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6)
86.
이십 대 중반.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조금 날것 그대로 표현하자면, 카페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생으로 볼 법한 선한 인상의 얼굴.
일반인치고는 그럭저럭 예쁘지만, 그렇다고 수수한 것이 매력이라고 할 수 없는 얼굴.
즉, 비주얼에 강점이 있는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이름이, 하윤? 본명 인가요?”
“네. 본명입니다. 외자.”
하윤.
내가 프로필에 동그라미 친 여자다.
동그라미 친 이유는, 프로필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다양한 단편영화를 수십 편 넘게 찍었다는 점.
“소속된 회사는 없나보군요.”
“네, 혼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척스럽고, 힘들게 연기를 했는지는 프로필을 보면 알 수 있다.
학생들이 만드는 일당 3만원에서 5만 원짜리 단편영화.
그런 작은 작품마저도, 경쟁률은 200:1에 가깝다.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1초.
그 1초를 각인시키기 위해, 지독한 무명시절을 걷는다.
이 여자, 정말 가리지 않고 작품을 하러 다녔다.
몇 년 간, 영화에 미친 것처럼.
또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프로필 사진을 억지로 꾸미지 않았다는 것.
‘에?’
‘어라?’
‘음, 사진은 몇 년 전에 찍으신 건가요?’
프로필 사진을 보고 기대했다가, 실물은 완전히 다른 배우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던가.
잘생기고 예쁜 프로필 사진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강점을 어필 하는 것이 중요한데.
하윤이라는 배우는, 그런 부분에서는 일절 꾸밈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수수함이 배역과 배우의 접점을 스파크 튀듯 일으키며 와 닿게 한다.
나는 속으로 간절하게 외쳤다.
제발, 연기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박진우 연출 역시 기대감을 잔뜩 품은 채, 웃으며 말했다.
“그럼, 준비되시면 시작해주세요.”
그러자 하윤이 쭈뼛거리며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네?”
“서, 선배님이 ‘강준’ 대사 한 마디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강준’은 내 역할이다.
오디션 중에 대사와 지문을 요구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러자 하윤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영광입니다.”
“장면 17 준비하셨나 보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박진우 연출이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17 강준의 집. 강준. 허망한 얼굴로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바라보며 울먹인다.”
지문이 끝나자마자, 내 시야가 완벽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정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더니, 정확히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 딱, 거기까지 휘몰아친다.
“….”
내 호흡이 거칠어지자, 박진우 남은 지문을 읽었다.
“강준의 나레이션.”
“어느새, 내가 누나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
7년.
그 시간동안 죽은 누나보다 나이를 더 먹은 나.
어려진 누나에 대한 괴리감.
복잡한 상념들이 머릿속을 얽매고.
“#17-1. 인서트 컷. 좋았던 시절. 누나와의 추억들이 짧은 일기 형식으로 지나간다. #17-2 동짓날에 팥죽을 나눠먹던 일. #17-3 초콜릿 따위를 숨겨 챙겨주던 일. #17-4 대학에 붙었을 때, 자랑스러워하던 누나.”
“이제 다 컸네, 우리 동생.”
하윤의 대사 한 마디가 나를 울린다.
나는 그런 하윤을 똑바로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르고 애써 웃음 지었다.
“쳇, 고작 네 살 밖에 차이 안 나면서.”
“내가 너 엎어 키웠어. 후후.”
하윤이 쓰게 웃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대사지만, 또 다시 심장을 울린다.
누나도 동생도 없는 내가, 이 순간에 완벽히 몰입한 순간.
“우리 동생, 한국 대에 떡하니 붙었으니 약속대로 누나가 열심히 일 해야겠네.”
하윤이라는 배우와 내 연기가 제법 물 흐르듯이 어우러진다.
“#18 강준의 집. 상상에서 빠져나오는 강준…..”
“….”
몇 줄 되지 않는 대사지만.
박진우 연출은 지문을 읽으면서도 하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하윤에게는, 기성 배우들 못지않은 신선함과 ‘힘’이 있었다.
수수한 얼굴은 오히려 장점이 되었고. 그녀의 얼굴은 계속해서 보고 싶게 만드는 매력으로까지 느껴진다.
연기가 끝나자, 하윤이 눈가의 눈물을 닦아내며 부끄러운 듯 크게 호흡을 뱉었다.
