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945
세계수를 따먹다 945화(946/946)
숯처럼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갑자기 나타난 은행을 주시하는 소녀의 윤곽이 시바의 앞에 튀어나왔다.
걸어두었던 인식 저해 마법을 풀어헤친 걸까.
까만 머리에 하얀 브릿지가 개성적인 유녀는 시바와 은행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딘가 으스대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위키, 라고 했나?’
아이의 이름을 머리에 되새기던 찰나. 아담한 유녀의 미간에 얇은 가로 주름이 새겨졌다.
사람의 지혜로는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신묘함을 흩뿌리던 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첫 마디는.
“으. 냄새.”
냄새. 멀쩡히 서 있던 은행의 몸이 돌처럼 굳는 순간이었다.
“…….”
힘 세고 활기찬 시바, 음흉하지만 무게감 있는 목령왕에 이어, 처음 보는 낯선 꼬맹이까지.
기품있고 차가운 황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그 나이대의 상처 받은 소녀처럼 구겨지더니. 한 술 더 떠 울먹이다 못해 뺨에 바람까지 들어갈 뻔했다.
“냄새나는 거 보니까 그쪽은 백과(白果)……. 황녀죠?”
“냄새…….”
“아빠가 만나면 바로 냄새로 알 수 있을 거라 했어요. 겸사겸사 얼굴도 보여주라고 했고. 딱히 싸우러 온 건 아닌데……. 또 언니가 말썽이네요.”
충격에 허우적대던 은행이 때아닌 정체 고백에 재빨리 정신 줄을 붙잡았다.
“아빠라면…?”
눈을 고쳐 뜨고 나서야 보이기 시작하는 유녀의 이목구비. 동글동글한 인상과 설탕 같은 피부에 감추어져 있을 뿐, 어린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이시헌과 똑 닮아 있었다.
“처음 뵐게요. 언니.”
“…….”
“아빠가 노리는 나무니까, 특별히 인사하는 거예요. 세계수측 인물에게는 절대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 건데. 황녀 언니니까.”
젖니도 다 빠지지 않은 꼬마가 귀에 내리박히는 발음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은행에게 인사했다.
“제 이름은 위키 클리포트. 백의의 현자와 아빠의 딸이에요.”
위키, 클리포트.
세피로트와 정 반대에 놓인 대적자.
아마도 이시헌이 감추고 있던 최악의 흉수.
“……왜 그쪽이 저를?”
현자가 왕에게 넘어간 줄은 알고 있었다만 아이까지 만들었을 줄이야.
저 정도 성장이면 현자는 꽤 오래 전부터 이시헌과 관계를 가져온 것일 테다.
-저벅.
은행의 물음에 답이 돌아오기 직전, 한 발자국 걸어 그녀를 감싼 시바가 위키를 째려보았다.
“언니. 무시하세요. 제 동생이지만 속이 능구렁이 같은 애라, 솔직히 믿을 수 없어요. 지금 이것도 아빠의 의도랑 상관없이 찾아온 거일 수 있거든요.”
위키의 귀여운 고개가 살짝 갸웃하더니, 승기에 가득찬 깜찍한 미소가 흘러 나왔다. 은행은 그런 위키의 표정으로부터 세피로트에게서 느꼈던 묘한 공포를 느꼈다.
“음, 아빠 부탁이 아니었으면. 내가 왜 굳이 위험성을 감수하고 황녀한테 얼굴을 드러냈을까 언니?”
“위키. 합리적인 척하지 마. 적어도 나랑 엮일 때의 넌 항상 감정적이었어.”
“흐응. 내가 그냥 변덕으로 시비를 걸기 위해 왔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콧소리를 낸 위키가 서서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내가 변덕대로 움직였다면 언니는 이 자리에 없었지.”
쨍- 주변 공간이 깨진 창문처럼 일그러지는 환각이 보였다.
심장이 철렁 가라앉은 은행이 압도적인 살기에 몸을 움츠리자, 역방향에서 기세를 드러낸 시바가 은행의 두려움을 덜어내주었다.
하얀 빛무리가 시바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너, 못 하잖아.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말이야.”
“……이래서 내가 언니를 찢어 죽이고 싶어. 아빠는 왜 이런 배신자를 자꾸 챙기려 하는 걸까? 저런 것도 핏덩이라고.”
살벌하다.
태어나서 본 어떤 자매 싸움보다도 훨씬.
