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944
세계수를 따먹다 944화(945/946)
나무가 인간인 세계에 떨어진 뒤, 수년하고도 절반.
성인이 되고서 지내온 세월은 어느덧 고향에서 보내온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저벅.
‘3년이라.’
원망의 세계수를 찾아가는 길. 차원을 넘어, 앞으로 발을 딛으며 오랜 생각에 잠겨본다.
납과 콘크리트로 때워진 텅 빈 복도의 끝 없는 깊이는 옛 기억을 돌이키기에 나쁘지 않은 환경이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네.’
갓 성인이 된 대학생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스무살에서 스물 세 살.
누군가에겐 청춘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고. 군대만 다녀와도 절반이 날아가 버리는 짧은 세월이 될 수도 있다.
바쁘게 살아오면 훌쩍 지나가기도 하지만, 어렵게 살면 그만큼 괴롭게 느껴지는 애매한 세월이라. 전후 세계에서 각각 3년을 버려온 내게는 상당히 뜻깊은 시간이었다.
‘거기서 어떻게 살았는지. 기억도 안 나.’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겪어 온 희노애락만은 뚜렷하게 돌이킬 수 있었다.
내게 3년이란 뭔가를 이루었다가 잃기에도.
쌓아온 신뢰를 무너뜨리기에도.
건강이 영구적으로 망가지거나, 쓰러져 앓고,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싹싹 빌면서 후회하고, 자만해 폐를 끼치고, 골방에 썩어가며 죽음을 결심하기에 넉넉한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그 3년은, 심적으로 죽어가던 누군가가 다시 살아갈 다짐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코미디 영화로 방영해도 우스울 저렴했던 관계가 깊이 발전하고.
늘 회피하기 바빴던 방구석 백수가 무언가를 지킬 생각도 하고.
상상으로나 할 법한 일들을 겪어오며 정말 많은 경험을 쌓아왔더랬지.
‘…….’
그 방향이 올바른가를 따지자면 나는 천하의 몹쓸 놈이 되어버리겠지만.
앞서 말한 3년을 모두 보낸 내게 두 삶 중 선택을 내리라 묻는다면, 틀림없이 현재를 반복하리라 답할 것이었다.
‘사실.’
돌아오기엔 너무 많은 게 쌓여버렸지.
반대로 말하면, 23년간 쌓아온 내 삶이 이곳의 3년보다 덧없기 때문일지도.
무언가에 쫓기듯이 몰두하며 살아온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자신보다 자신이 만들어 가거나 만들어 온 것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성향이 없지는 않은 듯해서, 내가 일군 것들이 별로 없는 옛 기억은 아무리 기를 써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두근.
너무 많은 일을 해치워서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던 부모님의 얼굴도 슬슬 잊혀지고 있었다.
가끔 나도 모르게 아버지에 대해 말을 꺼낼 때가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에 가깝고. 나도 말을 하면서도 ‘이런 적이 있던가?’ 되새길 정도이니 말 다 했지.
-저벅, 저벅, 저벅.
요즘 뻔뻔해졌다는 말을 많이 듣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23년간 쌓아온 상식이 흐릿해지면서. 날이 선 분위기에 적응하다 보니 변한 거지.
-저벅, 저벅, 턱.
발걸음을 뚝 끊었다. 뚜렷한 기척을 느끼고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메마른 얼굴의 소녀가 내 눈에 들어오고, 나는 감흥 없는 얼굴에 미소를 덧씌우며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
내 인생의 전환을 가져온, 어찌 보면 고맙기도 한 녀석.
살얼음판 같은 공기를 깨고 침묵한 녀석에게 물었다.
“너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지?”
꼬마의 얼굴이 한 차례 일그러진다.
눈썹이 사납게 솟구치고 입술이 꿈틀-
무척 그리운 복장을 한 녀석은 내가 사랑하는 딸을 빼닮고 있었다.
“…….”
“…….”
꼬마의 붉은 기운이 어깨선을 타고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겹쳐지는 명백한 적의. 살의.
같잖게 노려봐 오니 갑자기 이 세계에 오고 나서 겪어온 위협의 수를 돌이켜보고 싶어졌다.
‘사이비 교단의 벌레 하나 어찌 못해, 세영이한테 기대고 있었을 때.’
자포자기의 상태에서 받아들인 살기가 얼마나 무서웠던지.
평소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첫 살인을 거기서 저질렀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도 너희였지.’
진달래의 가정을 망친 사이비는 원망이 세운 교단의 분파.
엘 아카데미의 인공 던전을 악용해서 나를 납치한 것도 이 녀석. 시간 차이가 꽤 나지만 오늘 밤을 납치한 것도 이들이었다.
처음에는 뭐 대단한 흑막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세상 만사 뭐든 짜임새 있게 굴러가는 건 아닌 모양.
세피로트나 정의, 플라워와 비교하면 그냥 나와 엮인 게 많은 잡범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답은 안 하는 거냐?”
“…….”
그래. 나랑 엮인 게 많을 뿐인, 아주 개인적인 사이.
귀목인 밤을 빼면 지금 목전에 놓인 큰 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딱히 신경쓰지 않는 고로 밉지도 않았다.
