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948
세계수를 따먹다 948화(949/949)
“벌려.”
“……큭.”
경멸이 그득히 쌓인 표정의 은행이 치욕스러워하며 천천히 팔꿈치를 들어 올렸다.
-스윽.
선홍빛 육즙이 흐르는 하얀 겨드랑이.
이를 감상할 새도 없이 팔뚝에서 흐른 핏물이 맨살의 표면을 뒤덮었다.
상처 부위에 치유의 권능을 얇게 펴 바르듯 문지르니 빠르게 지혈되며 차오르는 새살. 쿰쿰한 구린내가 당장이라도 코를 문지르고 싶지만, 위키가 있으니 참아야 했다.
“팔 내려간다. 더 벌려.”
“당신이라는 인간은 언제나 말을 좆같이……!”
“스읍. 조용히 해. 우리 딸이 일 보고 있잖아.”
“하지만 그쪽이 먼저….”
“어쩌다 불민한 여식을 치료해줬더니 범죄자 취급만 당하네. 억울하다 정말.”
“그, 그것도……!”
은행과 내가 만난 게 세피로트가 예속의 힘을 관찰하고 싶어 이루어진 주선이긴 하지만. 내가 저지른 것도 아닌데 뭐 어쩌는가?
오히려 뒷사정을 알면 나한테 감사할 줄을 알아야지.
“내 말이 틀려?”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할 수 없다.
울상이 된 은행이 조금만 건드리면 눈물이 터질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WWE마냥 짜고 치는 판도 아니고. 실제로 세피로트가 독단으로 벌인 일에 둘 다 끌려온 입장인데다, 홀라당 따먹어버릴 수 있던 걸 목숨을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준 건 팩트.
자존심이 상한 은행이었지만 체면치레를 하기 위해서인지 울먹이던 표정을 억지로 거두며 내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당신께 빚을 지고픈 마음은 없었습니다만. 감사합니다.”
“빚이 생겼으면 지울 줄도 알아야지? 나한테 오던가.”
“그럴 순 없어요.”
은행은 단호하게 내 제안을 끊어내었다.
우리 둘은 절대 협력할 수 없는 앙숙이 될 운명이다. 녀석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만 운명은 그렇게 간단히 정해지지 않는다고.
은행이 날 밀어내는 이유는 제국의 수복과 가문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니, 그 원인을 제거하면 될 일이었다.
“네가 날 조사한 만큼 나도 충분히 네 뒤를 파보았는데 말이지.”
“…….”
“난 아직도 네가 왜 그리 가문에 집착하는지 모르겠거든?”
가문이 일군 역사나 영광에 자부심을 느끼는 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아니지만. 은행이 가문에서 받은 취급은 생각보다도 훨씬 고약했다.
“처음에야 네가 죽자고 달려드니 들어는 줬다만. 애당초 무슨 미련이 남는 거지? 가주는 널 애나 낳는 도구로 여기지 않나?”
“……한방(韓方)을 통해서도 알아낼 수 없었을진데. 하긴, 그쪽이라면 모르는 게 더 어렵겠죠.”
은행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쇄골 아래로 보이는 가슴골과 표정이 어울려 색기가 피어올랐다.
“가주께서 능력적으로 모자란 건 사실이지만, 당신처럼 저를 음욕적인 시선으로 보지는 않아요. 제가 생식을 요구받는 이유는 순전히 제가 지병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으로…….”
“유전병 말이지? 알다마다.”
은행나무는 온갖 병충해에 면역이나 다름없지만 유전적으로 사촌지간이 아무도 없다.
하지만 나도 보고 들은 게 없지는 않아서 말이지.
“그냥 나랑 다름 없을 정도로 여색을 탐하던데?”
“……그건 다른 수종과의 생식이 가능한지를 알기 위해서.”
방금 한 말에 오류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겠지.
이미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온 가문이 굳이 다른 여성 나무를 탐할 이유는 색욕 말고는 달리 없을 것이었다.
중국이 망하기 전에는 아예 가주를 위한 어린 여자들을 기르는 교육소까지 있었다던데……. 이건 본론에서 너무 멀어지니 패스.
“요는 그거지. 네 아빠란 작자는 대를 이을 자식을 핑계로 자기 핏줄인 널 탐하려 하고 있다는 거.”
“…….”
정곡을 찔린 은행이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껏 그녀가 받은 무수한 정치적 견제 중 다수가, 그녀의 부친으로부터 행해진 것임을 생각하면 이미 알고 있겠지.
무능한 년이라 포장해 꿈을 짓밟고 순순히 가랑이를 열도록.
