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an Actor’s Book RAW novel - Chapter (98)
98.
영화, [아다지오>.
음악 용어로 ‘천천히’를 뜻하는 이 영화.
미국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옵티미즘(optimism낙관주의)형식을 띄고 있는 작품.
말 못하는 천재 송라이터, 동양인 보컬, 아웃사이더 드러머,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베이시스트 등.
인종, 나이, 고향을 막론하고 모인 어딘가 부족한 청춘들의 느리지만 희망찬 ‘도전’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도전에 대한 보상은 ‘달달’하지도 ‘씁쓸’하지도 않는, 전형적인 음악영화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시나리오 점수는.
[65/100] (+21)참담할 정도로 낮은 완성도.
‘할리우드’, ‘폴 안토니’ 감독이라는 키워드가 아니었다면 반드시 걸렀을 만큼 낮은 점수의 영화다.
그런데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치는 이상하게도 압도적으로 높았다.
하지만 이제껏 영화들은, (+) 가능성 수치에 대해 유동적인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는 + 21 보다 현저하게 부족할지도 모른다는 것.
즉, 소위 말하는 ‘대박’은 아닐 것이다.
‘폴 안토니’ 감독이 전작만큼이나 제대로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제 ‘팩트’.
하지만.
“….”
연출만큼이나 중요한 ‘음악’을 담당하는 그녀의 손이 닿기 전의 수치들.
내가 ‘엘라니 오코너’의 노래를 불렀을 때 이 영화의 가치가 얼마나 올라갈지에 대한 부분은 섣부르게 확신할 수 없다.
단순히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이 존재할 것이다.
일전에 LA의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그녀의 음악은, 확실히 좋았다.
영화의 따뜻한 온도에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는 배색.
주인공이 바라보는 회색빛 도시 LA에 대한 감상.
머릿속이 궁금해지는 보랏빛 음악들.
여전히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는 멜로디 라인을 따라 흥얼흥얼 거리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 밖을 보니 벌써 어둑어둑해져있다.
그리고 옷방 구석에 서있는 캐리어를 바라보았다.
“슬슬, 짐을 싸볼까.”
이제, LA로 출발 할 시간이다.
*
저번 일정과는 다르게 이번 방미 일정에서는 도재희 크루의 인원이 확실히 간소화 되었다.
한국에서 출발하는 인원은 총 4명.
동시 통역사는 UAA에서 준비될 예정이고.
나와 재익이 형, 영미 씨.
이렇게 고정 멤버 3명에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미국에서 전반적인 내 헤어 메이크업을 모두 챙겨 줄.
“초희요.”
“… 아. 네.”
메이크업 아티스트 초희 씨.
나이는 어리지만, 경력은 이미 웬만한 ‘실장급’ 부럽지 않다는 그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영미 씨와 닮은 점이 많았다.
둘 다 작은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대 피플들 기를 다 죽여 버릴 것만 같은, 현란하고 치렁치렁한 패션 센스부터.
명품을 좋아하고, 염색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저 원래 여기 있을 급이 아니에요. 열여덟 살에 시작해서 청담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걱정 마세요.”
거기다, 어마어마한 자신감까지.
“하하, 네.”
그래, 프로는 일만 잘하면 되지.
초희 씨는 영미 씨와 죽이 잘 맞는지 첫 만남부터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선글라스를 끼고 한껏 여유를 부렸다.
재익이 형이 그런 초희 씨를 보며,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보면 초희 씨가 배우인줄 알겠어요?”
“네? 저 예뻐요?”
“…. 아뇨. 선글라스 벗으라고요. 비행기 안에서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어요? 뭐가 보이긴 해요?”
“…. 어?”
초희 씨가 화들짝 놀라며 눈가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으며 눈을 끔뻑끔뻑 뜨며 말했다.
“아, 어쩐지.”
“….”
어쩐지? 뭐야, 모르고 있었던 거야?
캐릭터 이상해.
