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02)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02화(102/608)
제102화
잠시간 이마 위에 머물던 열기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계속 이마를 만지고 있는 내게, 엘뤼엔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난 이만 돌아가마.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해도 된다. 그리고 가급적 그 도마뱀은 떼어놓고 다니도록 해라. 죽여 버리면 더 좋고.”
“아하하…….”
후자의 말에 더 힘이 실렸다고 느낀 건 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라피스는 그에게 단단히 미운털이 박힌 것 같다. 신과 대적(?)하고도 살아남은 셈이니,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운이 좋은 걸지도.
“아참, 엘뤼엔, 물어볼 게 있는데!”
“뭐지?”
귀환하려는 찰나 갑자기 붙잡은 건데도 그는 불쾌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답했다. 나는 그것에 용기를 내어 물었다.
“신전을 찾아가면 어느 신이든 다 만날 수 있는 거야?”
“글쎄, 신들마다 다르겠지만 정령왕의 청을 거절하는 경우는 드물겠지.”
“그럼 마신도 만날 수 있어?”
그 순간 엘뤼엔에게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분명 빛 때문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인데도, 왠지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마신은 왜?”
“음,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긴 한데, 그에게 물어볼 말이 있거든.”
“중요한 용건이 아니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응? 어째서?”
“다른 신의 문장을 달고 마신의 신전을 방문하겠다는 거냐? 입구에서부터 거절당할 게 뻔하지. 운이 나쁘다면 고초를 치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아, 그렇겠구나.”
그러고 보니 마신의 사제들이 조금 공격적이라고 했던가? 처음 이곳의 사람들이 다짜고짜 우리를 마신의 잔당들로 오해한 걸 보면 다른 신관들에게 행패를 부리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런 그들 앞에 대놓고 찾아가면 시비를 건다고밖에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사나의 아버지를 죽게 만든 신탁에 관해서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마신의 신전부터 먼저 들러볼 걸 그랬나? 왠지 아쉬운 기분에 나는 쩝,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조금 더 낮아진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라도 가급적 마신과는 상종하지 마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그쪽에서 찾아온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네가 감당할 만한 녀석이 아니야.”
“그, 그렇게 무서운 신이야?”
“……차라리 그렇게 단순하게 표현할 수 있다면 나을지도 모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더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향해 엘뤼엔이 다시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 반드시 명심해라.”
* * *
떠나는 이보다 남은 이의 삶이 더 서글프다고 했던가. 왠지 적절한 예시는 아닌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지금의 내 상황을 제대로 표현할 만한 말은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엘뤼엔이 돌아간 이후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 같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날 기다리고 있던 건 처참한 참배실 안의 현장이었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신관들도 그가 돌아갔을 때쯤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사람들은 전부 쓰러져 있었고, 그들이 내뱉은 토사물과 오물들로 바닥이 온통 너저분했다. 이 공간 안에 멀쩡히 깨어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즉, 뒷수습을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단 라피스부터 순차적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이들 중에선 단연 그의 상태가 가장 심각했다. 사실 그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다. 머릿속에 저절로 떠오르는 지식에 의하면 드래곤은 재생력이 뛰어난 종족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상태는 처음보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심지어 치유력을 써도 곧장 아물지 않을 정도였다.
정령왕의 능력을 써도 바로 낫지 않는 부상이라니, 아무래도 엘뤼엔이 정말 단단히 작정을 했던 게 분명했다. 결국 몇 번 더 치료를 거듭한 후에야 나는 그를 간신히 봐줄 만한 모습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본격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다친 부위를 치료하거나 더러운 곳을 청소했다.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인원이 많다 보니 대충 돌아보는 것만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어느 정도 정돈이 되고 나자 그때부터는 슬슬 다른 부분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사람들이 깨어나면 뭐라고 설명을 하지?’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더니. 정작 일을 저지를 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흥분이 가라앉으니 조금 전까지의 일들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 앞에서 너무 대놓고 엘뤼엔을 편하게 대했던 것이나, 아들이니 정령왕이니 위험한 발언을 거리낌 없이 한 것 등, 하나같이 전부 다 마음에 걸리는 것들뿐이었다.
아마 우리의 대화를 들은 사람 중 대다수는 이미 내 정체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마나 신관들만이라면 어떻게든 수습을 시도해보겠지만 문제는 이곳에 일반인들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협박을 한다고 해도 그들의 입까지 막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으으, 이게 다 엘뤼엔 때문이야.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하니까 나까지 경각심을 잃은 거잖아.”
나는 괜히 애꿎은 엘뤼엔을 원망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차라리 이틈에 일행들만 챙겨서 도망을 칠까도 싶었지만 그랬다간 일이 더 커질 것 같아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결전(?)의 순간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 찾아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 것이다.
“으음…….”
그는 바로 대신관 루얀이었다. 가장 많은 신력을 가진 사람답게 회복 역시 가장 빠른 것 같았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아직 상황을 분간할 정도로 정신이 돌아오진 않은 듯 눈빛이 흐린 상태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바짝 긴장해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선 변명으로 시작해서 변명으로 끝날 말들이 분주하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여긴 참배실 아닙니까?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아니, 그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네? 저, 저요?”
설마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더 당혹스러운 건 다음으로 이어진 그의 행동이었다. 멍하게 나를 쳐다보던 그의 눈에서 구슬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 대신관님?”
