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24)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24화(124/608)
제124화
콰과과광! 쿠우웅!
엄청난 소음과 함께 폭발이 터졌다. 건물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진동. 곧 충격을 이기지 못한 천장에서 조명 장식이 와장창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에서 떨어진 돌가루가 이미 수북이 쌓인 먼지 위를 또다시 요란하게 덮었다.
“으, 으으으…….”
세트니오는 공포에 질린 채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납작 엎드린 그의 가랑이 사이에서 누런 액체가 흘러나왔다. 겁에 질려 오줌을 누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를 돌아볼 정신도 없었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함께 있던 기사들은 폭발에 휘말려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다. 세트니오는 덜덜 떨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흑발의 사내가 무심하게 서 있었다. 희고 깨끗한 피부, 조각처럼 섬세한 이목구비, 저절로 시선이 갈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마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느긋하게 감상하며 한 번이라도 더 눈길을 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단지 무심하게 서 있는 모습이 그에겐 지옥에서 날뛰는 악귀처럼 보였다. 바로 그가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주범이었으니까.
다행히 그는 주변의 상황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에 내심 안심하면서도 세트니오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내 앞에 있는 벽면은 크게 파여 있는 상태였다. 바로 그곳에 처박혀 있다시피 주저앉아 있는 카리브디스 공작이 있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존재다. 그 경지에 오른 이래 공작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짓밟힌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조금 전의 일을 보기 전까지, 세트니오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사내가 그 모든 것들을 뒤집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작을 장난감처럼 유린했다.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고, 난생처음 보는 공격 마법들이 순식간에 치솟아 퍼부어졌다. 쉴 틈 없이 이어지는 공격엔 공작도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는 대응하긴커녕 방어에만 급급했다. 마치 어른과 아이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그대는 인간이 아니로군.”
불현듯 싸움을 앞두고 공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에 여유롭게 웃으며 긍정하던 사내의 모습도.
인간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백작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종족은 마족이었다. 사내의 무시무시할 정도로 뛰어난 마법 운용 능력, 그리고 칠흑같이 새카만 머리칼 때문이었다.
마신의 자녀들인 마족은 모두 흑발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른 피가 섞이면서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색이 됐지만, 초대 스왈트 제국의 황제도 마신의 축복을 받아 흑발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제국민들은 오래전부터 흑발을 고귀한 상징으로 여겨 왔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스왈트 제국에서 흑발은 흔하진 않았지만 아주 드문 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마신의 축복을 받은 땅이라 그런지, 길거리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색 중 하나였다. 즉, 머리카락 색만으로 마족임을 의심하는 건 너무 심한 억측이었다.
무엇보다 사내의 눈동자가 달랐다. 마족의 또 다른 공통점은 눈 색이 붉다는 것이었다. 각자 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마족이라면 모두 붉은 계열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학설에 따르면 그 이유는 천신이 내린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까마득히 머나먼 과거 천마대전이 열렸고, 수많은 천사들이 죽자 화가 난 천신이 마족에게 저주를 내리면서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마족들은 다른 것만은 전부 위장해도 눈동자 색만은 바꾸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있는 사내의 눈은 빈말로도 붉은색에 가깝다고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마족이라면 우리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들이 아니고서야 소드 마스터를 이렇게 유린할 수 있는 종족이…….’
……있다.
거기까지 생각한 세트니오는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역사를 관람하며 영겁의 세월을 사는 존재. 마족만큼이나 강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수많은 고위 마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유일한 종족!
‘서, 설마…….’
“히이익!”
그 순간 사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자 세트니오는 반사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이미 젖어 버린 가랑이 사이가 또다시 축축해졌다.
그것을 잠시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본 사내―메세테리우스는 이내 그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벽에 처박힌 남자를 응시했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라는 점을 감안해 처음부터 빈틈을 내주지 않고 속공을 펼친 것이 제법 효과가 있었다. 제아무리 검의 경지에 이른 자라도 빠르게 쏟아지는 마법 공격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마지막 것이 꽤 충격이 컸는지 그는 조금 전부터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축 늘어진 머리칼은 붉은 피로 흥건했다.
