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8)
88.
UAA와의 계약이 무사히 끝났다.
계약기간은 2년.
1년 이내에 이렇다 할 성과가 없을 시에는 계약을 파기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되어있다.
물론, UAA 측에서도 내가 오디션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을시, 패널티를 부과할 수 있지만.
그럴 일은 없다.
미리 예약해 두었던, 1인분에 40만원이 넘어가는 한정식 집에서 식사를 마친 후, 에이전트 측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오디션 합격과 동시에 언론에 흘려보낼 자료.
어떤 언론이건, 군침을 흘릴 만한 독점 정보.
‘도재희 미국 진출’
에이전트들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회사 내에서 몇몇 매니저들이 내게 물어왔다.
“그러니까, 결국 엘라니 오코너가 자기 영화에 재희를 추천 한 거잖아?”
“그런 셈이지. 재희야, 너 아는 거 있어?”
도대체, 내가 세계적인 팝 스타를 어떻게 아는 것인가.
L&K에서는 엘라니 오코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글쎄요.”
나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에이전트들도 자세한 내막을 알지는 못하는 듯 보였고, 엘라니 오코너의 입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회사에서는 내게 최고의 보컬 트레이너가 붙여주었다.
아이돌 여럿을 메이저로 띄운 경험이 있는 실력파 가수 출신, 보컬 트레이너 ‘호성’
의외로 이건, 항상 내 의견을 존중해주었던 권우철 대표의 지시사항이 아니었다.
“이거 한일전이잖아?”
조금은 다혈질 적이지만, 누구보다 나를 아끼는 이무택 대표의 지시사항이다.
“한일전인거 누가 안다고 그러세요. 비공개오디션인데.”
“내가 알잖아? 몰랐으면 몰라. 알게 된 걸 어떡해. 그럼 무조건 이겨야지. 한일전은 이겨야해!”
하하… 그래.
이겨야지.
‘초코버스터’ 라는 일본의 국민 밴드 2기 보컬 출신.
작곡 능력과 기타 숙련도 역시 수준급으로 인정받는 다재다능한 뮤지션.
열도가 낳은 아시아의 별이자 국내에도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는 아시아의 스타.
단순히 대중적인 인지도만 놓고 보았을 때, 아시아 활동을 하지 않은 나와는 확실히 대비된다.
할리우드에서도 아시아 시장을 겨냥했을 때, 군침을 삼킬만한 인재니까.
이렇게 커리어로만 놓고 보면, 내가 상대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 괜찮은데?”
보컬 트레이너 호성은 내 노래를 한 번 듣더니, 단번에 상황을 진단했다.
“영화 [인사이드 르윈>에 나오는 노래잖아. five Hundred miles.”
미국에 끌려온 흑인 노예들의 상황을 노래한 포크송.
나는 성공하기 전에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절박함을 안은 뮤지션을 떠올렸다.
“노래가 뭐 별거야? 들었을 때 좋으면, 땡이지.”
“괜찮았어요?”
“지금도 잘해. 배역이 무명 뮤지션이라고 했나? 노래와 궁합도 잘 맞고. 영어 가사임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이 느껴져.”
최근, 다큐멘터리의 나레이션 덕분일까.
아니면 [7년의 기억> 오디션에서 보았던 수많은 무명배우들 때문일까.
내가 곧, ‘무명 뮤지션’을 연기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일까.
아마, 모두 다 일 것이다.
유독,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들을 부를 때면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가슴 속의 응어리가 느껴지고는 한다.
일종의 울분.
이 울분이 내게 지리멸렬하고 비루한 감정 조각들을 하나로 불러 모으고 있다.
“보컬로서의 세련됨, 기교. 이런 것은 미야모토 료가 한수 위지. 하지만 그걸로 승부 보는 게 아니잖아. 이게 가수 뽑는 오디션은 아니니까.”
그렇지, 아이돌을 뽑는 오디션도 아니고.
실력파 가수를 뽑는 오디션이 아니다.
진심을 다 해 노래할 수 있는 배우를 뽑는 오디션.