틈만 보이면 폐장에 사시미를 쑤셔박을 듯한 분위기에 은행이 긴장해 침을 삼켰고. 위키는 싸우기 위해 온 게 아니라며 자신의 살기를 거두었다.
“아빠 잡아먹을 년.”
시바의 냉랭한 일침에 방긋 웃는 위키.
그 얼굴에 서린 광기는 가족이라도 충분히 경계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아빠 뒤통수치는 년보단 낫지.”
“…….”
뒤통수라.
이시헌의 뜻에 반발하는 모든 행위가 배신이라 규정한다면, 어쩔 수 없는 거다.
위키는 아빠를 맹목적으로 위하고 있으며. 그런 아빠와 노선을 달리하는 시바는 위키에게 철천지 원수 그 이하.
이렇게 말로 다투는 것도 몇 번째인지.
아이 같던 말싸움에서, 감정으로 부닥치다, 검을 쥐어 싸우고, 서로 가면을 쓴 채 모욕적인 언사만 뱉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자매가 서로를 미워해 연을 끊어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나타냈달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은행조차 두 사람 사이에 곪아버린 문제가 얼마나 지독한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시바와 위키는…….
서로 이해시키길 포기하고 앙금만 남은 상태.
시바가 처음 황실로 도망쳐, 그곳에서 위키와 만나 닭똥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며 싸운 그때가 화해의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몰랐다.
“뭐. 언니가 그렇지. 근데 언니, 요즘 아빠가 좀 따뜻해진 거 알아?”
“…….”
“질투 안 하고 천천히 다가가니까. 아빠도 점점 언니를 잊어가는 것 같아.”
날카롭게 다듬어진 위키의 말이 철옹성 같던 시바의 가면을 깨트린다.
시바가 아빠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아는 이라면. 도저히 가만히 듣고 있을 수 없는 한 마디.
아무리 가는 길이 다르기로서니, 가족을 위해 타지에 몸을 맡겨 죽음을 각오한 소녀가 듣기엔 너무 심한 말이 아닌가.
시바는 상처 입은 얼굴을 했지만 어떤 반박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속이 아려도 자신이 감내해야할 일임을 속으로 되새길 뿐. 몇 차례 눈썹이 꿈틀거리기만 했고. 약이 오른 위키가 계속 속을 긁어댐에도 시바는 조용했다.
“언니는 이제 없어도 돼.”
“…….”
“아빠 품은 언제나 따뜻하고, 여길 벗어난 건 언니잖아. 이젠 못 돌아 와. 돌아오면 내가 언니를 죽일 테니까. 왜냐하면 언니는-”
아빠의 명을 갉아먹는 기생충이니까.
후우. 시바가 숨을 뱉었다. 뜨겁고 가녀린 입김이 한여름에도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보다 못한 은행이 시바의 옆을 지나치며 항의했고.
“잠깐.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시바는-”
“됐어요 언니.”
“…….”
나직한 시바의 한 마디에 은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연히 쓸쓸함을 담은 목소리엔 패배감이 묻어 있었지만. 시바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넘겼다.
위키와 진창 싸우던 예전과 달리, 시바의 계획엔 크게 바뀐 점이 있었으니.
스스로 정리하고 떠나길 정한 이상 딱히 위키와 부닥칠 이유가 사라진 것이었다.
“괜찮아요.”
“…….”
“내가, 아빠의 수명을 갉아먹어 온 건 사실이니까. 위키가 화내는 건 당연해요.”
이번에는 위키의 표정에 당혹이 서릴 차례.
조금만 긁어도 득달같이 화를 내던 시바가 답지 않게 기세를 감추니, 이 여자가 무슨 속셈이 있는 건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
“아빠가 날 잊으면 오히려 다행일 수도 있고.”
“…….”
“근데, 딱히 그렇진 않아 보여요. 원래 위키가 허풍이 좀 심하거든.”
꿈틀. 이마에 핏줄이 돋는 위키.
당연하지만 시바의 계획에 변화가 있던 만큼, 위키의 계획에도 변화가 있었다.
시바는 죽음을 각오하며 위키의 안녕을 빌어줘야만 하는 처지였고, 위키 또한 자신의 계획에 딱히 시바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의견적으로 대립하는 건 정말 끝이라는 뜻.
“……언니 정말 싫어.”
“나도.”
이젠 정말 미워하는 마음뿐이었다.
