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947
세계수를 따먹다 947화(948/949)
산간벽지에 유폐된 차원을 가장 악질적으로 꾸미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이건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던전이라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시바는 차분히 숨을 가라앉히며 정면을 노려보았다.
하여금 공포로 사람을 다스리려는 수작이 보이는 여러 구조물과 환각.
사람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고 해야하나.
타르로 질척이는 시꺼먼 바닥 아래에 반사된 시바의 얼굴이 일전에 본 크리쳐처럼 기괴하게 변해 있었다.
‘……세피로트라고 했지.’
귀여운 꼬마 아이, 지식의 세계수.
많이는 아니더라도 직접 만나보고.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헤실대는 순수한 얼굴 속에 어딘가 꺼림칙한 기운을 감추고 있다는 인상.
-스윽.
시바는 바닥에 비친 얼굴을 보며 무심코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잘린 목에 듬성듬성 피어오른 나뭇가지. 꼭 미래의 자신을 비추는 것 같아 섬뜩했지만, 당연하게도 진짜 얼굴은 아무 상처 없이 말끔했다.
‘언니를 찾아야 해.’
은행의 전투 능력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각개격파를 당할 우려가 있다. 시바는 어수선한 길을 빠르게 달려나갔다.
-탁, 탁, 탁!
넓은 복도를 질주하니. 벽면에서 돋아난 오돌토돌한 눈알들이 시바를 쫓았다.
거기에 더해 눈썹이 이어진 마른 남자가 담벼락 위로 조용히 노려본다거나.
좋아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번갈아 나타나 시바의 무능함을 탓하기도 하였다.
메리, 동백, 위키에 이어 방금 헤어진 은행까지.
저렴한 협잡질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불편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바가 보는 갖가지 불안은 모두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 번쯤 걸쳐 나온 것들이었으니.
시바는 광원 하나 없는 곳을 질주하며 급한 목소리로 소리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자리에 멈춰섰다.
“언니, 거기 없어요? 거기……. 후우.”
역시 권능을 사용해야하나?
힘의 소진이 많은 ‘운명’은 쉬이 사용하지 말아달라. 걱정하지 말고 자기 몸을 우선하라는 은행의 당부가 있었지만 어떻게 그러겠는가?
마음에 소란이 일자 환경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파도가 치는 것처럼 땅이 울렁거리고. 마력을 퍼뜨려 간신히 파악할 수 있던 공간마저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
마치 AI로 그린 그림을 덧대어 만든 영상물처럼.
없던 사물이 돌연히 생겨나거나 그대로 소멸하고. 질감이나 양감 따위는 깡그리 무시한 채 모두 일그러졌다.
공포스럽기는 하나, 모두 시바의 어수선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들.
-스으으.
정신을 수양하듯 마음을 가라앉히고 퀴퀴한 공기를 들이마신 시바가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푸른 빛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피부는 하얗게 고와지고 귀의 윗부분이 길어졌다.
감정이 사라진 듯 차갑게 굳은 표정도 특징이라면 특징.
고대 엘프의 힘이다.
호전적이고 냉철해진 시바가 차분하게 주변 마나의 흐름을 읽어내리자, 놀라울 정도로 어지러웠던 환경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속임수를 알아챈 마술은 마술로 보이지 않듯, 신나게 자신을 놀려먹던 세피로트의 차원이 시바로부터 황급히 도망쳐 버렸다.
-살랑.
동시에 보이기 시작하는 여러 인연의 실들.
‘아빠가 있어.’
은행, 이시헌, 위키의 실이 시바의 눈앞에서 팔랑 거린다.
한순간 표정이 밝아진 시바였지만. 이윽고 그 표정은 무너져 내렸다.
기감을 퍼뜨려 실의 소재를 따라가 보니, 은행의 실이 향하는 곳과 아빠의 실이 향하는 곳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아.’
순간 스치는 엄한 상상. 지금까지 친구와 헤어지게 된 과정을 떠올린 시바의 얼굴이 약간 불편하게 굳어졌다.
위키는 아빠가 은행을 노린다고 했으니. 틀림없이 설득하려 들겠지.
자연히 헤어지는 과정이고 내심 직감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아니, 아직 헤어지는 게 확정은 아니니까.
어깨에 힘을 주어 편 시바가 자신을 노려보는 이가 있는 뒤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신과 외모와 키가 비슷한 장발의 소녀.
이름 없는 꼬마가 시바를 향해 검극을 겨누고 있었다.
“또 만나네요. 언니.”
“무슨 자신감으로 여길 온 거야?”
태평한 얼굴의 소녀는 어딘가 고장 난 미소를 지으며 검파를 쥔 팔을 내렸다.
“왜. 내가 언니 하나 못 이길까 그래요?”
무언의 자신감에 꽉 차 있는 말투.
넋이 나간 미소를 입가에서 떼어놓질 않는 소녀는 검 끝에 마력을 집중시키며 속삭였다.