“후-!”
“잘 하시는데요?”
내 칭찬에 하윤이 잠시 코를 훌쩍이더니,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헝클이며 말했다.
“선배님이 도와주셔서 그렇습니다.”
예의도 바르다.
나는 재차 물었다.
“그 정도가 아니던걸요? 프로필에는 고졸로 나와 있는데, 따로 전공을 하신 건가요?”
“실은, 연극영화과를 중퇴하고 대학로에서 연극만하다가….. 2년 쯤 전부터 단편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인연이 닿아서 독립 영화 몇 작품… 거기서 많이 배웠습니다.”
“2년 동안, 이 많은 작품을 다 했다고요?”
“네.”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죄다 지원하면서 쉼 없이 본인을 채찍질했음이 틀림없다.
박진우 연출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연극을 하시다 영화를 시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 들을 수 있을까요?”
하윤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진부한 얘기처럼 들리시겠지만… 딱, 재작년 10월. 서울독립영화제에 우연한 기회에 가게 되어서…”
서울 독립영화제.
그리고 독립스타 상. [양치기 청년>
하윤은 멋쩍게 웃었다.
“감독님과 도 배우님의 팬입니다. 사실, 여기에 이렇게 서 있는 것도 영광입니다.”
[양치기 청년>의 발랄함과 세상을 향해 던지는 유쾌한 주먹은, 가난한 연극쟁이의 인생을 바꾸었다.자기도, 저들 대열에서 함께 뛰어가고 싶다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자기 인생이 싸구려 변두리가 아니라는 믿음을 주었다.
“아, 하하…”
“거기서 보셨구나.”
나와 박진우 연출이 서로 마주보며 미소 지었다.
미소의 의미는 명확했다.
‘찾았네요.’
‘그렇네요.’
좋은 배우를 보면, 우리의 눈은 뜨겁게 빛난다.
그 때, 하윤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하윤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도재희 선배님.. 패, 팬 카페… 회원입니다…”
“네?”
“서, 성실회원….”
“….”
아. 그랬어?
하윤이 모기가 기어갈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졌다.”
“예?”
“도, 도졌다…”
도재희를 보면 무조건 외친다는 내 팬들의 버릇과도 같은 습관.
“….”
난데없이 날아든 팬밍아웃에 나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박진우 연출이 배를 잡으며 깔깔 웃었다.
“으하하! 이런 걸, 성공한 덕후라고 말하나요? 우상과 연기를 하다니!”
“성실회원이면 댓글수가 1,000개가 넘어야 할 텐데… 대단하네요.”
내 말에 하윤이 배시시 웃었다.
“헤헤…”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여하튼 그 모습이 꽤나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나는 박진우 연출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 뜻은.
‘전 좋아요.’
박진우 연출 역시,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잘 보았습니다. 조만간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사진 빨에 속고. 회사 이름에 속았던 오디션 경쟁.
살아남는 배우는 딱 한 명.
다른 조단역급 배우들은 나와 박진우 연출이 의견이 종종 갈리긴 했지만.
주연 배우는 하나로 통일되었다.
“하윤. 어떠세요?”
“감독님 뜻이 제 뜻이죠.”
여자 주연은, 아무도 모르는 무명 배우로 결정.
“감독님, 겁 안 나세요?”
일각에서는 영화사 [너울>의 미래를 책임질 작품에 신인 여주인공을 뽑은 결정이 너무 무모하지 않느냐, 라는 의견이 있었기에 내가 장난스레 물었다.
이런 경우는,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정말 특별한 경우니까.
하지만 박진우 연출이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도 배우님도 봐서 아시잖아요.”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공감했다.
“알죠.”
안다.
웬만한 기성 배우들 보다, 훨씬 강력한 에너지를 가진 배우라는 것을.
그리고 박진우 연출이 말한 ‘신선한 신인’의 얼굴로 완벽히 각인될 것이라는 것도.
박진우 연출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후후… 그나저나 도 배우님이야 말로 겁 안 나세요?”
“무슨 겁이요?”
“성실회원인데? 현장에서 도 배우님 잠자는 사진 몰래 찍어서 팬 카페에 올리면 어떡해요?”
“….”
