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2)
82.
자신이 쓰게 될 곡에 대한 아티스트의 자부심.
아무에게나 자신의 곡을 주고 싶지 않은 엘라니 오코너의 고집은 꽤나 진지했다.
‘다시 들어보고 싶어.’
도재희가 노래를 부른 그 짧은 순간에, 말로 쉽게 형용할 수 없는 힘이 자신의 시선을 훔쳤으니까.
그런데, 열차에서 우연히 마주했다.
우연이라고 단순히 치부하기엔, 너무 극적인 순간.
우연이 ‘인연’으로 바뀌던 순간.
그렇기에 무작정 로마로 동행 했다.
‘내일 아침 까지는 돌아올게요.’
문자 하나만 남기고.
좋은 ‘자극’이 될 것 같았다.
지지부진하게 막히던 곡 작업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소용돌이치며 ‘영감’이 되어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다시 만나고 싶다는 ‘확신’
로마 발, 밀라노 행 마지막 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엘라니 오코너는 계속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
이상하다.
왜, 아쉬운 걸까.
입은 마스크로 가리고 있지만 눈가의 미소까지 숨기지 못했다.
‘으음’
좋은 곡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또 하나 더.
그에게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
음악 영화.
그래, 다 좋다.
하지만 동양인이 주인공인 미국식 음악 영화는 들어본 적도 없다.
한인 타운에 사는 촌스러운 옷을 입고 아코디언이나 부는 캐릭터가 머릿속에 스쳤고.
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을 떨쳐냈다.
‘일 생각은 하지 말자.’
나는, 아주 찰나의 꿈처럼 지나간 엘라니 오코너와의 하루를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로마의 마지막을 즐겼다.
바티칸의 새로운 아침을.
스페인 광장에서는 정오의 브런치를.
트레비 분수에서는 느지막한 저녁을.
그리고 지금.
“즐거운 여행 되셨습니까?”
레오나르도다빈치공항에서, 20일 가량의 짧지만 길었던 내 여행의 종지부를 찍었다.
“아주, 좋았어요.”
– 시간 맞춰서 공항에 나가 있을게.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춰 기다리겠다는 재익이 형의 문자와 회사에서 업그레이드시켜 보내준, 퍼스트 클래스 티켓.
완벽하다.
나는 길게 늘어선 탑승 줄을 프리패스하고 브릿지를 통과했다. 이코노미와는 전혀 다른 좌석 구조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지만.
“안내 도와드리겠습니다.”
능숙한 승무원의 안내에 나는 조용히 따라 걸었다.
디귿자 모양의 널찍한 객실 구조. 객실 의자 옆에 딸린 개인 침대. 승무원이 침구류를 깔아주고, 음식은 그 어느 레스토랑 부럽지 않는 만찬이 나온다.
“편안히 모시겠습니다.”
부조종사가 퍼스트 클래스 승객들에게 하나하나 인사하기까지 했다.
우와, 정말 괜히 퍼스트 클래스가 하늘 위에 떠 있는 호텔이라고 괜히 하는 말이 아니구나.
역시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쓴다고, 가끔 이런 것도 경험하는 것도 좋구나.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중 가장 반가웠던 점은.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십니까?”
런던 이후에 들을 일이 없었던,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
나는 승무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방긋.
승무원이 사라지고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흘러가는 구름을 쫓아-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
퍼스트 클래스도, 생각보다 비행기 소음이 심하구나.
나는 귀에 이어폰을 꼈다.
그리고 엘라니 오코너의 [My Home>이 흘러나왔다.
♪Take me home.
♪Now get back to normal.
집으로 데려가요.
일상으로 돌아가요.
눈을 감으니, 지난 여행이 찬찬히 흘러간다.
약간의 호기심과, 음악의 천사들에게 취해 섰던 짧은 버스킹 무대, 파리와 스위스에서의 휴식들. 엘라니 오코너와의 짧지만 강렬했단 인연.
창밖의 구름들과, 비행기의 소음. 감미로운 엘라니 오코너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졌고.
이내 누군가 내 인생에 BGM이라도 튼 것 같은 감성적인 기분으로 변했다.
음악과 현실이 만나 기분이 둥둥 떠오른다.
이 순간의 OST.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 한 가지.
인생에는 배경음악이 깔리지 않는다.
*
그래.
인생에는 음악이 깔리지 않고, 내 인생을 극대화 시켜줄 그 어떤 장치도 없다.
