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95)
95.
조승희는 몇 가지 예시를 들었다.
“인종 차별, 먼 나라 이야기 같지만 아주 가까이에 있어. 2011년에 [라스트 워리어>라는 영화에서 동양인 무인으로 출연했는데. 그 당시 감독에게 인종비하 발언을 들었지. 동양인은 원래 서커스 잘 하지 않냐고. 왜 대역을 쓰냐고.”
“네?”
화가 날 만큼 어처구니없는 발언이다.
서커스?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지?
“그 뿐만이 아냐.”
당시 30대 초반이던 조승희는 한국에서 정상급의 인지도를 구가하던 탑 스타였다. 단역 수준으로 외면 받고, 현장에서 찬밥을 먹는데 이를 버틸 수 있는 스타가 몇이나 있을까.
다 맞는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다.
이제껏 아카데미와 골든글러브는 모두 ‘그들’의 리그였지 않은가.
“내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잊어버려.”
조승희가 미간을 좁히며 소주를 입에 들이부었다.
수많은 배우들이 도전했다.
국내 최초로 할리우드 진출의 신호탄을 쏜 배우는, [피셔>에서 나와 호흡을 맞추었던 임명한 선생님.
할리우드에서 B급 액션 영화 주연과, 메이저 영화 조연으로 두 편을 찍으며 국내 후배 배우들에게도 할리우드에 진출할 수 있다는 일종의, ‘기회’를 부여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성장만 이어졌다.
대략 8년 전.
조승희가 한창 정점의 인지도를 구가하던 무렵, 도전했던 미국 진출.
판타지 영화에서 무사, 동양인 카레이서, 홍콩 마약 조직의 중간 보스. 등 나름대로 빼어난 활약을 했지만, 영화는 모두 흥행 참패로 돌아갔고, 결국 선택한 것은 국내 리턴.
“어쨌든, 그들은 기본적으로 동양인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 아니, 배려심이라고 말할까?”
조승희가 힘주어 말했다.
“서양인에 맞춰진 영화만 찍는데, 그 시장을 동양인 배우가 점령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던 거야.”
굵직한 미국드라마에서 주연으로 우뚝 선 여배우도 있고, 작은 역할이지만 꾸준하게 출연하는 한국인도 있다.
여전히 할리우드 진출은 진행 중.
하지만.
“괜히, 동양인의 무덤이 아니야.”
결국 시장의 한계.
그 끝이 명확하게 정해져있는 곳.
이 시장은, 단순히 배우 한 명이 잘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조승희는 진지하게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 한창 커리어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잖아. 국내 활동에 매너리즘에 빠져 해외로 눈을 돌리려는 거라면, 잠시 쉬는 것도 방법이야.”
괜히 시간 낭비 하지 마라.
어차피 장기적으로 볼 수 있는 시장이 아니다.
“….”
안다.
몇 년 전에는, 연기상 후보들이 모두 백인 위주라는 비판을 했던 흑인 사회자가, 아시아계 배우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며 단두대에 오르기도 했다.
간간히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동양인이 오스카에서 배우 상을 받은 역사는 영화 역사 백년에 딱 한 번.
1950년대 일본의 여배우가 받은 여우조연상이 전부다.
아니다,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알면서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
한국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배우.
순간, 눈앞이 뿌옇게 변하며 오스카를 들고 있는 내 얼굴이 술잔에 넘실넘실 떠오른다.
정말, 환하게 웃고 있다.
“마시자.”
“… 아, 네.”
조승희의 건배 제의에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소주잔에 떠오른 내 얼굴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덧없는 꿈처럼 느껴지는 것은 취기 때문인가, 아니면 걱정 때문인가.
조승희가 소주를 입에 털어 넣고 물었다.
“거기 사람들은 어때?”
“아, 감독님이요? 좋은 분들 같아요.”
“… 그래? 그건, 다행이네.”
내가 바라보는 조승희의 얼굴은 그렇다.
부러움이 내포된,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눈이다.
“좋은 말씀 감사해요.”
이미 한번, 같은 길을 걸어갔던 선배.
그 선배가 바라보는 후배의 얼굴은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적어도, 작아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조금 더 힘주어 말했다.
“한번, 해 보고 싶어요.”