소녀의 팔목에는 영문 모를 수술자국이 마구잡이로 매겨져 있었다.
“지금이라도 항복하는 게 어때요. 진심으로 하는 경고예요.”
“존대는 하지 말지? 누가 네 언니야.”
“이상하다……, 언니일 텐데.”
아빠가 이 세계에 오기 전에 봤던 아이. 그렇다면 언니라 불러도 이쪽이 언니라 부르는 게 맞는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지만, 그게 딱히 중요하지는 않았다. 시바는 허공에서 대검을 직조해 꺼냈다.
-쿵.
싸울 태세를 갖추자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소녀의 얼굴.
“대체, 그 더러운 인간을 지킬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건지.”
“우리 아빠 욕하지 말아줄래.”
“대단한 사랑이네. 언니를 버리고 방치한 건 사실이잖아. 지금 이 순간에도 언니는 안중에도 없을걸.”
그럴 일은 없다. 시바는 자신을 내칠 적 아빠의 표정을 알고 있었으니까.
“아마, 지금도 그 똥내나는 여자를 탐하기 위해 껄떡이고 있을 걸?”
그건.
확실히……. 부정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여자랑은 무관해. 아빠가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야.”
“태평한 년.”
마음대로 안 풀리니 욕부터 하시겠다?
이쯤되니 대체 왜 그렇게 우리 아빠를 싫어하는지 이유라도 듣고 싶어졌다.
“들어나 보자. 왜 그렇게 우리 아빠를 못살게 구는 건데?”
“……말하면, 이해할 머리는 되고?”
“나 빡대가리 아닌데?”
“빡대가리.”
“…….”
삐잇, 시바는 모욕감에 얼굴을 구겼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심한 말을.
-꽈악.
검을 고쳐 잡은 시바가 공격 태세를 갖추자, 소녀는 한숨을 뱉으며 똑같이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빨간 동공에 굴곡 있는 빛이 새어 나오더니. 공허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소녀.
“……괜찮아.”
소녀는 상대가 아닌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엄마가 괜찮다면, 그걸로.”
하얀 피부 위로 팽창한 핏줄이 나무의 뿌리처럼 돋아나더니. 팔다리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시바가 포착한 소녀의 단전 상태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아니. 이걸 단전이라 불러야 할까?
단전의 역햘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무언가가 덩그라니 놓여 있고, 주변을 구성하는 신체 조직마저 엉망이나 다름없었다.
‘……?’
코르너스가 이뤄낸 불멸, 플라워의 개량, 세계수의 신위. 모든 분야의 지식을 망라한 세계선의 세피로트가 이뤄낸 기적.
모든 혈이 열려 마력이 통제되지 않는다.
순식간에 죽음을 향해 치닫고 있는 소녀가 하얗게 바래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등가교환.
세피로트의 힘을 담아낼 그릇은 지금껏 없었지만, 가이아의 혈통을 이은 자라면 불가능은 없었다.
-스스스.
무를 개척했던 자에겐 등선(登仙)이라 불리는 영역.
한계에 도달해 벽에 부딪혀 힘에 목이 마른 이들이라면 모두가 간절히 원했을 가장 이상적인 육신!
엘프는 마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지만, 소녀는 지금 모든 마나를 지배하는 상태에 놓였다.
‘그러니까.’
저게. 세피로트가 아빠를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한 힘.
아직 견적을 내지 않아 모르겠지만. 상대가 근거 없는 자존심을 피우고 있지는 않으리라.
─…….
음산한 기운이 소녀의 곁에 피어오르더니, 분명한 형태를 지니고 있던 대검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작은 발이 떨어지면서. 공중에 떠오른 소녀의 안광이 터졌다.
-번쩍!
쾅. 솟구치는 바닥.
탄성있는 고무처럼 내부에서부터 부풀기 시작한 물컹물컹한 땅이 천장까지 솟구쳤다.
-쑤우욱!
소녀를 따라 선율처럼 흐르기 시작하는 마나.
빠르게 입자로 변해 사물을 구성한 마력 덩어리가 뾰족한 말뚝의 형태로 시바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시바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수십 개의 말뚝. 하나하나가 충분한 파괴력을 품고 있는 마법이다.
마나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바만이 명확한 비거리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쾅, 쾅, 쾅 쾅!
울렁대는 땅을 타고 앞으로 돌진한 시바가 꼬나쥔 대검을 휘두르며 소녀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불쑥!
바닥에서 솟구치는 새까만 가시.
발등을 관통하고도 남을 길이지만 무시하고 짓밟는다. 발에 짓밟힌 가시는 시바의 발을 꿰뚫지 못하고 가루로 되돌아갔다.
-펑, 펑펑!
대포처럼 쏘아지는 말뚝?
위키가 자신의 권능을 담아 만든 신창을 상대로도 직격을 피하지 않은 시바이다.
