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97)
97.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부시게 아름다운 봄이 되었다.
내 할리우드 행이 결정되었다는 보도들이 쏟아지고, 영화 [7년의 기억>이 크랭크인 한지도 벌써 두 달이 훌쩍 지났다.
4월.
거리에는 벚꽃이 흩날리고, 봄 냄새가 만연한 지금.
“오늘 이 장면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박진우 연출이 이 순간을 위해 미루고 미뤄온 장면.
[7년의 기억>의 마지막 촬영이 시작되었다.누나와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는 ‘강준’과 ‘하윤’의 파노라마 컷.
고교 시절, 20대 초반 시절, 그리고 현재.
같은 장소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점을 연기해야 한다.
첫 장면은, 고교 시절.
분장으로 어려 보이게 만든 후, 교복을 입고 가발을 써 두상에 맞게 다시 컷트를 거쳤다.
“이게 어떻게 삼십 대야? 교복을 입어도 잘 생겼네?”
분장 팀장님이 내 앞머리를 정리하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으음, 팀장님이 너무 젊게 만들어 주셔서 그런가?”
나이 서른에 교복을 입다니.
색다른 경험이다.
그 때, 연출부 세컨드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형님, 준비 끝나셨… 우와.”
“이상해요?”
“아뇨.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그런 연출부를 향해 분장 팀장님이 물었다.
“너가 올해 몇 살이지? 스물여덟인가?”
“스물 일곱이요.”
“재희 봐. 이게 서른이야. 믿기니?”
“아, 팀장님! 재희 형이랑 비교하시면 어떻게 해요!”
나는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 준비 끝났으니 시작하시죠.”
“네!”
무전기가 번뜩였다.
“자! 슛 들어갈게요!”
*
나는 벚꽃나무 아래 벤치 앉아있다.
혼자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생겨난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누나가 서 있었다.
“… 뭐야?”
누나가 내게 물었다.
“많이 아팠지?”
내 뺨 한 쪽이 빨갛게 부어있다.
“….”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없었고, 아버지는 무능력했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공부에도 흥미가 없었고, 일탈하듯 항상 집 밖으로 나돌았다. 당연히 집안은 화목하지 못했다.
이런 집안을 돌보는 일은, 온전히 누나의 몫이었다.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좀 있어.’ 내게 충고하던 누나에게.
‘시끄러워!’ 쓰레기 같이 버럭 고함을 질렀더니 아버지가 내 뺨을 후려갈겼다.
철썩!
‘누나에게 그게 무슨 개 같은 말버릇이냐!’
‘왜 때려 왜! 해준 게 뭐 있다고!’
별안간 소리 지르고 도망쳐 나온 곳이, 인근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벚꽃나무 아래 벤치.
누나는 내 손에 들려있던 담배를 빼앗으며 말했다.
“누가 이런 거 피우래?”
“….”
“피우면 기분이 좀 나아져?”
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누나가 양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한 번 피워볼까?”
그리고 벤치에 올려져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어올렸다. 내가 눈을 번쩍 떴다.
“뭐하는 짓이야?”
누나는 담배를 한 개비 들어 올리더니,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기 시작했다.
틱, 티딕.
“야! 너 미쳤냐?”
내가 담배를 황급히 뺏으며 집어 던져버렸다.
담배 한 개비가 바닥을 구른다.
“미쳤어? 네가 담배를 왜 펴?”
퉁명스러운 내 물음에, 누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러는 너는? 뭐가 그렇게 힘들어서 담배를 피워?”
내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린다.
누나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끊을 거지?”
“…. 몰라.”
밤하늘.
가로등 하나만이 번뜩이는 벚꽃나무 아래. 그 가로등 불빛이 떨어지는 벚꽃을 비춘다.
배경은 멈추고.
시간만 바뀌었다.
내 담배를 빼앗을 누나는 이제 없고.
어느새 성인이 되어 군 전역 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 혼자만 벤치에 앉아있다. 그런 내 손에는, 여전히 담배가 들려있다.
복잡한 표정으로 담배를 물었다.
“후우-”
뿌연 연기가 입에서 뿜어져 나오고 카메라 앵글이 허공에 떠오른 연기를 따라 틸 업(올라간다)된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벚꽃과 연기가 만난다. 앵글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어느 새,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내가 앉아있다.