어쨌든, 이번에 다시 찾는 LA는 총 열흘짜리 일정이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엘라니 오코너 프로듀서의 보컬 레슨과, 밴드 마스터 휘하 합주 트레이닝이 잡혀있다. 본격적인 ‘밴드’의 그림을 그려보며 촬영 전, 모든 ‘합’을 맞춰놓을 예정. 거기다 포스터 촬영과 투자자 미팅도 예정되어있으니 널널한 여행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도착하면 할리우드 크루들이랑 절대 잡담하지 말아요. 알았죠?”
재익이 형이 영미 씨와 초희 씨를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괜히, 어설프게 친해져서 얕보이지 말라는 조언.
가끔 스탭들 간의 문제가 촬영장 분위기에 발목을 잡기도 하니, 으레 있는 말들이다.
하지만 영미 씨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투로 말했다.
“저기 실장님.”
“응?”
“말이 통해야 말을 하죠.”
“….”
재익이 형이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네?”
*
LA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UAA에이전트 빌은 쌍수를 들어 올리며 나를 반겨주었다.
“오! 환영합니다. 재희.”
나는 빌의 손을 마주잡았다.
“고마워요.”
그러자 빌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난 재희가 붙을 줄 알았어요. 이렇게 빨리 다시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뻐요.”
“….”
아닐 텐데.
분명 이들은 ‘미야모토 료’가 붙기를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서 뭐하겠는가.
누가 붙던 UAA 입장에서는 이득이고, 나 역시 앞으로 함께 가야할 운명공동체에게 섭섭함을 미리 드러낼 필요는 없다.
“출발하죠.”
가식적인 영업용 미소를 짓고, 우리는 밴에 올라탔다.
물론, 이들의 일 처리가 미흡하다 던지, 내게 불신을 심어주는 순간 내가 아니라도 재익이 형이 먼저 따져 물을 것이다.
공과 사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쩍, 벌리고 말았으니까.
“이곳이 하이마운트 측에서 제공한, 배우들 장기 숙소입니다.”
“꺅!”
영미 씨는 신난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할리우드 스케일이라니.
앞으로 미국 일정 내내 묵게 될 숙소.
호텔은 아니었다.
일종의 펜션, 혹은 별장.
배우 둘 셋과 그의 크루들이 함께 머무는 일종의 쉐어 하우스.
하지만, 어지간한 호텔보다는 넓고 쾌적하다.
빌이 말했다.
“하이마운트에서 배우들을 위해 마련한 렌트 하우스에요. 하지만, 촬영 기간에 여기서 주무실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겁니다.”
“왜죠?”
“재희 전용 트레일러가 있으니까요.”
“… 아.”
캠핑 트레일러.
촬영 시간 동안 배우나 스탭이 잠시 쉴 수 있도록 만든, 매우 협소하지만, 누울 수 있는 침대가 존재하고 TV와 냉장고도 설치되어있는 원룸형 컨테이너 박스.
국내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생각보다 보급화 되어있지는 않다. 관리의 문제도 있고, 갯수도 적다. 워낙 빡빡한 촬영 일정이 돌아가기에 대부분 차에서 잠시 쉬는 것이 전부.
하지만.
“할리우드의 트레일러 시스템은 어디에도 따라 올 수 없죠.”
기대해도 좋다고 한다.
“재희 트레일러를 트럭에 실고 촬영 내내 재희를 따라 다닐 겁니다. 언제든 쉴 수 있도록.”
“….”
이거, 기대 되는데.
확실히 할리우드 대우가 남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은.
마치, 빨래나 세탁 등을 우리가 해야 할 것 같은 자취 공간 느낌이지만 일하시는 전용 홈헬퍼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예약을 할 경우, 정해진 시간에 식당으로 내려오면 식사가 차려진다.
영화에 출연하는 주 조연에 대한 대접도 무슨 왕자님 공주님 수준인데, 하물며 걸어 다니는 대기업인 잘 나가가는 ‘할리우드 스타’들은 어떨까?
“….”
흐음,
모두 상상해보기엔, 내 상상력이 너무 빈약하다.
“좀 쉬었다가, 오늘 저녁은 여기서 먹는 게 어때요?”
