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89)
89.
꿀꺽.
리딩 현장을 참관하던 기자들이 침 삼키는 소리.
차르륵.
단역 배우들이 넋을 놓고 바라보다, 황급히 시나리오를 넘기는 소리.
“죽어.”
“주, 준아! 그만!”
“죽어, 이 새끼야아아아!”
도재희, 설강식, 여호석.
세 명의 배우들이 실전을 방불케 하듯 내뿜는 거친 호흡소리.
이 모든 소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일종의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리딩실을 가득 울리는 배우들의 다중창.
이 모습을 지켜보던 기자 한 명은 생각했다.
‘미쳤어.’
영화 [7년의 기억>은 시작부터 종장까지 하이텐션을 유지한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 영화의 엔딩을 보고나면 관객들은 아마, 그대로 의자에 목을 기대고 누워, 숨을 뱉어낼 것이다.
그리고 같이 영화를 관람한 여자 친구를 한번 바라보고 혀를 내두른 뒤에, 엔딩 크레딧까지 축 늘어진 채 앉아있겠지.
영화에 흠뻑 취했던 러닝 타임. 자리에 앉아서 남아있는 여운을 한껏 즐기다, 일어나면 곧 바로 어디에라도 주저앉고 싶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지금 기자들이 그러고 있으니까.
“잠시 쉬었다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리딩 중반,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했다. 벌써부터 손은 땀범벅이다.
“뭐라고 써야하지?”
“모르겠어요. 저도 시작도 못했어요.”
기자들 노트북 다수가 백지.
괜히 잘못 썼다간 영화에 흠집을 내지는 않을까, 배우들의 노고에 기스라도 남지 않을까 싶어 쉬이 키패드를 두드릴 수 없었다.
그저 황망히 앞을 바라보며.
“나 대체 뭘 본 걸까.”
중얼 거릴 뿐이다.
“다들 왜 이렇게 열심히 해? 고작 첫 리딩인데.”
“설강식 배우나 도재희 씨는 원래 리딩 때 최선을 다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여호석 배우는 아니잖아. 쉬엄쉬엄 하시는 분인데?”
“분위기 타신 게 아닐까요. 다들 살벌하니까요.”
살벌했다.
고수들이 서로 한 수 씩 주고받았다.
검, 창 할 것 없이 서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을 뿜어냈고 그 흔적들은 공기 중으로 날아가지 않고 그대로 쌓였다.
파다하게 퍼져 층층이 쌓여있는 호흡. 남은 배우들은 자연스럽게 그 호흡을 받아먹기만 하면 된다.
“거, 살살하시지…”
위풍당당한 풍채에 걸맞지 않게 무사안일주의를 외치던 여호석 역시, 눈빛을 돌변하게 만드는 살벌한 리딩.
폭풍이 휘몰아친 전반전이 끝났지만, 배우들은 여유롭게 웃고 있다.
“형님. 도 후배님? 이거, 살살 합시다. 회식 시작 전부터 녹초 되겠네.”
여호석 선배의 너스레에 설강식 선배가 쓰게 웃었다.
그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보였는데, 설강식 선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나오며 내 어깨를 툭 두드리며 말했다.
“잘하고 있어.”
그리고 여호석 선배에게 말했다.
“바람이나 좀 쐬지.”
“밖에 추운데?”
“나오라면 나와. 애들 우리 때문에 화장실도 못가는 거 안 보여?”
“아, 아.”
선배님들이 나간 자리. 사무실 문이 열리자, 찬바람이 조금 들어왔고 그제야 뜨거웠던 분위기가 조금 환기되기 시작한다.
“후, 쩔지 않아?”
“진짜 이 작품, 영광이다.”
단역들이 숨을 돌리는 사이, 나는 그 자리에 앉아 조금 전의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마치, 벽.’
설강식 선배가 내게 1을 던지면. 나 역시 지고 싶지 않아 2를 던진다. 그러면 어김없이 3이 날아온다.
‘더 해? 어디까지 하나 보자고.’
마치, 내게 채찍질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한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에너지가 무궁무진해 보인다. 여유롭기까지 하다.