형사가 된 나.
‘복수’를 끝낸 나.
온 몸은 상처투성이다. 눈 위에는 헝겊을 붙이고 있고, 머리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엉망진창의 모습.
하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밝다.
입에는 여전히 담배가 물려있지만, 불은 붙어있지 않다.
입 꼬리가 슬며시 올려가고, 이내 중얼거렸다.
“… 끊을 수 있다.”
드디어.
벚꽃을 타고 흐르는 나레이션.
벚꽃은 어느 꽃보다 아름답지만, 그만큼 빠르게 진다.
마치, 청춘처럼.
또, 내 누나처럼.
“컷! 오오오케이!”
*
봄이 되고 벚꽃이 질 무렵, 영화 [7년의 기억>이 크랭크 업(촬영 종료) 되었다.
“아이고- 이렇게 끝나네.”
“다들 수고 하셨습니다!”
“재희 씨, 수고했어.”
“감독님도 고생하셨습니다.”
영화 한 편의 촬영 기간은 보통 이 개월에서 육 개월까지. 그리고 흔치는 않지만, 길게는 1년도 잡아먹는다.
장르와 로케이션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정확한 연기와 준비된 콘티뉴이티만 존재한다면.
보통, 삼 개월 안에 끊을 수 있다.
내가 이제껏 촬영했던 영화들은 모두 그래왔다.
“이거 남은 제작비로 스탭들 보너스 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 달이나 당겼는데?”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애초에 4개월 이상을 예상했던 촬영기간과는 다르게 빨리 찍을 수 있었던 이유.
“에이, 보너스 있으면 재희 씨 드려야죠? NG를 한 번 안 내고 완벽하게 준비해 온 배우는 내, 영화 인생 10년 만에 처음 봐요.”
“크으! 그 뿐인가? 이번 영화에서 연기력 포텐 제대로 도져버렸죠?”
스탭들은 내게 공을 돌렸다.
“오늘 소고기 회식 입니다! 이것도 일당으로 칩니다! PD님 께 허락 맡았으니 무조건 참석하세요! 불참자는 없습니다! 하하”
촬영 종료 이후, 술자리가 이어졌다.
뜨끈한 찌개와 치이이익! 불판 위를 가득 메운 야끼니꾸에 사케와 소주를 곁들여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술이 얼큰하게 취할 때 까지, 영화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느낌 좋은데요? 그러니까, 이렇게 어마어마한 배우들이 참여했지!”
영화 [7년의 기억>.
이야기의 시작은, 뻔한 신파의 형태를 취한다.
가난한 집이 싫었던 아들.
씩씩한 누나.
무능력한 아버지.
그러던 어느 날 누나가 갑자기 실종되고 누나의 흔적을 찾아 방황한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말에 분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도 분노한다.
그렇게 몇 달.
시체가 발견된다. 누나로 추측할 뿐. 장기고 뭐고, 아무것도 찾아 볼 수가 없는 참혹한 상태로.
영화의 큰 줄기는 사라진 누나를 찾기 위해 아들이 형사가 되고, 아버지는 7년간 매일 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다- 7년간의 방황의 종지부를 ‘똑같은 복수’라는 형태로 취하는 범죄 스릴러지만.
남보다 못했던 아버지와 아들. 그 사이를 유일하게 이어주던 누나라는 가족이 사라지고 난 뒤, 남겨진 아버지와 아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재구성되는 의미를 갖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극장을 찾았다가, 제법 진지한 고민을 안고 나오게 만드는 영화.
이런 영화들은, 으레 흥행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문가들의 평가는 외면 받기 마련이지만.
“스틸 촬영했던 기사들 평도 대체적으로 호의적이에요.”
“맞아요. 기자 시사회 때, 혹평만 피하면 흥행 가능성은 높잖아요.”
영화사 [너울>의 운명이 걸려있기 때문에 흥행을 작정하고 만들었지만, 박진우 연출의 기본 영화색은 남아있다.
아직 까지는 느낌이 좋다.
그 때, 설강식 선배님이 나를 부르셨다.
“재희, 일루 와봐.”
“네, 선배님.”