아직까지 뜸을 들인 건 말 그대로 고진감래를 위해서이리라.
‘그렇게 기 세고 위풍당당했던 딸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떨어지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지.’
몇 번 정도 그런 식으로 해먹은 여자가 있으려나.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지만, 정복감의 도파민에 빠지는 순간 사람이 정말 미친다.
그것도 정말 까마득히 먼 상대를 대상으로. 꾸역꾸역. 얼마 전의 일을 예시로 들자면 성녀이자 대리자인 아젤린의 엉덩이를 범하는데 성공했을 때처럼. 나도 이따금 맛이 가는데 다른 사람은 오죽할까?
당하는 입장에서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불쾌한 일이지.
“그런데도 가문을 위한다고?”
“……그러니까 되돌리려는 거예요. 뒤틀린 게 많았으니, 제 손으로 직접. 그리고 절 의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은행과 한참 눈씨름을 한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여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하는 사람이 많다. 그 책임의 무게를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야심가인 은행에게는 가장 큰 원동력일 테고.
‘어려운 문제네.’
은행의 단단한 장벽을 무너뜨리기에는 설득할 단계가 무척이나 많았다.
“네가 정말 깔린 뒤에도 같은 생각을 할지는 모르겠네.”
“…….”
복잡해진 은행의 얼굴. 지금은 그정도면 됐다.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위키가 서 있는 복도를 바라보았다.
꼴리는 냄새를 질질 풍기는 은행과 너무 오래 있던 탓에 이곳이 어딘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이곳은 지식의 세계수에 의해 변형된 교단의 본진.
형체를 잃은 수녀와 목사들이 끔찍한 몰골이 되어 돌아다니는 사실상의 던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나는 넙죽 엎드린 시체들을 흘기며 위키에게 다가갔다.
‘어디선가 한번은 본 적이 있는 형질의 마력이란 말이지. 아주 작정하고 실험장을 만들었는데.’
이따금 느껴지던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는 쉬웠다.
이곳은 호기심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아이가 분수에 넘치는 힘으로 만들어버린 공상(空想).
뚜렷한 목적을 제하고는 그 어떤 사정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연구를 저지른다.
세계수의 눈조차 피할 정도로 폐쇄성이 짙은 차원은 세피로트에게 있어선 꿈과도 같은 놀이터였고. 녀석은 자신이 만들어낸 유전자의 패턴을 하나하나 시험해볼 심산인지, 각기 다른 변이체를 분석하던 위키가 경이로움에 탄사를 내뱉으며 이러한 답을 내놓을 정도.
“……대단하네, 참.”
시체 무더기 위로 공중에 부유해 있던 위키가 가까이 다가온 내 기척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위키의 얼굴은 약간 불쾌해 보였다.
“아무튼…. 여기도 끝났어요. 아빠.”
내 딸이 이곳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세피로트의 지식을 훔치는 것.
옳고 그름은 덧없게 된 지 오래고. 비윤리적인 실험의 결과물은 학문의 피와 살을 이루기 마련. 저 미치광이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녀석이 부린 재주를 위키라는 아기곰이 챙겨야 했다.
“힘들진 않아?”
“네, 하지만……. 이 사람들의 몸에 남겨진 지식의 권능을 해석하는 게, 꽤 복잡해서. 머리가 좀 아파요.”
앵두빛 입술을 삐죽 내민 위키가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앞머리에 바람을 후- 불었다. 까맣고 하얀 머리카락이 귀엽게 나풀거렸다.
“권능을 해석한다니? 그런 것도 가능해?”
“네. 결국 ‘권능’은 법칙을 거스르는 힘이라. 현상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일종의 방어흔이 남거든요.”
방어흔.
법칙을 어기고 현상을 일으키면, 상응하는 반작용이 일어나 흔적으로 남는다는 말인가?
권능이 가지는 리스크라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위키의 말을 들어보니 딱히 그렇지는 않은 모양.
“권능에는 리스크가 없어요. 무언가를 관장하는 자리까지 올라서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에요. 반작용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 해야 하나. 발자국을 보고 동물을 유추하는 정도가 알맞은 비유에요. 이걸 누가 정했냐고 묻는다면……. 역시 근원뿐이겠고.”
어려운 이야기지만.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게 있다 보니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위키가 말한 그 방어흔이라는 것도 나 같은 범재가 아닌 천재들의 눈으로나 관측하는 게 가능한 것이겠지.
-저벅.
나와 같은 범재.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이야기를.”
“아빠랑 이야기하는데 끼어들지 마세요.”
방금의 대화로 긴 상념에 잠겨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은행이 무어라 말을 해보기도 전에 위키가 잽싸게 쏘아붙였다.