“야, 벌써 죽었냐?”
“…….”
“흐응, 생각보다 싱겁게 끝날 모양이네. 이러면 좀 재미없는데. 내가 너무 기대가 컸나 봐? 혹시 이름만 소드 마스터인 거 아니야?”
일부러 도발한 말에도 여전히 반응이 없다. 메세테리우스는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괘씸한 녀석을 응징하는 건 기쁘지만 무력한 존재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건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자신과 호각을 이루었다면 그건 그것대로 기분이 나빴을 테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뭐, 아무튼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진 마. 이건 전부 네가 날 먼저 자극한 탓이거든. 그러게 누가 남의 것에 함부로 손대래? 난 말이지, 빼앗기는 걸 극도로 싫어한다고.”
사실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탓이 더 컸지만 메세테리우스는 꿋꿋이 다른 이유만 앞세웠다. 잠시나마 인간에게 당해 쓰러졌던 그때의 그 치욕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에도 카리브디스는 미동 없이 약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 나름의 위신을 세우려는 메세테리우스에겐 안타깝게도, 앞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는 웅웅거리는 귓가에 막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이 이렇게 지겹고 괴로웠었나?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피 때문에 온몸이 나른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통엔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했고, 죽을 뻔한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의 의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가, 내게도 죽음이 오는가.
생각보다 일렀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슬슬 쉬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찾아온 휴식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명령이다.
아득한 머릿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언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카리브디스는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붉게 물든 시야가 점차 맑은 색으로 돌아왔다.
그대는 나보다 먼저 죽지 마라.
울음기를 담은 그 목소리는 처연했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 보다 고고했다. 그 구슬 같은 눈물 앞에, 부서질 것처럼 서 있는 연약한 등 뒤에서, 그는 맹세했었다.
“반드시 이분을 지키겠노라……고.”
아아, 그랬었지. 그는 토하듯 한숨을 내쉬며 검을 움켜쥐었다. 멀어졌던 의식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아직은 죽을 수 없었다. 끝을 지켜보기로 약속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때까지 그의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 순간 검신에서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이상하다고 느끼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낯선 음성이 울렸다.
―지키고 싶은가?
“……!”
카리브디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봐도 그에게 말을 건 것으로 보이는 이는 찾을 수 없었다. 환청을 들은 건가. 그가 허탈하게 자조하던 순간이었다.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가?
두 번째 음성이 울렸다. 이번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순간 쥐고 있던 검의 손잡이에서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당황해서 내려다본 그의 시야에 하얗게 빛나고 있는 검신이 보였다. 미끼로 쓰기 위해 일부러 남겨두었던 마법 무구였다. 그 속에서 차디찬 공기가 천천히 스며 나오고 있었다. 카리브디스는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지금 이건 네가 하는 말이냐?’
―그렇다.
‘넌 누구지?’
―블레스터.
블레스터?
처음 접해 본 낯선 이름에 카리브디스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목소리는 상대의 혼란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나는 지키는 자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 너의 갈망하는 의지가 나를 깨웠다.
‘지키는 자의 신념을 지킨다…….’
―나와 계약하겠는가?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들려온 제안에 그는 조금 당황했다.
‘계약?’
―네게 힘을 주겠다. 너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힘을.
‘신념을 지키기 위한 힘이라…….’
―널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미 퇴색돼 버린 신념이라도 말인가?’
―그렇다 해도.
카리브디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어쩌면 이 목소리는 악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의 부름에 응답한 순간부터 이미 선한 쪽은 아닐 터였다.
“……아무래도 좋아.”
그는 피식거리듯이 웃었다. 투둑, 눈가에 고여 있던 핏물이 마치 눈물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제안, 고맙게 받아들이지.”
휘이잉. 대답과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세찬 바람 속에 온몸이 내맡겨진 것 같았다. 그가 한창 부유하는 기분에 취해 있을 때, 다시금 머릿속에서 나직한 음성이 연달아 울렸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외로운 길을 걷는 자여.