긴 이야기가 아니지만 모욕을 멈추고 마음 정리를 끝낸 두 사람이 눈꺼풀 하나 깜빡이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시바는 희생하길 택했고.
위키는 그런 시바를 태생적으로 좋아할 수가 없었다.
“……이해해. 위키.”
“나도 언니 뜻을 모르지 않아. 그때랑 표정이 다르거든.”
사랑하는 아빠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는 점과, 그렇게 얻은 수명을 자기 멋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
아빠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고. 그런 끔찍한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뻔뻔하게 아빠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다는 거.
하지만 시바가 제 명을 포기한다면, 위키가 시바를 막을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바라는 바지.
‘…….’
시바가 죽음으로써 이시헌이 상실감에 갇히고. 위키의 마음 한구석에 영원히 내리박힐 패배감만……제외한다면.
그 정도는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한 위키는 시바의 뜻에 더 이상의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뭐. 솔직히.
서로 갈 길을 정한 지금 순간, 이 다툼은 결코 시바가 이기지 못하는 싸움이었다.
위키의 완승. KO. 게임으로 치면 항복 선언이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셈.
스스로 자신의 넥서스를 부수고 있는 꼴이니 위키의 입장에선 두 손 두 팔 편히 뻗고 구경만 하면 되는 상황이리라.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위키였지만 마음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굉장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고개만 쓱 돌린 위키가 은행을 바라보며 짧게 사죄했다.
“꼴사나운 모습 보여서 죄송해요. 언니랑 달리 곧 많이 뵐 분이니까. 그리고 제 이야기는 어디가서 하지 말아주세요.”
탁- 바닥을 향해 발꿈치를 내리자 위키의 형체가 온데간데 사라졌다.
이시헌이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고 기척도 남기지 않은 순간이동.
시바는 위키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의자를 찾아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시바.”
현타가 제대로 온 표정. 은행은 시바를 위로하기 위해 말을 꺼내면서도 위키가 뱉어 온 말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제 이름은 위키 클리포트. 백의의 현자와 아빠의 딸이에요.
현자의 딸이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화를 엿들은 바로 미루어 볼 때 시바의 앞에서는 감정적으로 변하는 듯하나. 그것뿐이라면 지금까지 위키의 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을 리 없다.
위키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환경에서만 변덕을 보여주는 타입일 테고.
이시헌의 의도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위키가 전하고자 하는 뜻은 명백해 보였다.
아주 흔한 정치적 교류.
왕국에서 가장 극비로 다루어지는 존재인 위키를 드러내면서 성의를 보이고 신뢰를 산다.
‘이것도 명분일 가능성이 크지.’
애초에 그게 목적이었다면 시바 앞에서 반감을 살만한 언행을 한 것이 문제가 된다.
아니. 그래서 위키가 감정적이라고 한 소리를 들었던 건가?
“언니.”
“네?”
“…누차 말하지만, 전 언니가 가도 상관없다고 봐요. 언니가 건강한 게 최고니까.”
“…….”
또 그 소리다.
이런 말을 하기엔 뭐하지만. 너무 참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숭고한 희생이라도 알아주는 이가 없으면 외로운 법일진데.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면. 희생이라 불리지도 않을 테고 말이다.
“시바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제가 홀랑 넘어갈까 봐요?”
“……음. 너무 신경쓰지 마요 언니. 위키는…. 보고 있으면 옛날 나 같아. 나도 다른 사람한테 마음을 연 적이 없었거든요.”
시바는 아픈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엄마한테도 그랬고, 이모들도. 미운 짓만 엄청 골라 하다가. 사실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지만. 위키는 나보다도 아빠를 좋아하거든요.”
좋아한다를 넘어 사랑까지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은행은 조용히 시바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방향성은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옆에서 들어서 얼마나 잘 아는데요.”
이시헌이 그 정도로 사랑을 받을 만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시바의 마음은 잘 안다.
“그 사람을 좋아하잖아요.”
“…….”
시바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뜨며, 약간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내가 위키보다……. 아빠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건 뭔가 양보하기 싫어.”
우울감에 빠진 한 마디. 그것으로 훌훌 털어낸 시바는 눈꼬리를 손등으로 쓱 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요. 언니. 내 친구 기다리겠다. 삐히.”
“그럴까요. 준비는 끝났어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사인이 들어왔다. 은행은 걸어두었던 장비를 몸에 채우며 쓴 한숨과 함께 모두에게 신호를 보냈다.
-치지직.
“……돌입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