“고음 올릴 때, 목에 힘 들어가는 쪼. 이거 하나는 내가 확실히 잡아줄게. 다른 건 내가 터치한다고 단기간에 바짝 끌어올릴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 지금 장점만 살리자. 어때요? 대표님들 듣기엔 어땠어요?”
트레이너 호성의 질문에, 녹음실 귀퉁이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나 역시, 유리창 너머로 대표들을 주시했다.
“솔직히 말해주세요.”
내 말에 권우철 대표는 엄지를 치켜들었고, 내 할리우드 행을 가장 걱정하던 이무택 대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호성 앞에 놓여있는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아주 큰 목소리로.
“가자! 재희야!”
*
보컬 이외에도 기타 트레이닝 지원도 이어졌다.
내가 기타를 잡아 본 경험이라고는 군대에서 기본 메이저코드 정도 익혀본 것이 전부다.
대부분 기타를 가볍게 배워보는 사람들이 그렇듯 Em, Am, C, G 같은 기본코드를 익힌 뒤, 코드가 반복되는 쉬운 노래 몇 가지가 반주 가능한 상황. 딱, 거기까지는 즐겁지만.
F 코드에 들어가면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에 포기하고는 한다.
뭐, 나만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F 코드 이후에 기타를 잡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군 전역 이후 7-8년이 지나고서야 기타를 잡은 지금.
“와하!”
예전에 기타를 잡았을 때 느꼈던 그 즐거움 만큼은 아직까지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흥얼흥얼 거리며 포크송을 부르던 단순한 취미가, 이제는 일이 되었다.
그러니 하루 종일 기타만 잡을 수밖에.
나는 일정이 없는 날은 하루 종일 보컬 트레이닝과 기타 연습에만 매진했다.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히고, F코드를 넘어 하이 코드를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수준이 된 1월 말.
오늘.
영화 [7년의 기억> 대본 리딩과 단체 회식이 잡혔다.
기존의 리딩과는 다른, 조금 특별한 날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보는 첫날 이니까.
설강식, 여호석.
이제껏 현장에서 만나 본 적 없는 ‘무결점’ 배우들.
30년 이상 연기 경력을 쌓은 명품 배우들이며, 함께 카메라 앞에 선다는 것 자체가 영광인 대선배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평소보다 두 배는 긴장된 상태로 영화사 [너울>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런 세간의 관심에 비례하듯.
사무실 로비부터 기자들이 가득 에워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재익이 형이 말했다.
“기자들 관심이 많을 수밖에. 오늘 리딩에 참여하는 주연배우 세 명. 도재희, 설강식, 여호석. 이들 대표작만 합쳐도 관객 수가 4천만이야. 영화 관람불가 인구 빼면, 대한민국 국민 전부가 본 거나 다름없으니까.”
총합 4천만.
2015년에 설강식 선배님이 참여한 영화 [독립군>이 1700만 관객을 넘겼으니 가능한 수치다.
탁탁.
“기죽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하자.”
재익이 형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매니저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래.
하던 대로만, 하자.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나는 기자들 틈을 지나, 헛기침을 하며 리딩실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란 테이블 여덟 개를 이어 붙인 넓고 네모난 공간.
상석에는 박진우 연출이 앉아있었고 그 옆자리에는 신인 오디션을 통해 뽑힌 여배우 하윤이 앉아있었다.
“어서 오세요. 도 배우님!”
“서,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아직, 선배님 두 분은 들어오시지 않은 상황.
나는 박진우 연출과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하윤에게 인사했다.
“잘 지냈어요?”
“네!”
자리에 앉으니, 매니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테이블 위를 다과로 채워놓기 시작한다.
평소의 리딩 같았으면 아무것도 표시되지 않은 깨끗한 대본을 적당히 펼쳐놓고, 여유를 부렸을 텐데.
확실히, 상대가 상대라 그런지 조금 떨린다.
“고맙습니다.”
생수 하나를 따 입술을 축였다.
설강식, 여호석.
이들과는 지난 시상식 때, 먼발치에서 얼굴을 보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본격적인 ‘작품’을 통해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떨린다.
그 때, 리딩실 문이 열리며 선배님 두 분이 동시에 들어섰다.
“오, 선배님!”
“어이고, 박 감독.”
박진우 연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가 설강식, 여호석 선배님들을 반겼다.
