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1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11화(111/608)
제111화
“넌 뭐야?”
라피스 역시 같은 것을 느꼈는지 싸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다가오던 상태 그대로 그가 움찔 걸음을 멈췄다. 설마 이렇게 빨리 기척을 간파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린 듯 그는 곧 자세를 바로 하고 척척 빠르게 다가왔다. 이왕 들킨 거 대놓고 나가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소. 에이프릴 영애의 소식을 묻고 다닌다는 이방인들이 있다 들었는데, 혹시 그게 당신들이요?”
우람한 덩치만큼이나 낮고 굵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서로 어울린다는 느낌은커녕 오히려 겉돈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차림새를 봐선 딱히 병사인 것 같지도 않아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데, 무슨 일이시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대체 어디에서 온 누구기에 영애에 관한 소문을 캐고 다니는 거요?”
“아, 딱히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알아보는 것뿐이거든요.”
“단지 그것뿐? 당신들의 그런 행동이 수상하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거요?”
마치 따지는 것 같은 어조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낯선 사람이 다가왔을 땐 어쩌면 그로부터 괜찮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일부러 여기까지 우리를 찾아온 걸로 봐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다짜고짜 훈계부터 늘어놓을 줄이야. 전개가 너무 뜬금없었다.
“수상하다라, 딱히 그쪽에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그게 무슨 뜻이오?”
라피스의 흥미진진한 시선이 상대의 위아래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엔 여인이 남장을 하고 다니는 게 더 수상한 일이거든.”
“엑? 남장?”
그제야 나는 그에게서 느껴지던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목소리는 물론 말투와 체구까지, 전부 어딘가 억지로 꾸며진 듯 인위적인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모두의 놀란 시선이 닿자 그는 매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요? 남장이라니! 내가 어디를 봐서 남장을 한 여인이란 말이오?”
“틀림없는 사내시다?”
“당연한 얘기를 하는군! 더 이상 나를 모욕하면 가만두지 않겠소!”
진심으로 모욕을 당한 듯 분개에 찬 목소리였다. 그러나 라피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이 라피스 님의 눈은 못 속이지. 어디서 얄팍한 마법이라도 좀 주워 배운 모양인데, 이 자리에서 마법이 깨져도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는지 볼까? 초급 수준의 환상 마법 따위, 지금 당장이라도 파훼할 수 있는데 말이야.”
“……!”
빙긋 웃으며 뱉은 말은 담담했지만, 담겨진 내용은 가차 없었다. 싸늘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은 상대는 그대로 뻣뻣하게 굳었다. 조금도 미동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 솔직한 반응에 흥이 식었는지 라피스는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용무인지 모르겠는데, 용건을 말하려면 제대로 그쪽의 정체부터 밝혀. 네 어설픈 위장술은 우리에게 전혀 통하지 않으니까 되지도 않는 수작 부리지 말고.”
“…….”
그는 말없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초반의 당당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 같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피스의 말에 반격을 하지 못한다는 건 그의 정체가 정말로 여인이라는 말이었으니까.
“저어…….”
내가 말을 걸려고 하자 그는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후드 아래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와 내 일행들의 모습을 빠르게 훑더니 낭패감을 드러냈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혼란스러운 기색이었다.
“미, 미안하오. 실례가 많았소.”
사과를 내뱉자마자 그대로 달아나듯 몸을 돌리려 했다. 나는 급히 일어나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기요, 잠깐만요.”
“뭐, 뭐요?”
붙잡을 줄은 몰랐는지 그는 화들짝 놀란 채 경계 어린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만큼이나 나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겉보기와 다르게 팔 아래 느껴지는 뼈대가 매우 가늘었기 때문이다. 살의 촉감도 단단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정말 여자였구나. 외관만 봤을 때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결과였다. 어깨와 키 모두 일반인보다 훨씬 우람한 데다 어디를 보아도 근육으로 뒤덮인 체형이었으니까. 라피스가 한 말을 생각하면 아마도 마법을 써서 변장을 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음, 그러지 말고 차분히 얘기 좀 하죠. 저희들에게 할 얘기가 있었던 거 아니었어요?”