“….”
나는 깨끗한 백지 대본을 들어올렸다.
[영화 [7년의 기억>은 이미 흡수한 상태입니다.]단순한 대본 이해도나, 연기의 재능 따위로는 측정할 수 없는 무게.
내가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를 한다면. 설강식 선배는 본능적으로 연기한다.
마치, 짐승처럼.
내 머릿속에 주인공 ‘강준’의 인생이 가득 들어있다면, 그의 속은 아마 텅텅 비어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스펀지처럼, 내가 던진 호흡을 흡수해서 즉흥적으로 그 상황을 뿜어내는 거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 저렇게 연기 할 수도 있구나.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다.
그리고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도.
감이 온다.
*
설강식은 흡연 장으로 나가며, 대본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던 박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앗, 선배님.”
“박 감독. 같이 담배 한 대 피우지?”
“네, 선배님. 옷만 챙겨서 나가겠습니다.”
박진우가 패딩을 가지러간 사이, 여호석이 중얼거렸다.
“밖에 추운데. 실내에서 담배도 못 피우고. 리딩 중에 자유롭게 피던 예전이 좋았는데 말이야.”
하지만 설강식의 귀에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 몽롱해진 시야가, 박진우의 재등장과 함께 밝아진다.
“어, 가지.”
영화사 빌딩 주차장으로 나온 세 사람은 제각기 입에 담배를 물었다.
설강식이 물었다.
“그런데 도 후배 말이야.”
“아, 재희 배우님이요.”
“응. 그 친구 원래 연기를 그렇게 ‘기계적’으로 하나?”
“네?”
조금 뜻밖의 질문.
‘기계적으로 하는 연기’가 무엇인지 잠시 고민하던 박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글쎄요. 선배님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
박진우 연출이 만들어낸 세계관 속의 ‘강준’이라는 인물은 도재희가 완벽하게 구현해 낸다.
100점 만점에 100점일 정도.
그러자, 설강식이 가볍게 손사래 치며 말했다.
“아니, 오해하지는 말고. 못한다는 말이 아니야. 너무 잘해. 나 역시 리딩 중에 몇 번이고 놀랄 정도로. 와, 이 새끼. 이것까지 하네? 놀랐다니까.”
여호석이 받아쳤다.
“맞아. 소문대로 너무 잘하던데? 강식이 형이, 리딩 중에 지적 안한 주연은 그 친구가 처음이야. 리딩 하면서 개 짖는 소리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야! 너! 짖지 마! 짖지 말고 말을 해! 말! 낄낄낄낄!”
“…. 하하.”
그런데 뭐가 문제일까.
박진우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설강식이 말했다.
“그래서 문제지. 도재희의 인간미가 없잖아. 그 친구가 하는 말은 다 ‘강준’이야. 조금의 허술함도 안 보인다고.”
“… 아.”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박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에겐 각자의 시그니쳐가 있다.
하지만 도재희에게는 그 시그니쳐가 너무 다양하다.
한계를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설강식 같이, 본인 시그니쳐를 가슴 속에 품고. 머리를 비우고 연기하는 ‘연기 괴물’과는 명백히 다른 연기 방식.
“그래서 리딩 중에 이것저것 다 시켜봤거든? 근데 그건 또 바득바득 따라오면서 다 해내.”
설강식은 그런 도재희가 이상하게 보이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박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연기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확실할 것은. 도 배우는 항상 고민하는 배우라는 점입니다.”
고민.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이미지를 그대로 체화할 수 있도록 훈련한 흔적.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배우죠.”
“….”
감독의 신뢰에 설강식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깎아내리려던 의도는 없었다.
그저, 젊은 배우의 믿기 힘든 연기에 감탄했을 뿐.
설강식이 씩, 웃으며 말했다.
“박 감독의 페르소나persona 구만?”
페르소나, 감독의 분신이자 상징.
박진우가 활짝 웃으며 부정했다.
“아뇨.”
다양한 시그니처를 가진 도재희는.
“도 배우는, 아마도 저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감독님들의 페르소나가 아닐까요.”
