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7)
87.
KTN 본관 9층의 다큐멘터리 사무실.
조그만 녹음실에 마이크를 두고, LCD모니터를 통해 부조정실에서 틀어준 영상을 감상했다.
가편집된 영상에서는, 이름 모를 단역배우들의 ‘일상’이 담겨있었다.
나는 흘러가는 영상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살짝 촉촉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배우, 도재희입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대본을 참고하여, 내 진솔한 감정을 털어놓고 시작했다.
추운 겨울, 촬영에 임하다 동상에 걸리는 동영상을 보며.
“배우는 기다림의 직업이라고 하죠. 추운 날씨에 밖에서 촬영하다보면, 체온관리가 정말 어렵습니다. 매니저도 없이 혼자 챙기려면 정말 버겁죠.”
하루 여덟 시간을 밖에서 기다리다 고작 5분 만에 촬영을 끝나는 일도 종종 있고.
“워낙 이 일이 탄력적이다 보니, 새벽 늦게 끝나는 경우도 많거든요. 저 기분 잘 알지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도 경찰1 조폭3처럼, 숫자로 불리는 ‘무명 배우’의 삶.
“저 때는, 대본에 적혀있는 이름 하나가 참으로, 소중합니다.”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대변했다.
영상 속 인터뷰를 한 배우들 중에는, 나와 같은 작품에 출연했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단역 배우도 있었다.
– “한만희 감독님의 [피셔>라는 영화에 보험사 직원1로 참여했었습니다. 조승희, 도재희 같은 배우들이 뿜어내는 에너지, 저들은 어떻게 연기하는지… 또 촬영장을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이런 것들을 보면서 느꼈지요. 아, 촬영장에서 물리적인 거리는 저와 고작 한 발자국이지만. 실제로는 너무나 먼발치에 있구나. 많이 배워야겠다.”
저 사람이, 누군지 나는 기억한다.
극장에 개봉된 [피셔>에 얼굴은 고작 3초가량 나온 배우.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단역 배우로 일하고 있는 모양이다.
Q. 기억에 남는 촬영장 에피소드는 뭐가 있는지?
– “도재희 배우님이요. 고생했다고. 연기 너무 좋았다고. 다음에 또 보자고. 그런 말을 해주신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많은 힘이 되었죠. 사실, 저희들에게 가장 힘이 되는 일은 그런 거거든요. 한 명의 배우로서 인정받는 느낌? 빠르게 성공을 거두셨는데, 저한테까지 고개 숙이며 인사하시더라고요. 감동이었죠.”
Q. 롤 모델로 삼고 싶은 배우가 있다면?
– “도재희? 도재희 같은 배우님은, 불과 3, 4년 전 만해도, 아무도 모르던 배우였잖아요. 이미지 단역으로 아침드라마 몇 번 나간 게 전부인… 그런데 대단하죠. 2년 남짓한 시간 만에 배우로서 능력들을 다 보여주고 있잖아요.”
유독 내 이름이 자주 언급되고는 했다.
방송국에서 꼭 나를 나레이션으로 쓰고 싶다는 이유.
일종의 대리만족.
무명 단역배우에서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인지도를 불린 배우는 없었다.
저들이 하지 못하던 일들을,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하던 일들을.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던 일들을 내가 지금 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조금 힘주어 말했다.
“1초를 위해, 24시간을 몰두하는 이들의 삶을 제가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한 마음으로.
“내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이 다큐멘터리가 얼마나 힘이 될지는 모르지만.
절대, 포기하지 말기를.
*
새해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날아온 한 통의 메일.
UAA에서 에이전트를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 덕분에 회사는 식사 준비는 어떻게 할 것이며, 계약에 관한 세부 조건은 어떻게 정할지에 대해 시끌벅적 했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분주했다.
나는 SNS를 따로 하지 않았기에, 내 개인 사진이나 정보들은 회사 SNS 계정이나 팬 카페를 주로 이용하고는 했는데.
최근 회사 팔로워 수가 급증하고, 내 팬 카페 회원 수가 삽시간에 폭증했다.
이렇다 할 방송활동이 없던 새 해 초반.
무엇 때문일까?
얼마 전, 방영된 KTN 다큐멘터리 [배우로 가는 길>이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나와의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개하는 무명 배우들. 현장 스탭들의 증언이 인터넷에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예의 바른 배우.’
‘그 누구보다 프로페셔널한 배우’
이야깃거리들이 쏟아져 나오자 연예부 기자들은 좋은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듯, 너도나도 관련기사를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휴대폰은 계속해서 울렸다.