“돼, 됐소. 생각해보니 이방인들과 나눌 용건은 아니었던 것 같소.”
“에이프릴 영애가 죽었다는 사실 말인가요?”
흠칫.
붙잡힌 팔이 눈에 띄게 떨렸다. 내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자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영애의 행방이 2년째 묘연한데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에 관해 제대로 아는 자가 없더라고요.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죠?”
“다, 당신들이 상관할 일이…….”
“공작 전하가 그 일로 협박을 받고 있는 것 같았어요.”
“……!”
뜻밖의 대답이라서일까. 그는 다시 굳어진 채 나를 돌아보았다.
“설마…… 공작 전하를…… 뵈었단 말이오?”
“직접 뵌 건 아니에요. 저택 안을 염탐해서 알아낸 사실이거든요.”
“마, 말도 안 돼. 저택의 봉문이 얼마나 철저한데, 염탐이 가능할 리가 없소. 그 안에 들어갈 방법이 있을 리가…….”
“뭐, 조금 특별한 방법을 썼죠.”
“특별한 방법?”
“이제 좀 얘기할 마음이 생겼나 보네요.”
내 말에 아차 싶었는지 그, 아니, 그녀가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는 눈동자를 향해 방긋 웃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갈까요?”
* * *
즉석에서 잡은 숙소는 처음 묵었던 여관의 특실만큼은 못해도 깨끗하고 단정했다. 그러나 라피스는 그게 영 불만인지 내내 구시렁거렸다.
“너무 좁아. 불결해. 하나도 고상하지 않아.”
“그만 좀 투덜거려. 그래도 이 여관에선 제일 좋은 방이라고.”
“그러게 누가 이 여관으로 하래? 당장 갈 곳이 필요하다고 굳이 바로 앞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올 건 없잖아.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내 몸을 눕힐 곳을 허투루 정해본 적이 없어. 하물며 특실도 없는 서민 여관 따위……!”
“어휴, 알았어. 나중에 다시 옮기자. 그러면 됐지?”
“그냥 특실은 안 돼. 무조건 귀족 전용.”
“알았다고!”
그제야 만족했는지 잠잠해지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건 숫제 계약자가 아니라 그냥 상전이다. 새삼 이사나가 얼마나 편리한 동행인이었는지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이사나와 카이테인은 못 본 척 묵묵히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다가 아직도 문틈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말했다.
“괜찮으니까 안으로 들어오세요.”
“…….”
“괜찮다니까요. 대화를 하려는 것뿐이니까 너무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지만…….”
“공작 전하의 근황이 궁금했던 것 아니었어요?”
그 말에 결심을 굳혔는지 문밖에 선 이가 천천히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후드를 깊게 눌러쓴 얼굴. 당당한 걸음과는 다르게 가슴 부근에 두 팔을 다소곳이 모은 모습이었다. 아마 긴장한 나머지 무의식중에 여인으로서의 행동이 나온 거겠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건장한 사내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들어왔으니 이제 말해주시오. 대체 어떻게 저택 안을 염탐한 거요? 공작 전하는 건강해 보이셨소? 그리고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기에 이 일에 관심을 갖는 거요?”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작정한 것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조금 움칠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으음, 궁금한 게 많으신 것 같네요. 일단 통성명부터 할까요? 제 이름은 엘이라고 해요.”
“지금 장난하자는 거요? 난 이름을 묻는 게 아니라……!”
“엘, 숙소를 옮기는 거면 짐은 풀지 말고 그대로 놔둘까?”
그 순간 들려온 이사나의 질문에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당황한 듯 고개를 치켜든 상대는 이사나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화를 내던 자가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자 이사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굳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사나가 묻자 그녀는 다시 어깨를 움츠렸다.
“이, 이 목소리…….”
“예?”
“설마…… 황제 폐하?”
“……!”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 한마디는 자리에 있던 모두를 경악에 빠트렸다. 주위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분위기에서 직감한 걸까? 그녀는 다급히 이사나에게 다가섰다.