에이,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내 의견을 반영한, 박진우 연출의 조단역 오디션이 끝나고 주연 배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를 포함한 주연 배우들은 오디션 과정 따위 없이, 감독의 간곡한 ‘요청’으로 이루어진다.
‘제 작품에 출연해 주십시오!’
감독은 당연히 시나리오를 집필할 당시부터 머릿속에 넣어두었던 배우가 있을 것이다.
대다수가, 인지도며 연기력이며 모두를 인정받는 명품배우들.
나 역시, 섭외 후보가 누구인지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박진우 연출이 말했다.
“섭외에 성공한 선배님들은 이렇습니다.”
살인자 역할에는 설강식.
아버지 역할에는 여호석.
대한민국 영화계에서 연기파 배우를 꼽으라면 절대 빠지지 않는 거물들.
“… 정말요?”
천만 배우임은 당연하고 믿고 보는 배우로 이미지 좋고, 연기 잘하고, 후배들에게 존경을 받는 40-50대 배우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100% 맞아떨어진다.
조승희가 30대를 대표하는 스타라면 이들은, 연령을 통틀어 배우들의 ‘배우’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스크린을 통해 보아오던 한국 영화의 자존심들.
젊은 배우들의 롤 모델.
10년, 20년 뒤 저렇게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 역대급 라인업.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오히려 담담해졌다.
“정말 설강식, 여호석 선배님들이 참여 하십니까?”
“네. 확답을 받았습니다.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
운이 좋았다고?
아니, 이건 단순한 운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니다.
“제가 완전 신입 문화부 기자 시절에 두 선배님과 인연이 닿았었는데… 아직 저를 기억해주시더라고요.”
그래.
박진우 연출은 분명, 영화의 끈에 묶여있는 인생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7년의 기억> [92/100](+7)내 눈에만 보이는 영화의 성적.
아무래도, 2020년에는 잘 풀릴 모양이다.
“특히, 설강식 선배님은 도 배우님이 참여한다고 하니 흥미를 보이시더라고요. 도대체 어떤 배우 길래, 후배들에게 그렇게 소문이 자자한지 많이 궁금해 하셨습니다.”
“… 후배들이요?”
후배들에게 자자한 소문?
어떤 후배들 말씀하시는 거지?
그 때, 재익이 형이 내게 말했다.
“재희야, 잠시 괜찮아?”
*
재익이 형이 내게 말한 것은, 프로그램 섭외 의뢰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설강식 선배님이 나를 언급하며 부연하듯 말했던 ‘후배들’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다.
KTN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
제목은 [배우로 가는 길>.
‘단역 배우’들의 삶을 맨투맨 취재 형식으로 찍어, 신년 특집으로 내보내는 스페셜 다큐.
촬영은 이미 마쳤고, 무수히 많은 신인배우, 단역 배우들을 취재하며 가편집 까지 모두 끝난 상태다.
“인터뷰만 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지.”
“이미 가편집도 끝났다면서요.”
“인터뷰는 따로 추가로 촬영할 거고, 나레이션이 들어온 거야.”
이 다큐멘터리 팀에서 내게 한 요청은. ‘나레이션’.
그 이유는.
“네가 단역, 신인 배우들에게 닮고 싶은 배우 1위로 뽑혔어.”
“네? 제가요?”
“응. 인터뷰에서도 네 얘기가 제일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 대단하다고. 닮고 싶다고.”
“….”
대학, 연극, 기획사. 그리고 3년의 무명 기간.
내 무명 경력이 힘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10년, 20년. 인고의 기나긴 세월이 지나 결실은 맺은. 나 보다 더 힘든 배우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국내에 이런 속도로 치고 올라온 배우가 없잖아.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일종의, 무명배우의 신화 같은 셈이지.”
“….”
돈 없고, 빽 없는 배우 지망생의 홀로서기.
저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성공을 누리고 있는 나.
내가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나 역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재익이 형은 이미 반쯤 마음이 기운 것 같았다.
“이런 건 이미지에 괜찮을 것 같아. 굳이 돈 때문이 아니라도… 뭐랄까…”
나는 재익이 형의 말을 잘라내며 단번에 대답했다.
“할게요.”
“정말?”
이건, 돈 때문도 아니고. 이미지 때문도 아니다.
일종의 마음의 빚이랄까.
그냥, 하고 싶다.
[ 책 먹는 배우님 – 86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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