나는 지난 20여 일 간의 환상적인 여행에 잠시 취해있었지만.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는 지금 이 순간.
언제나 똑같은 ‘현실’을 마주한다.
12시간을 넘어가는 기나긴 비행의 끝.
기내를 빠져 나오자마자, 게이트 앞에 서있던 재익이 형은 한 눈에 나를 알아보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이야! 재희!”
“억, 숨 막혀요. 잘 지내셨죠?”
“그럼! 어디 다친 데는 없지?”
“당연하죠.”
“아, 다행이다!”
아무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간단한 안부인사가 끝나고 재익이 형은 내 캐리어를 잡아 끌더니, 곧 바로 회사와 통화를 시작했다.
“네, 지금 만났어요. 일단 픽업해서 오늘은 쉬게 하고. 네네, 시놉시스만 집에 놓고 오려고요.”
그리고 내 쪽을 돌아보며, 픽 웃었다.
“얼굴 좋아 보이는데요? 네네. 여자라도 만나고 온 건가? 꽃이 폈어요. 에이, 그걸 묻는다고 말하겠어요? 큭큭. 일단, 며칠은 쉬게 해야죠.”
“….”
귀신인가.
그 여자가 그 여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전화를 끊은 뒤, 재익이 형이 나를 보며 말했다.
“피곤하지? 한국 들어오자마자 미안한데, 일 얘기 좀 해야겠다. 쌓인 게 한 두 개가 아냐.”
내가 이어폰을 빼고 마주한 현실은.
도착과 동시에 쏟아지는 ‘일’ 이다.
우리는 짐을 차에 실고 뒷좌석에 앉았다.
재익이 형은 조수석에서 노트 하나를 가지고 오더니, 노트를 점검하며 곧 바로 ‘현황 보고’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꺼낸 단어는 ‘뮤지컬.’
“뮤지컬 들어왔어. 너, 그 런던 유튜브 동영상 때문에…”
여행 중에 젊은 동양인 남자가 즉흥적으로 끼어들었는데 그게 알고 보니 한국의 유명 배우였다. 버스킹이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요즘.
외국인들과 아티스트들의 호기심을 꽤 자극하는 듯 했다.
동영상이 불어 닥친 태풍은 멈췄으나, 여진은 남아있다.
여전히 소폭 조회 수가 상승하며 세계를 떠돌아다니는데, 반응은 아직 뜨겁다.
“원래 뮤지컬에 관심 있었어?”
“아뇨.”
“그럼 왜 한거야?”
“음, 분위기에 취해서?”
“그 덕분에 난리야 지금. 흐흐. 뮤지컬 컴퍼니 몇 곳에서 접촉해왔는데… 단순히 분위기 때문이 아냐. 뮤지컬 차세대 스타가 되네, 어쩌네. 어떻게 할까?”
“글쎄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래하는 재미를 알긴 했지만, 뮤지컬은 좀…”
재익이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기각”이라고 중얼거리고는 빨간 줄을 죽- 그었다.
뮤지컬은 내 일정에서 사라졌다.
“다음은, 당장 소화해야 할 일정들.”
12월에 내가 소화할 일정들은 많다.
“소아암 관련 영화인 후원모임 있고. SAFA 측에서 연말영화전(展) 여는데 참석해줄 수 있냐고 하고… 또 지방에는…”
이런, 하루짜리 영화 관련 행사일정들을 제외하더라도.
박진우 연출이 메이저 데뷔작을 내게 제안해 왔기에 이를 확인해야 했고. 나를 섭외하기 위해 술자리를 만들려는 감독들도 대기 중이다.
무대만 드라마에서 영화로 바뀌었지, 캐스팅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일단 시놉 읽고, 괜찮은 작품들 순서대로 미팅하도록 하죠.”
“오케이, 그건 그렇게 하고… 다음은 시상식.”
시상식.
올 한해를 마무리하고 내년을 위해 도약할 연말 ‘정산’이 남았다.
“일단, TV-K 어워드에서는 대상 후보야. 너랑, 양익찬 배우랑 뭐 기타 등등 있는데… 거두절미하고 네가 유력해.”
벌써부터 후보가 누구네, 따 놓은 당상이네, 같은 얘기들로 시끌시끌하다.
“시상식 전에 확실히 언질이 올 것 같은데, 들리는 소문에는 너가 100% 확실하니까 수상 소감 준비하면 되고. 다음은, 대종상”
대종상.
