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94)
94.
LA 고급 식당에서 식사 도중, 엘라니 오코너와 단 둘이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세부 계약 얘기로 제작팀, 폴 안토니 감독이 우리 스탭들과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엘라니.”
내 인사에 엘라니가 싱긋 웃었다.
“저야 말로. 이렇게 제 기를 세워주셨잖아요.”
“제가 붙을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셨나요?”
“그럼요.”
“으음, 단순히 예상하신 게 아니라… 강력히 추천 하신 것 같던데.”
… ‘내정자’로 말이야.
내 말의 의도를 알아차린 엘라니가 강력히 부정했다.
“절대 아니에요. 오디션 볼 필요도 없을 만큼, 흥미로운 배우가 있다고 추천했지. 감독의 캐스팅 권한을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온전히 재희가 일군 오디션이에요.”
나는 쑥스러워 샴페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LA의 밤에 취하는 느낌이다.
단순한 ‘조연’인 줄 알았던 캐릭터가 ‘서브 주연’ 수준이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오디션에 합격하고.
모든 일들이 꿈만 같은 이 밤.
우리는 의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마에서의 아주 짧은 만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엘라니가 내게 다녀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고.
엘라니 역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 보다는. 딱 한 마디 말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재희의 등장이 영감을 줬어요.”
“네?”
“제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영화 인물을 로마행 열차에서 실제로 맞닥뜨린 순간. 어떤 노래를 만들지 머릿속에 스쳐지나갔죠. 마치, 영화처럼. 촤르륵.”
“….”
아티스트의 고뇌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나 역시 신인 배우들에게 오디션에 대해 영감을 얻었듯, 그녀 역시 내게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그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노래도 몇 곡 완성되었어요.”
“와, 정말요?”
“네. 모두 재희가 불러야 해요.”
“… 이거, 긴장되는데요.”
“샘플 곡 뿐 이지만, 한 번 들어볼래요?”
엘라니가 자신의 아이 폰을 들어올렸다.
“오, 좋아요.”
내가 손을 뻗어 그녀의 이어폰을 잡아 내 귀에 꽂았는데, 엘라니가 자연스럽게 한 쪽 이어폰을 자신의 귀에 꽂았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이어폰을 나눠 낀 상태로 노래를 들었다.
엘라니가 직접, 샘플링 하였고 이렇다 할 가사는 없이 중얼중얼 거리는 멜로디가 전부였지만.
“음, 이것도 좋은데요.”
음악의 힘은, 이런 것에 있지 않은가.
자세히 몰라도, 좋은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다.
특히 따스한 포크 풍 음악들이, 이 영화의 분위기를 대변해주고 있다.
‘희망을 노래하는, 어딘가 모자란 청춘들의 성장 통.’
모두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다.
노래가 끝나고, 엘라니는 이어폰을 정리하며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후후”
그리고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키득거리며 웃었는데.
나는 노래를 들으며 무언가 스쳐지나가는 ‘영감’에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슨 문제 있어요?”
엘라니의 질문에 내가 말했다.
“아, 아뇨. 그냥 문득, 이 노래를 함께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배우들이 떠올라서.”
“누구요?”
내 말에 엘라니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그런, 영감은 언제든 환영이라고요. 말해 봐요. 아직 단역 오디션 많이 남았으니까.”
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런던에서 저와 함께 노래한 친구들이요.”
샘, 행거, 아리아나.
내 음악의 천사들.
엘라니가 반색하며 말했다.
“아! 동영상에 함께 나온 배우들?”
“네.”
엘라니의 노래에서 문득 그런 느낌을 받았다.
경쾌한 밴드곡이지만, 이들과 함께 노래하면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그러자, 엘라니 오코너가 눈을 빛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
LA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12시간이 넘는 장시간 비행도 이제는 조금 적응되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도착한 인천 공항.
떠날 때와 다름 없는 풍경이지만.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서류 심사를 마치고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던 찰나, 박찬익 팀장이 내 앞을 가로막아섰다.
“재희, 우선 옷부터 갈아입자.”
“네?”
“나도 지금 연락받았는데. 앞에 기자들 쫙 깔렸다고 하네?”
“… 그게 무슨…”
LA로 출국 할 때는 비공식 일정이었지만, 귀국과 동시에 ‘공식 일정’으로 바뀌었다.