나는 여전히 답을 않는 녀석에게 물었다. 모든 게 뒤틀리기 시작한 그때 그 말을 들먹이면서.
“네 말대로, 니 엄마 책임지러 온 거잖아. 대화해야 뭘 풀기라도 하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들을 긁는 최고의 발언.
애들 사이의 불문율을 꺼내놓자, 엄마 사랑 지극한 효녀의 얼굴이 급속도로 썩어들어가기 시작하였다.
“………….”
“그래서 넌 내 아이인 거냐, 아닌 거냐?”
“……!”
표독스럽게 얼굴을 구긴 소녀가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들썩이며 째려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 앵두같은 입술이 벌어지더니.
“…당신, 때문에. 엄마의 모든 게 망가졌어.”
탓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소녀는 치가 떨리는 듯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소리쳤고. 원망서린 목소리에 주변의 공기가 떨리기 시작했다.
“오늘, 당신을 죽이고 엄마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거야. 엄마의 분이 풀리도록. 당신의 모든 걸 망가뜨려서……. 나도.”
한 마디 한 마디에 꾸역꾸역 감정을 눌러 담는 게 보인다.
엄마의 복수를 하겠다는 딸의 마음가짐은 장하지만, 그것만으론 너무 무모한 결정일 텐데.
“……나도, 나도.”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를 보던 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래서. 너랑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이 말이지?”
소녀의 낯빛에 당혹스러움과 노기가 찾아들었다.
본인이 앞서 한 말에 눈앞의 남자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얼굴.
“끝까지, 당신은……. 뻔뻔하게 잘도.”
“뻔뻔하긴. 지금껏 도망친 쪽이 누구인지는 알고 말해야지.”
“!”
조금 더 본심을 드러내도록 속을 긁어낸다.
어차피 이 녀석도 싸울 생각으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으니까.
‘날 죽일 셈이었다면 처음부터 기습하거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세피로트라도 끌고 왔어야 했어.’
녀석은 나를 여기로 데려오기 위해 밤을 납치했고. 이곳에 다다른 내게 선전포고겸 분풀이를 하러 온 것이다.
약간은 아이같다고 해야하나.
무표정한 얼굴에 반해 덜 성숙한 티가 남아 있는 녀석의 성질을 나는 더 적극적으로 긁어보기로 했다.
“그래, 내가 네 엄마 따먹었다.”
“…….”
“그래서 너랑 네 엄마가 나를 이 세계에 떨어뜨린 거지. 나는 죽을뻔한 고초도 겪고, 말도 못할 정도로 울고 아팠다.”
덤덤하게 사실만 얘기한다.
내 입장에서 겪고 아팠던 걸 읊는 것만으로, 녀석의 속이 뒤집히는 건 불보듯 뻔했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다.”
“…….”
“그런데 뭐 어쩌라고? 같은 얼굴을 하는데. 네 입장에선 내가 힘든 걸 이해 못 하겠지. 너랑 네 엄마는 한 번도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사람을 소모품으로 알고, 하등하게 바라보니 별 수 있나.
선악을 떠나. 우리의 인격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 놈들이고. 밤이 이곳에서 당한 취급을 생각하면 알 수 있었다.
사이비니 뭐니, 그 녀석의 입장에선 자신을 모시는 집단이 커지고 있으니 마냥 좋다고 했겠지.
진달래가 그런 일을 당하든, 우리가 어떤 피해를 보든 다른 차원과 다른 종족의 이야기인데 신경 쓸 이유가 있겠냐고.
“너희들이 날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큼, 나도 똑같아.”
그래서 나도 똑같이 말해본다.
“내가, 뭘 어떻게 알고 나무가 인격체인 걸 알았겠냐?”
그 날 우연히 발견한 새끈한 나무가, 이 세계의 이교도 여신이었다?
소설로 써도 안 팔릴 거지발싸개같은 장작을 어떻게 떠올리고 미연에 방지하겠냐고.
“내가 살던 세계의 입장에서 너희들은 말이다. 잘라서 종이로 만들거나, 조각을 깎거나, 관상용으로 키우고. 열매를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야.”
관상용. 열매를 얻기 위한 수단.
이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멀쩡한 귀족 여자를 벗겨 놓고 구경하며. 성적 쾌락을 주어 열매를 취한다는 느낌인가.
실제로 소녀는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이기적이고 그런 걸 떠나서, 본인이 살던 세계와 동 떨어진 무언가에 질색팔색한 눈빛이었다.
“……윽.”
역겨운 표정 하지 마라. 우린 그게 당연하다고.
내 입장에서 내가 겪은 일을 소설처럼 말해 보자면, 오나홀에 박았더니 사실 대학 여신의 생식기와 이어져 있어 강간죄로 감옥을 간 거나 다름없는 이야기다.
말하다 보니 그라데이션 분노가 차오르네.
내가 부끄러운 짓을 했지만 죽을 잘못을 한 건 아니지 않는가?
“진심, 이야?”
“그럼?”
“적어도 지금은, 당신도 알고 있잖아. 엄마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무작정 날 죽일 생각만 가지고 있던 너희들한테 해줄 말은 없지.”