“…….”
바로 합죽이가 되어버리는 녀석. 당혹감에 젖은 은행 냄새가 참으로 지독하게 풍겨온다. 아까 보인 그 울먹이는 표정이 되어가고 있다고.
“…알겠어요.”
제 처지를 상기한 은행이 쥐구멍에 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하니. 나는 헛기침을 하며 위키에게 눈치를 주었다.
“위키, 그래도 아빠 손님이다.”
“……맞아. 그랬죠. 죄송해요. 언니.”
요즘엔 그래도 썩 예의를 잘 차리던 위키였는데. 지식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위키는 순순히 사과한 직후. 잠시 또 버퍼링이 걸린 컴퓨터처럼 멈춰서 멍을 때리기 시작했다.
“위키?”
“…….”
고민하는 듯 일그러지는 표정. 동공을 위로 올린 위키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평소보다 꽤 오래 분석에 시간을 쏟나 싶더니. 무슨 문제라도 있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알 길이 없는 세피로트의 간섭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구나 싶어. 조용히 어깨 위로 ‘가시’를 꺼내 보였다.
【가시】
외부의 모든 저항으로부터 벗어나는 힘.
어깨 위로 돋아난 긴 뿔 형태의 가시로부터 뿜어진 기운이 위키의 근방을 둘러싸자, 멍을 길게 때리던 위키가 화들짝 놀라 입을 오므렸다.
“……아.”
무슨 일인가. 묻기도 전에 답하는 위키.
“세피로트가 잠깐 접근해 왔어요.”
“뭐?”
“……얼굴 무서워요 아빠. 별 문제 없었으니 괜찮아요.”
세피로트에게 위키의 정체를 들키는 건 어느 정도 감수한 일이지만. 직접적인 접근은 최대한 피할 것을 당부받았다.
위키의 뜨거운 이마를 빠르게 쓰다듬으며 상태를 체크하니, 배시시 웃는 딸 아이.
“지금 저 걱정하는 거예요? 헤.”
“열 나네.”
“그야…….”
“그야?”
“아, 아빠가 이해하기 쉽게 어떻게 비유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암호화된 네트워크에 초대받은 느낌이라서.”
“굳이 응해주지 마. 설마 아빠한테 말도 안하고 벌써 응한 건 아니지?”
“에이, 설마요.”
필살의 미소를 지어 보이는 위키. 그 깜찍한 애교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위키가 나보다 훨씬 똑똑한 건 사실이지만, 이따금 판단의 잣대가 엇나갈 때가 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구멍난 항아리처럼 자꾸자꾸 줄어드는 애정결핍도 꾸준히 채워줘야 하니!
“헤헤 걱정마요 아빠.”
내 손을 꼭 붙잡고 뺨에 갖다댄 위키가 이윽고 콧등과 미간까지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말캉말캉한 아이의 촉감. 이 애교에 녹지 않을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
부녀를 지켜보는 은행의 초식동물같은 눈만이 더욱 초라해질 뿐이었다.
* * * * * * *
암호화된 세상에 잠시 의식을 옮겨놓는 것.
실제로 해본 적은 없지만 세피로트와 같은 개념의 권능을 공유하는 위키가 구현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세피로트.”
흐르는 전파가 눈으로 보이는 세상. 고개를 돌린 위키는 무감한 얼굴로 샛노란 머리칼의 여자아이를 흘겨 보았다.
-반짝!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위키를 바라보는 세피로트.
순수하고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어째선지 분석 당하고 있다는 감정을 지울 수 없었던 위키가 조용히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 보안을 높였다.
-꾸물.
덩달아 세피로트도 정체를 감추니 두 꼬마의 형상이 까만 그림자로 변했다.
대화가 아닌 작은 전파를 주고받던 둘은. 몇 번에 걸쳐 서로의 보안을 뚫어내기 위해 마력을 교환했고. 각자의 감정과 속내를 일부 들추어낸 위키는 그 자리를 박차고 빠져나왔다.
‘…….’
많은 대화가 오간 건 아니지만. 서로의 감정을 들추는 순간 손해를 보는 것은 위키뿐.
인간의 마음을 한참 벗어난 세피로트의 속내는 알아봤자 아무 쓸모가 없었고.
위키를 파악한 세피로트가 보인 반응은 어린아이의 속내를 아주 잘 파고들고 있었다.
【아빠를 가지고 싶어?】
지금껏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왔던 소유욕.
소꿉 장난이나 다름 없는 질투가 아닌 진짜의 감정.
【가능해!】
위키와 세피로트간에 짧게 오간 대화는 지극히 짧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