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0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09화(109/608)
제109화
이사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황제로서 황궁에서 살았던 그다. 그조차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던 참혹한 행사에 그는 완전히 넋을 잃은 것 같았다. 얼빠진 우리들의 모습이 재밌었는지 라피스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내친김에 제사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도 알려줄까?”
“방식?”
“제물로 선정된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성수라고 알려진 것으로 목욕재계를 해. 그러곤 일곱 명을 한 파로 묶어서 매일 한 명씩 신전의 제단에 바쳐지는 거야. 제사는 대공 자신이 직접 주관하고, 높이 쳐든 단검으로 단번에 심장을 파내. 그다음엔 그 피를 짜 그릇에 담…….”
“으아악! 그만 스톱! 넌 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듣는 거야?”
기겁해서 귀를 틀어막고 소리치자 라피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디서긴. 제단에서 들었지.”
“뭐?”
“내가 말 안 했던가? 나 얼마 전까지 황궁 지하에 있었어. 제단에 바쳐질 제물로서 말이지.”
“뭐어?”
그 엽기적인 대답에 기겁한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행들의 굳어진 시선에도 라피스는 여전히 태연했다. 심지어 그것이 나를 만나기 전에 즐겼던 유희라는 망발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니, 대체 왜 그딴 것을 유희로 삼는 건데?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그의 머리를 해부해보고 싶었다.
“혹시 이 대륙에도 정신과 의사가 있을까? 진지하게 상담 치료를 권해보고 싶은데.”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그거 내 정신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지? 유감이지만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거든? 그냥 어린 모습으로 변해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끌고 갔다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인가 구경하는 셈치고 가만히 있어줬더니, 황궁으로 가대? 재밌을 것 같아서 잠깐 놀아줬지.”
“너 미쳤어? 그러다 정말로 죽으면 어쩌려고!”
“이봐, 난 드래곤이라고. 수틀리면 언제든 현신해서 뒤집을 수도 있고, 텔레포트란 간편한 방법도 있는데 쉽게 당해줄 것 같냐? 그 증거로 지금 이렇게 멀쩡한 거잖아.”
라피스는 가슴을 쭉 펴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얄미워서 나는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그렇게 잘났으면 제단도 뒤집고 나오지 그랬냐. 아예 제사도 못 지내게.”
“그래 봤자 그때뿐이지. 당장 제단이 망가진다고 해서 그놈들이 제사를 안 지낼 것 같아? 난 쓸데없는 일에 힘을 빼는 취미는 없어.”
“그래서 혼자 도망쳐 나왔냐? 이 천하의 매정한 놈.”
“나 참, 위험한 일을 한다고 걱정할 땐 언제고 이젠 또 매정하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황당하다는 듯 찌푸려진 얼굴을 무시하고 나는 이사나와 카이테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은 여전히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보다는 충격에서 많이 벗어난 모습이었다. 이사나는 한층 가라앉은 얼굴로 라피스를 응시했다.
“누님이 제물이 되었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겁니까?”
“말했잖아. 제물의 연령은 십 대 중반까지라고. 거기서 약 한 달 정도 지내봤는데 단 한 번도 예외가 있었던 적은 없었어. 그런 걸 보면 그전에도 다르진 않았을 거야. 보아하니 나름의 제물 선별 기준이 있는 것 같았거든.”
“선별 기준?”
“첫째, 연령이 어릴 것. 둘째, 미색이 곱거나 외관이 깨끗할 것. 셋째, 장애나 지병이 있지 않을 것. 대충 이 정도?”
언젠가 사람들이 말하던, 병사에게 끌려가는 것과 부합하는 조건이었다. 이사나는 안도하는 표정을 짓기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누나인 에이프릴이 제물로 잡혀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마음 놓고 표현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예전에 끌려갈 뻔했었는데. 그때 그대로 얌전히 따라갔으면 제물이 되었다는 거잖아? 새삼 그렇게 생각하니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화가 치밀었다. 마을 한복판, 더불어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는 사실에 더 소름이 돋았다. 내 경우엔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평범한 아이들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을 게 아닌가.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뭐가요, 카이 씨?”