―세계의 숨이 달라질 때까지, 난 네 곁에 있을 것이다.
‘세계의 숨이…… 달라질 때까지라…….’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마지막 한 문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게 무엇이든, 지금 카리브디스에게 중요한 건 힘을 얻는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카리브디스는 굳어져 있던 자세 그대로 숨을 크게 내뱉었다. 늘어져 있던 몸 안에 점차 기운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는 것 같았는데, 거부감이 일지는 않았다. 메세테리우스 역시 그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응? 어째 분위기가 조금 달라진 듯한?’
이윽고 돌무더기 사이에서 카리브디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긴장하며 바라보길 잠시간, 메세테리우스는 곧 코웃음을 쳤다.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비틀거리며 다리에 힘을 싣는 그의 모습에선 아무런 의지도,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설마 하니 그 꼴로 날 상대할 생각인 건 아니겠지?”
“……와라.”
“이봐, 이봐. 너무 아파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어? 넌 날 못 이긴다고.”
“오지 않으면 내가 가지.”
“하하, 대단한 자신감이네. 차라리 그대로 죽는 게 나을 텐데, 정말 어리석은…….”
그 순간 메세테리우스는 숨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서걱, 옅은 바람과 함께 눈앞에서 무언가가 팔랑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잘린 머리칼이라는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카리브디스가 검을 휘두른 것이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공격 속도가 특별히 더 빨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메세테리우스는 그의 기척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메세테리우스는 부릅뜬 눈으로 카리브디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 조금 전까지는 없었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건 틀림없는 바람의 힘이었다.
“뭐야, 너…….”
“왜 그러지?”
“몰라서 묻는 거냐! 왜 갑자기 네게 정령의 기운이 생긴 거냐고!”
“정령? 흠, 그게 정령이었던가?”
아무렇지 않게 되묻는 카리브디스를 보며 그는 입술을 악물었다. 설마 그 잠깐 사이에 정령과 계약을 한 건가? 아니, 그런 것치고는 뭔가 이상했다. 소환 의식도 없이 정령을 소환한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다. 게다가 그에게서 감도는 힘은 흔히 정령사들이 풍기는 것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정령의 기운인 건 틀림없지만 그와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특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게 된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정도의 힘은 바람의 정령 중에서도 정령왕 미네르바만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물의 왕은 치유와 생기를.
불의 왕은 힘과 능력을.
땅의 왕은 통찰과 예언을.
바람의 왕은 방어와 은신을.
미네르바가 펼치는 바람의 장막은 사람의 기척을 완전히 감추고 그의 존재 자체를 세상의 그림자로 만든다. 하위 정령도 비슷하게 흉내 낼 순 있지만 미약한 수준이었고, 드래곤인 자신은 그 정도쯤은 간단히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앞에 있는 카리브디스의 기척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그를 지키고 있는 무언가의 힘이 미네르바를 상회한다는 뜻이다.
바람의 정령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은신의 힘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하위 정령이 그의 왕만큼 강하다는 건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니 결국 미네르바 본인의 능력이란 소리다. 하지만 완전히 그렇다고 단정할 수만도 없었다. 만약 정말 정령왕과 계약한 거라면 파급력이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젠장! 뭐야,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정령왕도 아니면서 누가 정령왕의 능력을…….’
그때 문득 메세테리우스는 언젠가 들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머나먼 옛날, 바람의 정령왕이 만들었다는 검에 관한 소문이었다. 오래전 미네르바는 한 인간과 계약했고, 그를 위해 자신의 힘을 봉인한 검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바람이 크게 기운을 잃어, 그날 이후로 공기의 흐름이 옅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검이 어떻게 생겼다고 했더라? 분명 엄청난 능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고 단순한 모양이라고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메세테리우스는 무심코 카리브디스가 들고 있는 검 쪽에 시선을 보냈다. 매우 평범한 형태의 검이었다. 그것이 본래 자신의 소유였다는 것은 검신에 새겨진 추적 마법진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소장품 중에서 가장 별 볼 일 없어 내내 방치했던 것이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평범한 검에서 지금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안개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기운이 주인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 선명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