내 부름을 듣고서야 그는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듯했다. 두 손을 들어 가만히 뺨을 만진 그는 손바닥을 흥건히 적신 액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상하군요. 눈물이 나는데 멈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왠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은 기분입니다.”
“저,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그렇게 질문하신다는 건, 당신은 제가 왜 이러는 건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차 싶은 기분에 나는 살짝 혀를 깨물었다. 그것을 보고 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는지, 그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말씀해주십시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으음, 그게 말이죠…….”
나직하게 응시하는 시선에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하니 기억을 잃을 줄이야. 이런 경우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대신관의 눈동자가 갑자기 크게 뜨였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두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더니 뜻밖의 질문을 내뱉었다.
“혹시, 성함이 엘…… 되십니까?”
“어? 기억났어요?”
“……제 짐작이 맞았군요.”
어라, 생각이 난 게 아닌 건가?
반응을 봐선 기억이 돌아온 것 같진 않은데, 가르쳐주지도 않은 이름을 알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가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았다.
대신관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성함이 분명 엘이라고 하셨지요.”
“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혹시 이곳에 엘뤼엔 님께서 직접 다녀가셨습니까?”
혹시 독심술을 쓰는 게 아닐까? 나는 얼결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든 것을 다 이해했다는 듯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때 다른 쪽에서도 신음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쓰러져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정신을 차린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이사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으음, 엘……?”
“이…… 라이, 괜찮아?”
내 질문에 그는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태에서 멍하니 눈을 비비기를 잠시간, 그가 퍼뜩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내가 왜 누워 있지? 혹시 나 잠들었어?”
“응? 설마 너도 기억이 안 나?”
“너도라니, 그럼 엘도 기억을 못 하는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어디까지 생각나는데?”
“으음, 참배실에 들어왔던 것까진 생각이 나는데…… 그 뒤로는 전혀…….”
결국 엘뤼엔을 만난 시점부터의 기억이 전부 날아갔단 소리였다. 깨어난 다른 사람들도 이사나와 비슷한 반응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방금 전까지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일시에 기억을 잃은 걸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엘뤼엔이 돌아가기 전에 뭔가 조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이런 건 미리 말해달라고!’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몰래 신전을 떠날걸,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쳐버렸다는 사실에 나는 속으로 좌절했다. 그때 두 뺨에 강렬한 시선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이사나가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라이?”
“음…… 아, 저기…… 혹시 우리 말이야. 엘뤼엔 님을 만난 거야?”
“에? 너도 알겠어? 어떻게?”
“그거야…….”
이사나는 주저하며 제대로 설명을 잇지 못했다. 왠지 조금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엘 님?”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서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놀란 얼굴을 한 카이테인이 망연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서 재회한 순간 보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한마디는 주위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에, 엘 님이라고?”
“설마 신탁에서 말씀하셨던 그 엘 님?”
“그럼 저분이 우리가 기다리던 손님이시란 말이야?”
헛숨 속에 터져 나온 음성도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어떤 면에서는 참 한결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카이테인은 허겁지겁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얼굴을 본 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 두 눈을 부릅떴다. 대신관이나 이사나가 보였던 것과 비슷한 반응이었다.
비단 그만이 아니었다. 나를 본 사람들마다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기분 탓일까? 왠지 참배실이 폭발했을 때보다 더 경악한 것 같았다.
“왜, 왜 그래요?”
내가 긴장해서 묻자 카이테인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굳어진 얼굴을 풀었다. 그래도 여전히 놀란 기색을 감추지는 못한 모습이었다.
“으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나저나 드디어 문장을 받으셨군요. 경하드립니다.”
“어? 바로 알겠어요?”
“네, 물론입니다. 아주 선명한걸요.”
“그래요? 어디에 있는데요?”
나는 황급히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고위 신관일수록 눈에 띄는 부위에 문장이 드러난다고 했다. 난 정식 신관도 아니니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찍어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잘 보이는 위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살이 드러난 부분은 물론, 소매를 걷어보아도 문장은커녕 그와 비슷한 것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자 카이테인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대답을 꺼려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툭툭,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사나였다. 의아해하며 돌아본 내게 그는 어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마를 가리켰다. 그 순간 갑자기 불길한 기분이 엄습했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이 문장을 새길 때 어떻게 했더라……?
“……!”
기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것을 상기하자마자 나는 서둘러 두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절대 믿고 싶지는 않았지만, 설마하니 엘뤼엔 이 아버지가……!
“혹시 신의 문장이 이마에…… 새겨진 거야?”
아니나 다를까. 떨떠름하게 묻는 말에 이사나만이 아니라 사람들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그들이 날 보며 경악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대신관인 루얀이 단번에 엘뤼엔의 강림을 눈치챈 이유도.
이 신전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그가 문장을 받은 부분이 손등이었다. 즉, 지금까지 그게 최대치로 눈에 띄는 위치였단 뜻이다. 그런데 갑자기 튀어나온 내가 별안간 더 높은 위치에 문장을 받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심지어 가장 눈에 띄는 얼굴에!
설마 그게 즉석에서 문장을 새기는 것이었을 줄이야! 그저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방심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날 마중하기 위해 수많은 일들을 벌였다고 할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다. 젠장, 엘뤼엔!
‘자식 사랑도 적당해야 한다는 거 몰라?’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