“마신교가 죽음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긴 합니다만, 그곳에서도 사람을 제물로 쓰는 일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주기적으로 제를 드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공은 그 아이들을 바쳐서 마신에게 무슨 기원을 하는 걸까요? 단지 황제가 되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과한 것 같군요.”
“반대로 마신 쪽에서 요구한 걸 수도 있지.”
대답을 한 사람은 라피스였다. 모두의 시선이 쏠리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제사는 신 쪽에서 먼저 요구하는 경우도 있잖아. 조건을 충족하기 어렵고, 누구나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일수록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지. 그렇다면 딱히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않아? 마신이 피를 즐기는 신이라는 건 오래전부터 공공연한 사실인걸.”
“…….”
그 말에 나는 묻어뒀던 가설을 다시 떠올렸다. 이번 일에 마신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 말이다. 그 순간 급속도로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면 이사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그럼…… 마신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고 있다는 거야?”
“나야 확실한 건 모르지. 정 궁금하면 물어보든가. 마침 적당한 추궁 상대도 있는 것 같은데.”
“추궁 상대?”
어리둥절해하길 잠시간, 나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또 그거였다. 가끔씩 느껴지곤 하던 누군가의 시선. 그것이 다시 따라붙고 있었다.
나는 두리번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번화가도 아니었고, 오히려 사람들이 잘 오가지도 않는 한적한 공터였다. 이런 곳에서 낯선 시선이 느껴진다면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지 않은가.
“……혹시나 해서 묻는 말인데. 우리 지금 감시당하고 있어?”
“호오, 이제 보니 아주 둔치는 아니었군.”
라피스는 기특하다는 듯이 싱글거렸다. 보아하니 이미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젠장, 이런 건 진작 말했어야지! 나는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 추궁 상대, 인간인 거 맞아?”
“왜?”
“뭔가 기운이 좀 이상해. 더 텁텁하고 음습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 많이 위험할 것 같아?”
“음, 아니. 딱히 그 정도까지는…….”
숫자가 하나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 라피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다는데? 이제 그만 슬슬 나오는 게 좋지 않겠어? 이미 다 들켰다고, 너희들.”
그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카이테인과 이사나는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쏴아아―
그 순간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나뭇가지들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마나의 파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폭사한 기운이 공간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다.
“흥, 이렇게 나오시겠다?”
얼굴을 찌푸리는 사이, 라피스는 호전적인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도 강한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파도가 퍼지듯, 거친 파동이 그의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슈우욱! 콰아아앙!
거칠고 강한 기운이 마치 폭풍처럼 뒤엉켜 서로 크게 맞부딪쳤다. 그 파장에 공터에 있는 나무들의 줄기가 고무처럼 휘었다.
제아무리 강렬한 기류도 내게는 딱히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문제는 카이테인과 이사나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마나의 파동이 일 때마다 두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휘청거렸다. 웅크린 두 사람을 본 나는 서둘러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라피스, 그만해! 이사나와 카이 씨가 힘들어하잖아!”
그러나 그는 내 말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청각이 인간의 수십 배에 달하는 드래곤 주제에 설마 듣지 못했을 리는 없고, 그저 내 목소리를 완전히 무시할 작정인 것 같았다.
“야! 그만두라는 말 안 들려?”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을 느끼며 나는 더 크게 소리쳤다. 그럼에도 라피스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우두둑,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휘청거리고 있던 나무 하나가 뿌리를 드러내며 쓰러졌다.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쓰러지는 장소가 카이테인 위쪽이었다.
“카이 씨!”
내 외침에 카이테인은 위험을 깨달은 것 같았지만 꼼짝도 하지 못했다. 기운의 파동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큰 물줄기를 일으켰다.
촤아악! 우두두둑!