내가 설강식 선배님 옆자리로 이동했다. 선배님이 물으셨다.
“다음 주에 미국 간다고?”
“네.”
내 [7년의 기억>은 여기서 끝이다.
이제, 언제가 될지 모를 개봉 결과만을 기다리며- 이제 미국으로 향한다.
더 높은 도약을 위해서.
“가기 전에, 내 부탁 하나 들어주고 가.”
“부탁이요?”
“응, 별건 아니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설강식 선배님이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드셨다.
꺼내 드신 것은 [7년의 기억> 대본 한 부였다.
“가기 전에 여기 사인 하 나 해주고가.”
“예?”
사인?
내가 되묻자, 선배님은 민망하신지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래. 우리 딸내미가 재희 팬이야. 푸흐흐흡.”
“… 아.”
“애비가 재희랑 같은 영화에 나온다니까, 사진 찍어오라고 난리야 아주. 미루다, 미루다 이제야 부탁하네.”
아아.
나는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해드려야죠.”
카운터에서 펜을 건네받아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선배님과 단 둘이 셀프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아, 아냐. 이거 지우고 다시 찍어. 다시.”
“푸흡, 네. 다시 찍겠습니다.”
“앗! 두 분만? 저도! 저도 같이 찍어요!”
“어? 나도 나도!”
그러고 보니, 동료 배우들과 개인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진이라고는 언론 보도용으로 찍은, 단체 사진이 전부.
이제껏 ‘인간 도재희’가 아니라, ‘배우 도재희’로 주변인들에게 머문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 아니겠는가.
문자로 전송 받은 사진을 내려다 보시던 설강식 선배님이 내 어깨를 두드리셨다.
“웃으니까 보기 좋네.”
“….”
아.
이 느낌.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다.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선배님, 저도 사인 한 장만 부탁드립니다.”
“응? 누가 내 팬이야?”
“네.”
“누구? 어머님?”
“아뇨. 저요.”
“… 뭐?”
“푸하하!”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짜식이! 됐어. 안 볼 사람처럼? 그냥 나중에 한국 들어오면 살갑게 소주나 한 잔 사주십시오. 이렇게 전화나 한통 해”
“하하! 네, 선배님.”
*
일상의 모든 감정을 ‘간직’ 해야만 배우가 된다.
꽤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지 않은가.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는 배우.
상복을 입고 상주가 되어 조문객들에게 절을 할 때도.
‘호상이야.’
누군가 말한 호상이라는 말에- 죽음에 좋고 나쁨이 어디 있냐며 속으로는 욕지기를 내뱉지만, 겉으로는 쓴웃음을 지어야만 하는 상황들에서도.
그 당시의 모든 감정을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야, 진짜 배우가 된다고.
잔인하지만.
아, 이때의 감정은 이렇구나.
이렇게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구나.
슬픔이 너무 넘쳐, 숨 쉬지 못할 정도로 헐떡일 때의 호흡은 이렇구나.
100% 순수하게 슬퍼하지 못하고 자꾸만 계산하게는 스스로가 너무 혐오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다고.
그 배우는, 지금 전 국민이 믿고 보는 배우가 되었다.
‘삶에 연기가 있다.’
설강식 선배님의 이 조언은, ‘책’과 ‘욕심’ 속에서만 연기했던 내 배우 생활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다.
맞는 말이다.
‘삶’ 속에서 얻어낸 배움으로, 할리우드 오디션에서 합격을 맛보았던 ‘결과물’도 있지 않은가.
그 뒤, 내 생활에는 조그만 습관이 하나 생겼다.
평소 내 일상을 기록하고,
책 속에 존재하던 내 삶과 비교해본다.
보다 더 진실 된 연기를 위한 훈련.
그리고 나는 이제.
조금 더 높은 곳을 위해 도약하려 한다.
나는 국제우편으로 도착한, [아다지오adagio>의 영어대본을 내려다 보았다.
‘JaeHee Do’. 내 이름이 한 귀퉁이에 적혀있고, 큼지막한 음표 그림 안에 유명 할리우드 배우, 존 미켈의 얼굴이 모노 모자이크 톤으로 처리되어 그려져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대본.
그 대본이 내게 물었다.
[흡수 하시겠습니까?]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책 먹는 배우님 – 97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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