“….”
무모한 자신감으로 비춰질지 몰라도.
앞 서 길을 걸어갔던 선배들의 발자취를 뒤따르며, 길에 숨겨진 ‘함정’ 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 나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을 걷고 싶다.
“응?”
“….”
그래.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엔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해야겠고, 하고 싶은 작품은 반드시 내 커리어로 만들어야겠다.
내가 단단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조승희가 그런 나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너도 참…”
나는 그에 화답하듯, 싱긋 웃어보였다.
“형님, 지켜봐주세요.”
내 길은 내가 걷는다.
*
“크랭크인 들어갑니다!”
영화 [7년의 기억>의 촬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메인 촬영지는 서울, 부산, 전주.
첫 촬영은 전주의 세트장에서 시작되었다.
세트장 한 켠에서는 청주(淸酒)를 붓고, 수육을 썰며 고사 준비에 들어갔고.
또 다른 한 켠에서는, 검은 정장으로 갈아입은 단역 배우들이 액션 시바이를 맞추고 있다.
한 귀퉁이에서는 이들을 찍는 메이킹 카메라가 돌아간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할리우드와 한국을 오가며 당분간 병행하고 싶다고 하셨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영화에 임하시는 각오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SBC [스타 나들이>를 비롯한 방송국 직원들과, 각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 공통질문을 취합한 뒤 인터뷰를 시작했다.
마침 인터뷰를 하는 공간이 ‘강준 방’ 이었기에 그에 맞는 스냅 컷도 함께 찍었다.
아마도 오늘 오후에는, 영화 [7년의 기억> 촬영 소식이 검색어 순위에 등장할 것이다.
“촬영 준비 할게요! 고삿상 촬영 끝나신 기자 분들은 이제 돌아가 주십시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촬영장 분위기가 방방 뜨거나 하지는 않았다.
“선배님들! 여기 와서 고기 좀 드십시오!”
설강식, 여호석 선배님들 덕분이다.
확실히 이들은, 존재감만으로 촬영장 분위기를 다잡아 버린다.
“점심 먹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떼 씬 이라 촬영 끝나고 나면 저녁 언제 먹을지 모릅니다. 하하!”
“응? 밥도 굶기면서 촬영하시려고? 그럼, 미리 좀 먹어야지. 재희! 인터뷰 끝났으면 여기 와서 고기 좀 같이 들지?”
“네 선배님!”
오늘 촬영 분은, 참여인원이 총 스무 명이 넘어가는 떼 씬 이다.
그것도 액션과 감정이 총망라되는 장면.
첫 촬영이라 쉽게 갈 법도 한데, 설렁설렁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촬영 스케줄이다.
아니나 다를까, 여호석 선배님이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리셨다.
“박 감독. 첫 촬영부터 너무 힘주는 거 아냐? 쉽게 가지 그래?”
그러자 설강식 선배님이 타박하듯 말씀 하셨다.
“박 감독도 어련히 눈치 보일까?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눈치를 줘야겠어?”
박진우 연출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하하, 선배님들 죄송합니다. 세트 스케줄이 꽉 잡혀있는 터라, 빨리 찍고 허물어야… 스케줄에 맞춰 또 찍습니다.”
세트 짓는 시간이 가장 오래 걸린 ‘빌딩 사무실 복도.’
프리프로덕션 기간에 지은 후, 크랭크인 하자마자 찍고 빠져야만 이 자리에 다른 세트를 짓는다.
이런 내부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여호석 선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알지. 그냥 해본 소리야. 껄껄”
선배님들 역시,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촬영이다.
극의 후반부에 전개되는 장면으로, 나와 아버지(여호석)가 진범(설강식)을 확신하고 그를 뒤쫓지만, 거대한 세력에 가로막히는 액션 씬.
남은 수육들을 깔끔하게 비운 우리는, 세트장 안으로 들어섰다.
허름하고 꼬불꼬불한 복잡한 구조의 차이나타운 빌딩 복도를 재현해놓은 세트.
총 3층 높이의 거대한 실내 건물.
중국 식 간판들이 꼬불꼬불 걸려있고, 벌레가 꼬일 것만 같은 음식물 쓰레기봉투, 복도 바닥의 토사물 흔적. 벽에 붙은 껌 딱지 따위들.