나무가 카이테인을 덮쳐든 것과 물이 솟구친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솟구친 물줄기는 간발의 차이로 나무줄기를 쿠션처럼 받아냈다. 카이테인은 바로 그 밑에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는 받아낸 나무를 멀리 치워낸 다음 급히 카이테인에게 다가갔다.
“카이 씨, 괜찮아요?”
“아, 정말 감사합니다, 엘 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행히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한 모습이었다. 다만, 상당히 놀랐는지 안색이 매우 창백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를 잠시간, 나는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이 와중에도 정체 모를 상대와의 기 싸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전부 그만두지 못해!”
쩌어어억!
그 외침에 멋대로 휘몰아치던 기류들이 단숨에 흐트러졌다. 그와 함께 주위의 모든 풍경들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 거친 기류에 휘청거리던 나무들이 모두 새하얗게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살얼음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마치 이 장소만 설원이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일어난 현상에 어안이 벙벙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피스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정령왕. 화나니까 무섭네.”
“……유언은 그걸로 끝이야?”
“알았어, 알았어. 안 할게. 그만두면 되잖아.”
그는 항복을 하듯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겁이 나서 그만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바보라도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그는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으니까.
“봤지? 우리 무서운 정령왕께서 굉장히 많이 화가 나셨다. 다음엔 너희들 숨통을 얼려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슬슬 정체를 드러내시지?”
내가 어이없어하든 말든, 상대를 도발하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그 황당무계한 도발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저벅.
잠시 후 얼어붙은 나무들 사이로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복으로 보이는 검은색 제복에 긴 망토를 걸친 남자와, 아슬아슬할 정도로 노출이 심한 옷차림을 한 여인이었다(그것을 본 라피스가 가볍게 휘파람을 분 건 무시하기로 하자).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반면 여인은 초조한 듯 눈을 똑바로 맞추지 못하며 입술을 깨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두 사람 다 머리가 칠흑처럼 검었고, 눈동자 역시 동일한 붉은색이었다.
마족.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정령왕들을 처음 봤을 때처럼, 나는 반사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에 가벼운 충격을 느꼈다.
마족이라니. 어째서 마족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던 거지?
의도한 게 아니라면 참으로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지금 막 마신의 개입 여부를 판단하고 있었던 참이지 않은가. 마족이 마신의 고유 창조물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마신으로부터의 신탁, 마신을 위한 번제, 그리고 마신이 창조한 그의 아이들. 그 모든 것들이 단지 우연일 뿐일까? 드러나는 정황들마다 모두 하나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차분하게 두 마족을 응시했다.
“당신들은 마족이군요. 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죠?”
마족이란 단어에 옆에 있던 이사나와 카이테인이 어깨를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불끈 움켜쥔 주먹이 새하얗게 일어난 것을 보며 나는 초조하게 마족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 쪽이었다.
“물의 왕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데르오느빌, 제 옆의 여인은 세르피아네스라고 합니다. 저희는 스왈트 제국의 황제 이사나의 뒤를 쫓으란 명을 받았습니다.”
“명?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죠?”
“마왕 전하입니다.”
“마왕?”
생각보다 순순하게 대답하는 태도도 그렇지만, 뜻밖의 존재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당연히 마신의 명이라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일개 마족에게 마신이 직접 명령을 내렸을 리는 없었다. 총책임자가 마왕이고 그를 통해 전달이 되는 구조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 정체는 언제부터 알았죠?”
“처음부터 알았던 건 아닙니다. 지켜보는 도중에 깨달았습니다.”
“왜 공격을 하지 않고 따라만 다닌 거예요? 지금까지 얼마든지 기습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저희가 받은 명령은 황제의 동태를 파악하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켜만 봤다구요? 보고도 하지 않고?”
“예.”
막힘없는 대답에 나는 잠시 황당해했다. 데르오느빌이라는 마족은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한 듯 당당한 모습이었다. 왠지 상당히 특이한 성격인 것 같았다.
“저기, 이름이 데르오느빌이라고 했죠?”
“정식 이름은 그렇지만 보통은 데르온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
“데, 데르온?”
먼저 반응을 보인 건 이사나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