이해?
못할 거 없다.
오히려 내가 원망보다 더 많이 세계수에게 강간당했을 테니. 거진 완벽한 재현을 겪어봤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엄한 놈이 갑자기 찾아와서 좆을 쑤셔박은 거.’
죽일만큼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입장을 말하는 거지, 나를 원망하는 이유를 묻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네 사정을 이해하고, 너희는 갑자기 목숨을 노려진 내 사정을 듣지도 않는다라.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시바와 닮고, 심지어 마음이 좀 여린 녀석에게 심한 말을 하는 게 걸리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충혈된 눈을 깜빡이던 녀석은 호흡을 정돈하지 못하고 입술을 꿈틀대다, 마침내 폭발한 듯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엄마는, 당신 때문에 모든 게 망가졌어. 웃음을 잃고. 나를 낳아서도 한 번도 날 보지 않았어. 나만 보면 당신이 생각난다고, 매번……. 매번.”
애정결핍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얘가 나를 원망했던 건 엄마의 사랑 때문이었던 걸까.
“그래서. 내가 너한테 죽어줄 이유가 되는 건 아니지.”
“……당신은 내 손에 죽을 거야. 기필코.”
건조했던 얼굴에서 눈물이 뚝.
뒷걸음질 친 소녀가 어둠 속에 스며들며 모습을 감추었다.
시바를 닮은 녀석이 사라질 때까지 느긋이 그 광경을 관찰하며, 녀석의 말을 머릿속으로 돌이켰다.
─나를 낳아서도 한 번도 날 보지 않았어. 나만 보면 당신이 생각난다고,
내가 아무리 상놈 중의 가장 난 상놈이라지만. 내 혈육을 못 알아보진 않는데.
시바와는 달리 녀석에게는 그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아서, 저 말이 귀에 걸렸다.
‘잡아 놓으면 알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등을 돌렸다.
긴 복도가 이어져 있을 그곳엔, 더 이상 길은 보이지 않았고. 강철 문과 함께 거기에 그려진 작은 글씨가 눈에 보였다.
[죽어.]하나도 무섭지 않은 협박이었다.
* * * * * * * * *
냄새. 그 놈의 냄새!
겉옷을 벗고 땀을 바람에 말린 은행이 번잡한 머리를 이끌고 씩씩대며 길을 걸었다.
‘……하아. 바쁜데, 이런 시답잖은 걸 신경쓰고 있을 이유가.’
차라리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다거나. 옷을 못 입는다고 하면 콧방귀나 끼고 말 것이지만.
냄새는 정말 평소 자신도 신경쓰는 터라 답이 없었다.
“저, 황녀님. 감식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 대단해요! 좌표가 정확히 맞아요. 바로 돌입해도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
와중에 이시헌이 건넨 정보는 정확히 들어맞아서 더 빡친다.
“저기.”
“……넹?”
“저 혹시, 냄새 나나요?”
해독반 유망주 소녀는 은행의 갑작스런 질문에 돌처럼 굳어 되물었다.
“네? 그, 무슨……? 은유적인 그런 표현인가요? 황녀님?”
“아니, 그런거 아니고 정말. 제 몸에서 냄새…가 나냐는. 아후, 됐어요 그냥. 무시해요.”
“……조금은 나요!”
“무시하라니까요!!!!!!!”
“죄, 죄송합니닷!! 그래도 아주 구린 건 아닌-”
째릿. 도깨비가 된 은행이 살기를 풍겼다.
“히이이이이익!”
“됐고, 준비나 하세요.”
“아, 아게쯥니다!”
목인이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황녀의 처음 보는 모습에 얼음이 된 소녀를 두고, 짧게 명령 한 마디를 남긴 은행이 시바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하아.’
갈수록 깊어져가는 콤플렉스.
‘말 안 해도 된다니까 그걸 굳이, 굳이 말해 가지고 사람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게 말이 돼요 정말? 아, 아아! 아.’
혼잣말로 중얼대던 황녀(귀족, 20女, 근친혼 마스터 가문 출신, 최근 자기 냄새가 구린 게 신경 쓰임)는 그렇게 한참을 걷다, 시바가 대기하던 곳에 도착했다.
“……그렇게 안 심한대.”
누가 듣기라도 하면 알겠으니까 그만 좀 하라며 눈치를 줘도 이상하지 않을 히스테리.
큼직한 가슴을 팔뚝 위에 올려. 가슴골에 고인 땀내를 킁킁 맡아 대던 은행은, 문득 시바가 대기하던 곳에서 싸늘한 공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
설마 누가 습격하기라도 한 건가?
급하게 발을 옮긴 은행이 냄새를 폴폴 풍기며 천막 옆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우두커니 선 시바가 까만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바 님?”
“…….”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듯, 무어라 중얼대는 시바.
그 대화의 상대가 마냥 반가운 상대는 아닌지. 목소리에 날이 제법 서 있었다.
“……왜 찾아 왔어? 위키.”
위키?
냄새 때문일까. 그림자에 감추어져 있던 까만 암영의 코가 은행의 실루엣을 보자 살짝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