*
설강식은 하나의 시그니처를 가지고 있다.
본인의 인간미. 그것을 극도로 살리면서 다양한 캐릭터를 자기 식으로 해석해낸다.
대중들이 흔히 알고 있는 말, 메소드.
그 인물이 되는 것.
잠시 휴식 끝에 재개된 후반부 리딩에서 나는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는 힘을 뺐다.
팔을 주무르고 목을 주물러 힘을 뺀 뒤, 눈을 감고 집중력을 단기간에 끌어올렸다.
이제껏 ‘강준’의 대사 그 자체에 집중했다면.
이번에는 내 ‘말’ 자체에 집중했다.
어차피, 대사는 머릿속에 흘러가고 있고- 나는 강가에 떠다니는 낚시 배 마냥, 주유하다 대사 한 줄을 낚아채면 된다.
파바밧!
“왜 잡을 수 없는 건데요?”
아주 절묘한 순간에.
짜릿한 찰나의 순간에.
내 시선이 경찰관3에게 향했다.
“증거, 자백. 모두 받아냈는데 효과가 없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삐걱거렸지만, 이후에는 점점 자연스러워지더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
설강식 선배의 눈이 일순간 가늘어졌다.
내 미묘한 차이를 알아 차렸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줄다리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연기에 대한 고민이었다.
설강식 선배의 연기력에 순수하게 감탄했으니까.
하지만 이러한 ‘감탄’은 단순히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리딩이 끝나고 이어진 회식 자리.
가게에 먼저 도착하셨던 설강식 선배님이 내 등장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일루와.”
그리고는 자신의 옆자리에 꼭 앉혀버린다.
나는 황급히 그의 옆 자리에 앉았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박진우 연출이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없는 사이 무슨 대화라도 오간 모양이다.
“너, 내가 말 편하게 해도 되지?”
술이 한두 잔 오가고 나니, 조금은 편해진 술자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선배님.”
그러자 설강식 선배가 입 꼬리를 쭉- 찢으며 웃었다.
“으흐흐 찍고 있는 영화에 출연하는 후배 놈들이 전부, 재희 얘기를 하는 거야. 미쳤다고. 그래서 어떤 사람인가 너무 궁금했는데.”
“….”
“오늘 많이 배웠다.”
탁탁.
내 등을 한번 치시고는 술잔을 입에 털어 넣으셨다.
“…..”
으레 있는 인사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을 울린다.
아마도, 그 상대가 설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영화계를 만들어낸 일등공신이 나를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옛날 생각이 난다.
‘쩔지 않냐? 어떻게 저렇게 연기하지?’
‘와,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고등학교, 대학생 시절, 대학로에 있던 시절.
한결같이 여기 내 앞에 있는 선배 배우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감탄했다.
저렇게 되고 싶었다.
내 우상.
우상이 내게 술잔을 들어올렸다.
“잘 해 보자고.”
나는 소주병을 드려 술잔을 채워드리며 말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뭐가 그리 기분 좋으신지 또 웃으신다.
“으흐흐.”
여호석 선배님이 건배 제의를 하며 말했다.
“넌, ‘말’을 해서 좋아. 요즘 말도 못하는 것들이 현란하게 짖어대느라 아주 귀가 아프거든.”
“… 감사합니다.”
요컨대, 연기는 진실에 있다.
시그니쳐가 하나든, 둘이든.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을 움직이게 만들면 된다.
나는 오늘 설강식과 여호석을 움직였고.
그의 마음속에 드는 것에 성공했다.
이 아주 작고 미묘한 차이는 연기 뿐 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노래에서도 적용되는 부분이겠지.
그날 밤.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1 213-925*-3***.
확인해보니, 발신번호는 미국 LA.
[저를 움직였던, 그 진심으로 노래해주길. lol>재익이 형이 물었다.
“누구야?”
나는 대수롭지 않게 웃어 던졌다.
“스팸이요.”
“하여튼, 번호 같은 거 인터넷에 함부로 올리면 안 된다니까.”
아마도 이 문자는.
엘라니 오코너가 아닐까.
[ 책 먹는 배우님 – 89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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