아아, 그럴 수 밖에.
내 ‘할리우드 오디션’ 기사가 한국에 쫙 퍼졌고.
이제 그 결과도 모두 전해들었을 테니까.
기자들이 공항 내부에 쫙 깔렸고, 자체적으로 믹스트존을 형성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으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공항 패션이라.”
장 팀장님은 나를 위 아래로 훑으며 빠르게 스캔을 마치더니. 내 등을 밀며 나를 화장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캐리어에서 옷가지들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갈아입고 나와.”
“아, 아…”
지금 입고 있는 편안한 트레이닝 복과 따뜻한 롱패딩에 털모자를 벗어던지고, 롱 코트에 목도리. 무난한 블랙진에 빨간 터틀넥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동시에 헤어드라이기가 돌아간다.
위잉잉-
화장실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람.
장 팀장님은 프로였고, 5분 만에 뚝딱뚝딱 머리를 만지고 나니 흡족하게 웃었다.
“이야, 다른 사람으로 변했네.”
“… 그런가요.”
“응, 그러니까 앞으로 제발 그 촌스러운 털모자는 쓰지 말자고.”
“….”
고오맙다.
신발까지 깔끔한 갈색 로퍼로 갈아 신고, 출전 준비를 마쳤다.
“여기, 질문 리스트.”
나는 박찬익 팀장이 건네 준 질문 리스트를 받아들었다.
질문은 총 세 개.
모두, 어려운 질문들은 아니었다.
“가자.”
박찬익 팀장이 선봉에 서서 게이트 문을 열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카메라 플레시를 터뜨린다.
“여기 좀 봐주세요!”
“재희 씨!”
선글라스라도 쓰고 나올 걸 그랬다.
나는 적당히 웃으며, 믹스트존 정중앙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기자들이 주차장까지 나를 따라왔고, 주차장 앞에서 아주 잠깐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기자회견을 주선한 사람은, 이무택 대표였다.
“자자, 질문 정확히 세 개만 받겠습니다.”
… 대표님이 거기서 왜 나와?
바람 같이 나타나서 내 어깨에 손을 얹은 이무택 대표는, 미리 지정되어있던 언론사들에게 질문할 것을 요구했고.
이들은 우리 측과 미리 약속되어있는 질문들을 했다.
‘할리우드 행을 결심한 계기는?’
‘오디션 결과를 어떻게 예상했나?’
‘앞으로의 행보는?’
내 입에서도 전형적인 답변들이 나왔지만, 원래 이런 틀에 박힌 답변이 잘 먹히는 법이다.
“자! 이제 끝내겠습니다!”
이무택 대표가 인터뷰를 끝낼 것을 고했고, 빠르게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먹자? 뭐 먹고 싶어?”
“된장찌개에 삼겹살. 소주 어때요?”
“그럼 돼지 말고, 소로 가자.”
“크흡, 네.”
나는 차에 올라타자마자 목도리를 풀고 뒷좌석에 몸을 기대 누웠다.
아이고, 한국 들어오자마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정신없지?”
운전대를 잡은 재익이 형이 쓰게 웃어보였다.
“네.”
“가끔 보면, 말은 안 통해도 미국이 편하다니까”
맞는 말이다.
그래도 적어도, 한국에는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
[미야모토 료, 라이킨 방. 아시아 스타들을 모두 꺾고 할리우드에 안착한 도재희. 할리우드 성공 가능성은?] [‘할리우드 실패’ 전문가들의 우려를 뛰어넘고 할리우드 행에 성공한 도재희. 영화의 흥행 전망은?] [폴 안토니 감독을 사로잡은, 도재희 오디션 사진. 과연 공개될까?] [하이마운트 픽쳐스 측, 오디션 영상 공개를 원하는 한국 팬들 메일로 폭주.]특별한 사건이 없던 1/4분기 연예계 지면은 모두 내 기사가 점령했다.
각 나라를 대표하는 스타들을 물리치고 할리우드에 입성.
엘리트 평론가들의 ‘비관적’인 입장을 꺾고, 당당한 합격.
L&K는 동시에 UAA 관련 사진들을 언론에 뿌리며 집중 사격을 개시했고, 해외에서 주목하는 가장 뜨거운 한국인 배우 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요 근래, 대중들에게 공개된 작품이 뚜렷하게 없었는데 인지도가 또 수직상승했다.