“속물처럼 보이겠네.”
나는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오는 내 기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인지도 때문에 한 일이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개런티도 안 받고 진행했고요.”
“그게 영향력이야. 돈도 그렇잖아? 버는 사람은 더 잘 번다고. 인지도도 마찬가지지. 유명한 사람 기준으로 돌아가게 되어있어.”
“….”
무보수로 진행했던 일임에도, [도재희의 재능기부] 같은 제목을 달고 기사화 되었다.
내겐 좋은 일이지만, 조금 민망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데.
하지만, 가장 큰 수혜자가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다.
“별 수 없잖아. 네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민망해서 그렇죠.”
“신경 쓰지 마. 회사 간판인 네가 이미지를 이렇게 구축했으니, L&K에서라도 잘 챙길 거야. 권 대표님이 지시하셨다고 하더라. 신인배우들 더 챙기자고.”
“…”
이 역시, 회사 입장에서는 이미지 메이킹이리라.
신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어내고, 신인 배우들이 몰려오면 거기서 대어를 물어오려는.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찌되었건, 좋은게 좋은 거니까.
[7년의 기억>오디션에서 수많은 신인, 단역 배우들을 보며 잠시 기분이 복잡했었지만.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
내가 탄 차량은 청담동에 정차했다.
샵에서 가벼운 분장을 마치고, 영미 씨가 건네준 깔끔한 세미 정장을 입은 나는, 롱 패딩을 위에 걸치고 곧바로 도곡동
오늘은, UAA 에이전트가 방문한다.
“어우, 완전 쓰레기장이네. 미국 애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냐?”
“이것도 좀 닦아!”
오랜만에 방문하는 귀한 손님 때문인지, 직원들은 한창 주변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UAA에이전트 응접실로 쓰일, 미팅 룸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대표들을 제외하고, 기획부장님과 박찬익 팀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획부장이 내게 물었다.
“커피?”
“감사합니다.”
기획부장이 건네준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었다.
“잠시 얘기 좀 나눌까?”
“네.”
나는 기획부장에게서 UAA측과 서면으로 나눈 계약 내용에 대해 전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나 스타지, 할리우드에서는 ‘신인’이다.
오디션을 봐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대신 번거로운 프로필 동영상은 생략하기로 했다.
오디션 일정이 잡히면, 미국으로 출국해야하고 대부분의 경비는 UAA측에서 부담한다. 수익 배분은
“중요한건 이정도야.”
모두, 예상했던 범위다.
하지만 기획부장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물론, 오늘 계약이 무사히 체결 되어야겠지만.”
“계약이 파토날 수도 있나요?”
“그럼. UAA가 얼마나 깐깐한데. 나는 아직까지도 유튜브 동영상 하나로 캐스팅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할리우드 1번지라고 불리는 유명 에이전시라 아무나 받지는 않는다고 한다.
오직 ‘검증’된 배우만 받는다고 한다.
“한국에서 UAA와 계약하는 배우는 네가 최초야.”
“음, 그런가요? 승희 형도 미국 다녀왔잖아요.”
“응.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한 전례는 있었어. 조승희 씨도 할리우드 TK와 계약했었고.”
“아아.”
“실패했지만.”
“…. 뭐, 그렇죠.”
조승희도 실패했다.
미국에서 서브 주연으로 캐스팅 되었던 영화는 중간에 무산되었고, 조연으로 출연했던 영화 두 작품은 모두 망했다.
결국, 쓸쓸하게 국내 리턴.
내 할리우드 진출 소식이 조승희 귀에 들어간다면, 그는 아마 나를 뜯어말릴 것이다.
‘중국이 좋다니까? 왜 고생을 자처해?’
하지만.
미국행을 결정했던 몇 주 전의 기분이 젊음의 ‘치기’였다면.
지금은 그런 감정들이 조금 단단해진 기분이다.
내 행보가 신인 배우들이 1순위로 꼽을 만큼 한국에서 누구도 걷지 못한 ‘신화’라면, 이번에도 보여주고 싶다.
“일단, 알겠습니다.”
“좀 쉬고 있어. 곧 도착 할 거니까.”
기획 부장님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잠시 기다리자,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의자에 앉아있던 재익이 형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왔나보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는 와이셔츠의 깃을 가다듬었다.
흰 와이셔츠에 반짝이는 은광 시계. 창틀에 비춰 앞머리를 정리하자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왁자하게 들어섰다.
“welcome, welcome.”
환하게 웃으며 외국인 셋을 맞이하는 권우철 대표와,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의 이무택 대표. 통역사 한 명. 그리고 사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외국인 에이전트 셋.