[양치기 청년>과 [이선>.모두가 대종상 후보에 올랐다.
이 역시 수상은 확실하다. 상을 몇 개 받느냐가 관건일 뿐.
그나저나 12시간을 날아온 직후, 연달아 날아드는 일 얘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일단, 알겠어요.”
내가 약간 피곤한 기색을 비치자, 재익이 형이 한 마디 툭 던졌다.
“[양치기 청년> 47만 넘었다.”
이건, 지친 나를 벌떡 일으킬 수 있는 효과만점의 에너지드링크였다.
“예?”
나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불과 며칠 전, 13만 명 넘겼다고 좋아했잖아.
그런데 고작 며칠 만에? 어떻게?
“상영관을 대폭 늘렸어. 이거 이제, 역사야 역사.”
전국 8개 상영관에서 시작한 영화가, 개봉 20일 만에 상영관이 전국적으로 대폭 늘어났다.
기껏해야 2-3만.
흥행작은 5만 명 언저리.
10만 명을 넘긴 독립영화는 손에 꼽을 수준에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 VOD판매 수익에 기대야 하는 현실.
47만이라는 스코어는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다.
그런데 이 역시 현재진행형.
“총 예상 관객은 이제 짐작하기도 힘들어. 입소문을 계속 타고 있으니까. 반응이 불붙듯 이어져서 극장에도 꽤 오래 걸릴 것 같고.”
물론, 290만 관객을 동원한 독립영화의 전설 [워낭소리>가 있지만, 박진우 연출은 전무후무한 독립영화의 역사를 만들며 이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총 예상 관객은, 어쩌면 300만이 넘을지도 모른다.
“다 네 이름 값 때문이지. 박진우 연출이 머리를 잘 쓴 것도 있고. 만약 작년에 일반 개봉했으면, 이런 성적 안 나왔을 거야.”
‘서독제’를 통해 영화가 처음 공개되고 지금 극장에 걸리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 사이, 영화는 세계를 돌아 이름을 알렸고.
나는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국내 팬들에게 입지를 확실히 쌓았다.
감독과 배우가 지난 1년 사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기에 가능한 일.
거기다.
“이거, 러닝 개런티잖아.”
“…”
아, 러닝개런티로 계약했지.
“이거 수익 계산하면 진짜… 어후…”
재익이 형은 계산하기를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47만 명에,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관객 1인당 150원에 계약했으니, 손익분기점을 최대 10만 명으로 잡는다고 치더라도. 대체 얼마야.
모르긴 몰라도 이 기세로 가다가는 [이선>에 출연했던 내 개런티를 훌쩍 넘을 것이다.
“….”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가 갈라지고, 쏟아진 무수히 많은 금은보화들.
이것으로 박진우 연출은, [양치기 청년>의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며, 차기작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안게 되었다.
이건,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고민이 깊어진다.
계속해서 오르고 있는 기세를 어떻게 유지하면 좋을까.
어떤 작품을 선택해야, 안정적으로 계속해서 커리어를 끌어올릴 수 있을까.
“좋은 작품 있어요?”
내 질문에 재익이 형이 조수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부터 찾아야지.”
조수석 아래 박스에는 가대본이며, 시놉시스가 잔뜩 쌓여있었다.
“같이 찾아보자.”
시놉시스와의 싸움이구나.
“읏차!”
나는 기지개를 쭉 키며 의자에 몸을 기대 눕고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는 않았지만, 들뜬 기분을 누르고자 억지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번져오는 웃음기에 또 다시 눈을 떴다.
“왜 웃어?”
“음, 이제야 집에 온 것 같아서요.”
이렇게 기대 누워있으니, 이제야 집에 왔다는 포근한 느낌이 든다. 내 [My Home>이 고작, 네발로 굴러가는 리무진 밴이었다니.
“그래. 집에 왔으니까 푹 쉬어.”
집.
눈을 감자 촛불이 켜지듯 또 다시 머릿속에서 음악이 켜진다.
아주 천천히 시동을 거는 재즈의 인트로.
이번에는 어떤 작품이 내 삶에 BGM을 켜줄까.
확실한 것은.
머리가 아주 맑아졌다는 것이다.
지금 기분으로는, 그 어떤 작품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색다른 환경이라도.
[ 책 먹는 배우님 – 82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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