선배님들은, 두꺼운 패딩을 걸치고 면도도 하지 않은 ‘일상’ 그 자체의 내추럴 한 모습으로 사무실을 찾으셨다.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인상이지만 어딘가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왜 일까.
아마도, 눈.
이렇게 내공 있는 배우들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눈이다.
“….”
눈이 깊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평소에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다양한 감정을 품고 있는 눈. 본인 의사에 따라 완벽하게 컨트롤 되는 그 깊은 눈들이 내게 일제히 향했다.
“아.”
나는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그러자 설강식 선배님이 이를 드러내 보이며 웃으셨다.
“으하하, 재희 씨. 세종극장(대종상 시상식)에서 보고 처음인가?”
“네. 선배님.”
“늦었지만 축하해요. 자, 어서들 앉자고.”
그런 설강식 선배님이 하윤을 바라보고는 시선을 멈추었다.
마치, ‘넌, 누구지?’ 라고 묻는 듯한, 눈빛에 하윤은 군기 바짝 든 여군마냥 차렷차세를 취하며 말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아! 신인 배우 하윤입니다!”
하윤은 극 중에서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에피소드의 원인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
첫 상업 작품부터 ‘로또’를 맞은 그녀는,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높은 곳에 있는 선배님들과 한 작품에 출연한다는 사실에 완전히 압도되어버린 듯 했다.
설강식 선배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 ‘누나’ 역할?”
“네, 네!”
“좋아요. 잘 해보자고요.”
“… 네, 넵!”
감격이라도 한 듯, 주먹을 불끈 쥐는 하윤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더니 넋 놓고 정면만을 바라보았다.
이미 얼음 상태다.
아마, 멘탈 마저 꽁꽁 얼어버린 듯 했다.
그래, 나조차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생판 신인 입장에서야 오죽 할까.
설강식, 도재희, 여호석, 하윤.
박진우 연출은 리딩에 들어가기도 전, 주르륵 앉아있는 이 라인업을 보고는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든든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들.”
그러자 여호석 선배님이 반색하며 말했다.
“응? 나는 박 감독만 믿고 있는데?”
“앗, 예?”
“우리 너무 믿지 말라고. 그렇게 실력 좋은 사람들 아니니까.”
여호석 선배님의 너스레에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으하하, 농담이야. 나도 열심히 해야지. 이렇게 잘 쓴 작품에 소문 자자한 배우와 참여하는데.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렇지. 말년에 밥그릇 안 끊기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지. 으흐흐.”
설강식 선배님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한 없이 선한 눈을 하고 있었다.
“리딩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하지, 하지.”
하지만, 그 선한 눈이 180도 돌변하고, 냉혹한 살인자로 바뀌자마자 주변 공기는 급변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장면입니다. 오프닝 타이틀이 올라가기 직전, 까만 블랙 스크린에 들어오는 고급 구두. 또각또각. 지하주차장을 걷는 발. 하지만 술에 취한듯 이따금씩 비틀거린다. 다리에서부터 틸업되며 얼굴이 드러난다. 잘빠진 양복을 차려입고, 거나하게 취한 ‘살인자.’ 제 자리에 멈춰선다. 풀샷에서 지하주차장. 그리고 드러나는 또 한 명의 존재. 바로, ‘강준'”
리딩 시작과 동시에 무거운 공기가 양 어깨를 짓누르듯 착 가라앉은 사무실.
설강식 선배님은 무섭도록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너, 누구야?”
그리고 나는.
짐승 같은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뱉기를 반복했다.
끓어오른다, 속 깊은 곳에서.
7년 만에 재회한 내 누나를 죽인 살인자를 만났다.
“꺽-! 나를 아시는가?”
“….”
이 뻔뻔함에 치가 떨린다.
나는 이제껏 언젠가 살인자와 재회하게 될 이 순간을 매 순간마다 상상하며 사회 가장 밑바닥에 웅크리고 살았는데.
이 자는,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룸살롱을 드나들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
… 개새끼!
닭똥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며, 나는 헐떡이며 말했다.
“이제부터, 알아가게 해 줄게.”
설강식 선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책 먹는 배우님 – 8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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