“재희! 재희!”
외국인 에이전트가 나를 한 눈에 알아보며 악수를 청했다.
나는 그들의 손을 일일이 맞잡았다.
자리에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이것만큼은 꼭 확실하게 확인해야겠다는 듯 이무택 대표가 물었다.
“근데, 정말 재희를 어디에서 보고 연락을 준 겁니까?”
그러자 에이전트 중, 가운데 앉아있던 남자가 말했다.
“버스킹 동영상이지요.”
“정말입니까? 고작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
이무택 대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자 에이전트가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그럼요. 아, 물론. 그걸 보라고 추천해준 사람은 따로 있지만.”
“추천해준 사람?”
“네.”
“그게 누굽니까?”
그러자 에이전트가 빙글빙글 웃었다.
“저희 UAA와 계약한 아티스트이자, 영화 [아다지오>의 총괄 뮤직 디렉터입니다.”
… 역시.
하지만 총괄 뮤직 디렉터가 엘라니 오코너라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이무택 대표가 되물었다.
“그게 누군데요?”
그의 표정은 마치 ‘그게 누군데 대체 뜸을 들이는 거야!’ 라고 묻는 듯 했다.
그러자 에이전트가 웃으며 짧게 말했다.
“엘라니 오코너.”
“…. 뭐? 무슨 코너?”
이무택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대번에 알아들었다.
표정이 일제히 굳어진다.
“에?”
“누구요? 엘라니 오코너? 팝 스타, 엘라니?”
“정말? 그 천재 싱어송라이터? 엘라니 오코너가 곡을 만든다고?”
“이건, 사전 조사에서도 없던 내용이에요. 영화에 대한 정보만 모았지 애초에 작곡에 관한 정보는 워낙 비밀스러운 내용이라…”
엘라니 오코너.
역시, 세계적인 아티스트는 파급력이 다르다니까.
이제 문제는 그녀가 왜 하필 나를 추천했냐는 것인데.
으음, 이건 비밀로 해야겠지?
그 때, 권우철 대표가 나를 힐끔거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안 놀라네? 재희는?”
거 참, 눈치 하나는 빠르시네.
나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
“엄청 놀랐는데요?”
“….”
권우철 대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피식 웃고는 말했다.
“알았어.”
곧 이어 지루한 계약에 관한 간단한 설명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내 귀에는 오직 단 ‘하나’의 이야기만 들어왔다.
“재희가 배역 물망에 오르기 전, [아다지오> 오디션을 보게 하려던 일본인 가수가 한 명 있어요. 즉, 그와의 오디션 경쟁은 불가피해요.”
미야모토 료.
앨범을 냈다하면, 오리콘 차트를 씹어 먹는 정상급 일본인 가수.
일본 유명밴드 ‘초코버스터’ 2기 출신에 기타도 수준급이다.
이미, ‘동양인 뮤지션’ 이라는 배역이 필요한 덕목인 ‘가창력’과 ‘연주’는 완벽하게 소화 가능하다.
하지만, 에이전트는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말했다.
“재희가 [아다지오> 오디션에서 밀리더라도, 이제 저희와 인연을 쌓았으니 오디션 기회는 계속해서 만들 수 있어요. 물론, 재희가 도전에 지치지만 않는다면.”
“….”
아, 그러니까.
엘라니 오코너에게 오디션 추천을 받긴 했지만, 경쟁자가 너무 강해서 내가 떨어질 수도 있으니… 낙심하지 마라? 다른 작품도 밀어주겠다?
“….”
내 표정이 미묘해지자, 이무택 대표가 빈정 상한다는 얼굴로 말했다.
“염병, 이번에는 일본 놈이 말썽이네.”
물론, 한국어로.
“재희를 뭘로 보는 거야? 아쉬운 사람이 우린 줄 알아?”
“토, 통역합니까?”
“지금 장난합니까?”
소란스러워진 현장을 정리하며, 권우철 대표가 내게 슬쩍 물었다.
“물려? 아니면 고?”
“….”
물리냐고?
콜럼버스의 배를 타고 아메리카에 도착한 동양인이 서양인들의 땅에 깃발을 꽂으려는데.
같은 배에 타고 온 동양인 하나에 겁 먹으면 안되지.
어차피, 경쟁은 예상했다.
내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고죠.”
라이벌. 경쟁. 싸움.
익숙하잖아.
이제껏, 내가 취하지 못한 작품은 없다.
그게, 미국이라고 다를까.
[ 책 먹는 배우님 – 8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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