내 제안에 재익이 형이 말했다.
“그거 좋지. 내일 노래하려면 오늘은 푹 쉬어야지.”
그리고는 영미 씨와 초희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죠? 술도 안 되니까, 어디 가서 술 사올 생각 꿈에도 말아요.”
그러자 영미 씨의 얼굴이 굳어진다.
“… 쳇.”
아무래도 미국에 온 기념으로 고주망태가 될 때 위스키를 까지 마실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어이, 이봐요.
우리 놀러온 거 아니라고.
*
이미 한 번 와본 LA라 그런가, 할리우드 사인을 보고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는다.
매일 같이 지나치는 63빌딩이나 한강의 광경이 그다지 놀랍지 않듯.
자연스럽게 LA에 녹아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UAA 밴을 타고 할리우드 북쪽에 위치한 스튜디오 시티Studio city로 들어섰다.
강남의 신사동을 연상케 하는 작고 예쁜 건물들이 블록마다 줄지어 늘어서있었는데, 모두 카페, 식당, 촬영을 위한 대관장소 혹은 스튜디오 였다.
인근에는 하이마운트 픽쳐스를 비롯해, 유니버셜, 디즈니, 드림웍스 등. 유수의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회사가 존재하고 유명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네.
이곳에 하이마운트 측에서 준비한, 트레이닝 스튜디오가 있다.
“우와, 도시 전체가 그냥 영화만을 위해 만들어진 곳 같아요.”
초희 씨의 순수한 감탄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요.”
어렸을 적 보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들이 떠오른다.
온통 기계로 만들어진 메카닉 시티나, 동물들만이 사는 곳.
도시 분위기 자체가, 예술가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 같다.
[Martin`s Music>.마틴 스튜디오. 오늘 나와 엘라니 오코너, 그리고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들이 모일 장소.
“한 시간 여유가 있으니, 식사부터 할까요?”
“그러시죠.”
점심 식사를 위해 조금 일찍 숙소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마틴 스튜디오 맞은편에 위치한 브런치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 안에 작은 정원이 예쁘게 꾸며진 곳이었다.
“주문은 제게 맡기세요.”
자주 와본 곳인 듯, 에이전트 빌이 자신있게 음식을 주문했고 우리 크루는 테이블에 앉아 기다렸다.
가게 분위기 자체는, 조금 붕 떠있는 분위기였다.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다수가 1인 혹은 2인 테이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웅얼웅얼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I remember, she used to come home and tell us stories about being abroad…”
“my aunt used to live in paris”
주변에 있던 다수의 사람들이 음식이나 커피를 마시며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거나 한 것도 아니다.
마치, 미친 사람마냥 혼자 중얼중얼 떠들고 있는, 한국에서 보기 힘든 생소한 모습에 영미 씨가 얼굴빛을 바꾸며 말했다.
“다들 왜 저래요?”
“…. 그러게요.”
나도 궁금해요.
그 때, 주문을 마치고 온 빌이 영수증을 흔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늘 이 근방에서 오디션이 있나 보군요.”
“네?”
“오디션이요.”
오디션?
“아, 그럼 전부 배우들이에요?”
대사를 외우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내 물음에 빌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네.”
그리고 얼굴을 당기며 조언했다.
“할리우드에서 혼자 중얼중얼 대사를 외우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왜냐면요.”
“….”
“이곳에 사는 사람들 절반은 배우 지망생들이니까요.”
또 그 중, 절반은 현장 관계자.
내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자, 빌이 새삼스레, 간질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영화의 땅이라는 사실을, 다시 인지시켜 주어야 겠군요.”
영화의 땅.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배우들. 길거리를 거니는 다수의 모든 사람들이 내 잠재적인 경쟁자들.
할리우드에 사는 사람 절반은 배우 지망생이라더니.
하하, 새삼 여기가 한국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불편해서 밥은 제대로 먹겠어?
“긴장되나요?”
빌의 질문에 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 재밌는데요.”
[ 책 먹는 배우님 – 98화. > 끝ⓒ 맛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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