제 몸보다 거대한 대검을 쥐고. 종횡무진 사방을 베어내기 시작하더니. 전장을 헤치는 전차처럼 저돌적으로 앞을 밀고 나간다.
휘갈기는 포탄 따위 맞지만 많으면 아무런 효과도 없다. 쪼개진 말뚝의 파편들이 끈적끈적하게 녹아 시바의 몸을 강제로 옭아맴에도, 무성한 쐐기풀을 헤집듯 꾸역꾸역 나아간다.
-팡!
좌측에서 우측으로 포탄을 가르고.
그 반동에 꺾인 어깨를 재차 돌려 다른 포탄을 횡으로 베어낸다.
-쾅, 쾅, 쾅, 쾅!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속도로 묵직한 움직임을 수없이 반복한 시바의 찢어진 동공이 소녀의 안면을 쓸어내렸다.
공격을 쳐내고는 있지만, 좁혀지질 않는 거리감.
그럼에도 속단하거나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힘을 잘 파악하고 있고. 반대로 자신은 상대의 밑천을 드러내지 못했으니까.
운 좋게 체급으로 상대를 찍어 눌렀다 하더라도, 침착함을 갖추지 못하면 다음은 없으니.
최후에는 결국 아빠를 이겨야 했다.
* * * * * * *
둘째 딸과 두근두근 유령의 집 데이트 30분차.
나는 경계어린 표정으로 멀찍이 도망친 황금빛 머리의 황녀를 향해 중얼거렸다.
“어쩐지 냄새가 나더라니.”
“……이건, 어쩔 수 없는…!”
냄새 발언에 뺨이 잔뜩 상기된 은행이 주먹을 말아쥐며 소리쳤다.
격리된 장소에서 몇 분이나 개조된 목인에게 시달린 끝에, 땀과 피로 흠뻑 젖은 은행의 상태는 그야말로 처참.
찢어진 뺨과 경련하는 오른팔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측은지심마저 생길 정도였다.
“하아, 하아, 읏.”
주변에 그득히 쌓인 시체들을 보니. 끈질기게도 은행의 목숨을 노린 모양이다.
“시바는?”
“……헤어졌어요. 제 불찰이지만, 지식의 세계수 때문에. 대응할 수 없었어요.”
세피로트가 시바를 노린 건가?
‘아니.’
아무리 시바에게 흥미를 가졌다고 해도, 혈통에 관한 궁금증은 원망이나 그 자식을 노리는게 편할 것이다.
나는 업고 있던 위키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위키?”
“네. 아빠. 세피로트는 지금 저희 근처에 있어요. 언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언니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 위키가 방긋 웃었다.
다시 고개를 내린 내가 업고 있던 위키를 내려주며 은행을 살폈다.
“상태는 거의 다 죽어 가네.”
“……닥치세요.”
“이건 뭐, 세피로트가 대놓고 던져준 먹잇감이 아닌가.”
“…….”
내가 뱉은 말을 차마 부정할 기운이 없는지 눈을 질끈 감는 은행.
외투를 벗어던진 황녀의 차이나 드레스가 딱 눈호강을 하기 좋았다.
“아마도, 당신의 힘을 궁금해했을 가능성은 있겠네요.”
침울하게 중얼거리는 은행.
세피로트의 뜻은 알겠다만, 녀석은 간과한 게 있었다.
난 우리 딸 앞에서는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
세피로트로서는 죽다 살아나도 이해할 수 없겠지만. 다음엔 위키가 없는 곳에서 이런 기회를 마련해주었으면 한다.
‘그나저나.’
차이나 드레스를 만들 생각을 누가 했을까?
중국 놈들 상상력이 제법 뛰어난데. 롱스커트면서 분명한 옆트임이 꼴림 포인트를 정확히 노린다.
싸울 때마다 미끈한 다리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그 지점.
사타구니가 보일 듯한 기대감을 연출하면서도, 보지 못했더라도 각선미를 봤으니 제법 만족스럽다.
특히 이 처자, 엉덩이의 곡선이 대단헀다.
“꼴이 그러니 냄새가 나지.”
“큭, 끝까지 당신은…!”
잘 생각해보면, 저런 옷을 입으니까 가랑이 사이의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 아닌가.
쥬시한 암컷내음을 풍긴 쪽이 잘못이라고.
“아빠.”
“……크흠. 치료해줄까?”
“그러려고 했는데, 조금 싫어졌어요.”
절대 내가 흑심이 있어서 은행을 구하는 게 아니라. 귀목이잖아.
얘가 죽으면 내 운명에 탈이 생긴다는데 뭐 어떻게 해?
으흐흐. 아니, 크흠.
나는 정숙한 표정으로 은행의 앞에 다가서서. 조용히 손을 뻗었다.
“……최악인 남자.”
내 가랑이를 잠시 흘겼다가, 경악한 표정을 지은 은행이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뻗은 손을 붙잡았다.
입술을 콱 깨문 고귀하신 얼굴은 치욕으로 굳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