세세하고 디테일한 세트가 주는 느낌은 ‘불쾌함’.
그런데 미술, 분장 팀들이 새빨간 피가 가득 담긴 ‘팩’을 들고 주변에 서있다. 이곳에서 하루 종일 와이어, 무기 액션 등을 찍고, 불쾌한 세트에는 새빨간 피가 흩뿌려질 예정이다.
왜냐고.
“리허설 해볼게요.”
“후우”
복도 가득 늘어선 20여명의 무술 팀들과 피 터지게 싸워야만 하니까.
나는 이미 동선 정리를 모두 마친 단역 배우들과 함께 합을 맞춰보았다.
“여기서, 피하고. 피했죠. 이 상태에서 이 친구가 어깨로 부딪히면서 달려올 거예요. 그럼 무릎으로 복부를 쳐 올리고, 옆으로 밀면 되요.”
배우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연극 대사는 평생을 기억하고, 영화 대사는 1년을 기억하고.
드라마 대사는, 하루면 잊는다고.
나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모든 대사를 ‘완벽하게’ ‘평생’ 외울 수 있지만.
이렇게 즉흥적인 액션 장면은, 계속해서 반복 숙달 해야만 한다.
온전히 ‘내’ 실력.
대사 연기에 비해, 조금은 더디지만, 칼과 손도끼가 난무하고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혀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후… 이렇게요?”
“으음, 액션도 깔끔하네요. 좋은데요?”
나름대로 재미도 있다.
이런 내 모습을, 박진우 연출과 설강식 선배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셨다.
“재희, 눈빛 좋은데?”
“그렇죠?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박진우 연출이 메가폰을 잡았다.
“자! 슛 들어갈게요!”
경쾌한 슛 사인이 떨어졌다.
*
경쾌했던 슛 사인과는 다르게 현장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았다.
바스트 컷은, 대역이 가능하지만.
무빙 카메라가 들어간 풀 샷 촬영은 배우 본인이 소화해야한다. 아무리 합을 완벽하게 맞추었다 하더라도, 사고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난다.
복도 한 구석에 숨겨져 있던 무전기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 조심 입니다. 무조건 조심. 다들 신경써주세요. 자, 갈게요! 하나, 둘, 셋! 액션!
위이이잉!
동시에 허공에 매달려있던 와이어 카메라가 빠르게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다.
상대방의 주먹을 피하는, 1인칭 시점을 연기하는 장면.
“….!”
나는 고개를 옆으로 황급히 꺾었고, 카메라는 내 귀끝을 지나쳐 날아갔다.
그 상태에서 투(Two)카메라의 무빙에 맞춰 약속된 움직임을 시작했다.
“히야아압!”
복도 끝에서 가장 먼저 덤벼드는 남자의 복부를 발로 차고, 날아드는 칼을 피해 황급히 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쿵!
무작정 들어오고 나니, 조그만 미용실.
“꺄아!”
내 갑작스런 난입에 미용사와 손님들이 일제히 놀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벽 가배 사이에서는 카메라가 내 바스트를 잡고 있고.
3초를 센다.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뒤 따라 들어선 남자들을 마주보았다.
아, 골치 아픈데.
“하… 네들 대체 뭐야?”
내 질문에 선두에 있던 남자는 뒷주머니에서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무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소매를 걷기 시작했다.
나는 턱을 45도 꺾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햐, 이거 단순한 살인자 새끼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야? 대체 정체가 뭐야?”
누나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형사가 되었다.
7년간 멈추다시피 한, 미제 사건의 끝.
그 끝에서 확인한, 내 비루했던 지난 삶의 결말.
내 누나를 죽인 그 놈은. 멀쩡한 사업가의 얼굴을 한 채, 자신이 죽인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단순한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자, 이제 나는 형사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피해자 가족의 금치 못할 분노 사이에 섰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지난 7년간,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가.
나는 빠르게 손을 뒤로 뻗어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정면을 향해 조준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헉!”
일발 장전되어있던 공포탄이 터지고,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쫄지 마. 공포탄이야.”
“….”
나는 비릿한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이제 시작 하자.”
복수의 끝에 섰다.
[ 책 먹는 배우님 – 95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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