했다.
마치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아니, [로마의 휴일>속에 들어와 있는 듯- 아름다운 야경의 로마가 내 육감을 자극한다.
이어진 바티칸 광장까지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하지만 이따금씩 눈이 마주칠 때 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흡.”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좋아요.”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던 로마 여행 첫 날.
“즐거웠어요.”
“푹 자요. 피곤 할 텐데.”
바티칸의 야경을 눈에 품고 내가 숙소로 등을 돌리려는 찰나, 엘라니가 나를 불렀다.
“재희”
“네?”
“음악, 좋아해요?”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노래에는 재능이 없지만.
테크닉이 아니라, ‘진심’이 통한다는 것은 이번 런던 여행을 통해 느꼈다.
그러자, 엘라니는 입 꼬리를 아주 천천히 올리며 말했다.
“… 그래요?”
그리고 내게 인사를 남겼다.
“또 봐요.”
“….”
또 봐요?
보통, 내일 봐요 라고 인사하지 않나?
그래.
나는 이때부터 이미 이 ‘우연’의 결말을 예상했는지도 모른다.
아, 밀라노로 돌아가려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잘 자요.”
아무렇지 않게 웃었을 뿐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프런트에 맡겨진 내 장갑과 목도리, 모자와 한 통의 쪽지.
모두 엘라니가 내게 남긴 물건들이었다.
조금 예상했던 터라, 나는 덤덤하게 쪽지를 열었다.
쪽지에는.
– 또 봐요. 트라팔가에서 불렀던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졌으니까.
스케줄 때문에 밀라노로 돌아간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말은 그렇게 당돌하게 했지만, 하루짜리 ‘짧은 일탈’ 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우연의 끝은- 새로운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쪽지에 담긴 내용.
‘노래를 직접 들어보고 싶어졌으니까.’
내 노래를 들어보고 싶다고?
어떤 방법으로?
그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어젯밤 De Francesco에서 나누었던 대화.
“….”
에이, 그럴 리가.
나는 쪽지를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음악 영화라….”
ⓒ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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