“제 생각이 맞는 건가요? 정말 폐하신가요?”
“무슨…….”
“폐하! 저예요!”
다급한 외침과 함께 그녀는 머리를 덮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주위의 공기가 달라지는가 싶더니, 건장하던 그녀의 체구가 급속도로 작게 줄어든 것이다. 아마 얼굴을 드러내면 마법이 해제가 되도록 설정되어 있었던 듯했다.
젖혀진 후드 안에선 하얗고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제비꽃을 닮은 연보라색 눈동자, 예상보다 훨씬 예쁘장한 이목구비는 누가 보기에도 여인의 것이었다. 머리 위에 반쯤 걸쳐진 후드 사이로 금색의 머리칼이 풍성하게 흘러내렸다.
“저 기억나세요?”
목소리도 고운 음성으로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투박하고 낮은 음성을 내뱉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이사나는 다른 의미로 놀란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어버린 얼굴로 굳어 있던 그는 한참만에야 힘겹게 목소리를 내뱉었다.
“맙소사…… 설마…… 에이프릴…… 누님?”
뭐?
나는 당황해서 여인을 바라보았다. 에이프릴이라니, 설마 저 여인이 우리가 수소문하던 바로 그 장본인이란 말이야?
주위의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지 여인은 오직 이사나에게만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큰 눈 가득 눈물을 글썽거렸다.
“역시 폐하셨군요! 아아, 인연의 신이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정말 누님이십니까? 제가 보고 있는 게 정말 사실인 겁니까?”
“네, 맞아요, 폐하! 폐하께서 알고 계시는 그 에이프릴입니다. 카웰 드 클모어 공작의 하나뿐인 여동생 에이프릴 드 클모어입니다!”
격정에 차오른 얼굴이 방울방울 흘러내린 눈물로 흠뻑 젖기 시작했다. 기도하듯 모아 쥔 손은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사나 역시 격정에 휩싸인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누님이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겁니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연을 말씀드리려면 너무 길어요. 저야말로 폐하께서 설마 모습을 바꾸고 이곳에 계실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이젠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
“누님!”
흐느끼듯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아마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충격 때문인 듯했다. 깜짝 놀란 이사나가 얼른 달려가 그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그가 발을 내딛기도 전에 여인을 부축하는 손길이 있었다. 라피스였다.
“아, 감사합니다, 라피스 님.”
“됐어. 그보다 이 여자가 에이프릴이야?”
“예, 이 얼굴, 이 목소리. 틀림없는 누님입니다.”
“흐응, 죽었다면서 멀쩡하게 살아 있네?”
그의 거침없는 언사에 에이프릴의 어깨가 작게 들썩였다. 질끈 감은 눈에선 눈물만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라피스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무튼 진정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어디든 데려가 눕혀놔.”
“네, 알겠습니다.”
“저도 같이 돕겠습니다.”
이사나가 에이프릴을 넘겨받는 동안 서둘러 다가온 카이테인이 정중하게 부축을 거들었다. 두 사람은 축 늘어진 에이프릴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계속 흐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완전히 탈진한 탓에 현실 감각도 잊었는지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도 보였다.
“폐하, 폐하…….”
“네, 누님. 저 여기에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안심하세요.”
에이프릴이 울면서 찾을 때마다 이사나는 침착하게 손을 잡아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자리를 피해주는 게 나으려나? 아무래도 남자들만 있는 방에 여인이 혼자 울고 있으니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마 에이프릴 역시 정신을 차리고 나면 이 상황을 무척 창피해할 게 분명했다. 적어도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는 남매끼리 시간을 갖게끔 자리를 피해주는 것도 괜찮을 듯싶었다.
나는 나가자고 말할 생각으로 라피스를 바라봤다. 그것을 느낀 듯 그의 시선 역시 내게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침대가 되게 초라하지? 그러니까 이런 여관은 안 된다니까.”
“…….”
어쩌면 4차원과 개인주의는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