물론, 이것들이 영화의 흥행을 결정짓지는 못하지만.
‘내 편’의 존재가 든든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내 편’.
재익이 형이 말했다.
“조만간 공식 인터뷰 하나 잡을 거야. 할리우드 행에 관해서 계속 문의 들어오는 질문들, 싹 다 모아서 한 번에 정리할 예정이야. 언제가 좋아?”
“당장 개인 스케줄은 없어요.”
“오케이, 그럼 설되기 전에 빨리 진행하는 걸로 할게. 아, SBC [스타 나들이>에서 할리우드 행 관련해서 취재 연락 왔는데, 이건 어떻게 할까?”
2월 중순.
영화 [7년의 기억>이 크랭크인 막바지 준비에 한창인 가운데. 할리우드 행에 관한 취재가 줄지어 생겨났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
그러던 와중, 아주 의외의 연락이 도착했다.
– 시간 괜찮아?
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아, 개인 스케줄 하나 생길 것 같은데.”
“언제?”
“글쎄요. 연락 해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 누군데?”
“승희 형이요.”
발신자는 조승희.
조승희라는 이름에, 재익이 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 그 모임 아직도 나가?”
“잘 안 나갔죠.”
조승희가 아끼는 후배로 모임에 소개된 이후, 서로가 계속 안부 연락을 주고받으며 돌아가는 작품 얘기를 했지만, 딱히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던 일은 없었다.
영화 시사회나 시상식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만남을 몇 번 가진 것이 전부.
“할리우드 때문인가?”
“….”
할리우드에서 실패.
조승희 커리어의 가장 큰 상처.
아마, 그런 것 같지?
*
조승희.
[피셔>의 실패 이후, 또 다른 영화 하나를 손댔지만 거기서도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다.하지만 조승희를 향한 팬들의 굳건한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30대 배우들 중 가장 인정받던 연기파 배우이고. 현재도 가장 큰 개런티를 받는 탑 스타니까.
내게 있어도 아주 든든한 아군이고, 또 언젠가는 뛰어넘어야 할 산.
그런 조승희가 매니저를 대동하고 우리 집 앞을 찾았다.
방배동 외곽에 있는 조용한 오피스텔.
근처에 있는 술집이라고 해봐야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조그만 꼬치 전문점이나 맥주집이 전부지만.
오히려 이런 조용한 곳이, 탑 스타와의 만남에 적합하다.
“오랜만이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조승희를 보며 내가 인사했다.
“형님.”
작년, 대종상 시상식 이후로 처음이다.
그 사이 아주 푹 쉰 듯 살도 조금 찐 것 같다.
“자식이, 연락 좀 하고 살아. 후배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해야 되겠어?”
“하하, 죄송합니다.”
조승희가 나를 찾은 목적.
“이야, 이 집 안주 괜찮네. 나도 이런 거나 하 나 차릴까?”
일부러 안주 얘기와 시답잖은 사업 얘기를 하며 빙빙 돌리고 있지만, 말 안 해도 알 것 같다.
의도적으로 알맹이인 ‘할리우드’ 얘기를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할리우드 때문에 오신거죠?”
그러자 조승희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피식, 웃더니 은행 몇 알을 입으로 집어넣었다.
“그렇지 뭐.”
그는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듯 보였다.
“중국같이 돈도 많이 주고 쉬운 길도 많은데.”
“역시,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어요. 큭큭.”
조승희는 중국에서 왕이다.
한류스타가 꿈꾸는 한류스타. 중국 드라마 회당 개런티는 8억에서 10억에 달한다.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왕’이 내게 물었다.
“괜찮겠어?”
괜찮겠어?
너무 넓고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질문이다.
하지만 질문의 알맹이를 온전히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오는 되어있어요.”
“쉬운 무대가 아냐. 알지? 나도 도전했던 거.”
그는 이미 한번 실패를 겪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실패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 내게 말한 적은 없었고, 언론에서 자세하게 다루지도 않았다.
조승희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할리우드, 아름다운 동네지만. 그 만큼 지저분한 곳도 없어.”
[ 책 먹는 배우님 – 94화. > 끝ⓒ 맛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