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2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29화(129/608)
제129화
“아, 씨발…… 어떤 새끼가……쿨럭, 쿨럭!”
―엔딜, 괜찮나?
잠깐 사이에 물을 많이도 삼킨 모양이다. 연신 물을 토하는 계약자가 걱정됐는지 시큐엘이 급히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급 정령인 그는 방금 엔딜을 덮친 파도가 인위적인 공격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그가 노기를 담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감히 누가…….
노골적인 공격인 만큼 흔적을 따라가는 것도 쉬울 터. 시큐엘은 단숨에 경로를 파악하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날 선 시선은 나를 발견한 즉시 경악으로 변했다. 설마 내가 이곳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한순간에 얼어붙은 녀석이 멍청히 입을 벙긋거리는 것을 보며(늑대도 입을 벙긋거릴 수 있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와, 왕…….
―지금 나 아는 척하면 죽는다.
―…….
다행히 시큐엘은 내 뜻을 잘 이해했다. 나는 바로 입을 다문 그를 대견하게 바라봐 준 다음 다시 엔딜 쪽을 응시했다. 그사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는지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엔딜! 자네, 괜찮은가?”
뒤늦게 갑판의 소란을 접한 선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급히 다가와 물었다. 엔딜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올리다 말고 눈을 부라렸다.
“선장 눈엔 이게 괜찮아 보여? 씨발, 누구야? 어떤 새끼가 이런 짓을 했냐고! 당장 앞으로 튀어나오지 못해?”
“으응? 그게 무슨 소린가, 엔딜?”
“무슨 소리긴! 날 공격한 새끼한테 하는 말이지!”
“공격을 했다니 누가? 그냥 파도가 일어난 것뿐이지 않은가.”
선장은 대뜸 행패를 부리는 엔딜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응시했다. 다른 목격자들도 어리둥절한 반응이긴 마찬가지였다. 정령의 개입이 활발한 것과는 별개로 이 세계의 사람들은 정령의 능력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우연히 발생한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보였을 테니 대뜸 공격자를 찾는 모습이 이상하게 비치는 것이 당연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엔딜이 창피를 모면하기 위해 일부러 남 탓을 하는 거라고 수군거리며 웃기도 했다. 엔딜도 그것을 봤는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하! 태풍이 부는 것도 아닌데 왜 멀쩡한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병신아! 이 안에 정령사가 있어! 그 새끼가 날 공격했단 말이야!”
“저, 정령사?”
“그렇다니까! 씨발, 내 말 맞지, 시큐엘? 이거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 아니지? 분명 누가 날 공격한 거지?”
엔딜의 질문에 시큐엘은 살짝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선장과 구경꾼들은 모두 당황했고, 반대로 엔딜은 의기양양해졌다.
“거봐, 그럴 줄 알았어. 시큐엘, 그 정령사 새끼 어딨는지 알겠어?”
―……잘 모르겠다.
“모른다니? 넌 상급 정령이잖아!”
잠시간 시큐엘의 시선이 아주 빨리 내게 닿았다 사라졌다. 첩보 영화를 빙자케 하는 순발력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축 늘어진 귀 위로 굵은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는 광경이 보이는 것 같았다.
―사, 상대의 기운을 찾을 수가 없다.
“제대로 좀 찾아봐! 진짜 못 찾겠어?”
―미안하다, 불가능하다.
“씨발! 무슨 상급 정령이 그딴 것도 못해!”
엔딜은 갑갑한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보아하니 정령의 소행이란 걸 알아차릴 정도의 눈치는 있어도 스스로 정령사의 기운을 찾아낼 만큼 감이 좋은 편은 아닌 모양이다. 상급 정령사치고는 상당히 드문 일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첨부터 기운이 별 볼 일 없긴 했다. 이마의 문장을 보기 전까지 그가 정령사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정도니까. 즉, 본래 타고난 재능은 별로 없는데 특별한 운이 따랐다는 뜻이다. 이사나도 비슷한 경우였지만 재능만으로 치면 저 엘프가 더 심하게 없는 것 같았다.
“아우씨, 더럽게 짜증 나네! 당당히 내 앞에 나서지 못하는 걸 보니까 맞짱 뜨면 순식간에 발릴 새끼가 분명한데 말이지. 좆같은 새끼가 어디서 이런 꼼수를 부려? 어떤 새낀지 잡히기만 해 봐! 사지를 잡아 포를 떠 버릴 거야!”
‘물 갖고 백날 시도해 봐라. 포가 떠지나.’
고래고래 떠드는 외침이 하도 당당해서 나 역시 나름의 답변을 해 주기로 했다. 이번엔 파도를 일으킬 필요도 없이 엔딜의 머리 위에 바로 물 덩어리를 만든 것이다. 촤아아악! 녀석은 소리치던 자세 그대로 물벼락을 맞았다.
“푸학! 망ㅁ낭ㄱㅁ%@#$%@!!”
“에, 엔딜!”
또다시 홀딱 젖은 녀석이 알 수 없는 괴성을 지껄이는 동안 나는 눈빛으로 시큐엘을 압박했다. 말하면 알지? 수많은 의미를 담은 시선에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엔딜에겐 안된 일이지만 그가 스스로 날 찾아내는 건 백만 년이 걸려도 불가능할 것이다. 설령 찾아낸다 하더라도 원하는 방식의 보복을 할 수도 없겠지만.
“아, 이제 좀 후련하다. 자, 다시 선실로 가죠.”
나는 생글거리며 아직도 얼어 있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간 굳어 있던 두 사람은 이내 숨을 죽이고 웃음을 터뜨렸다.
“굉장합니다, 엘 님.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통쾌한 광경인 것 같군요.”
“헤헤, 그래요?”
“응! 대단해, 엘. 정말 멋졌어.”
구경꾼 중에서는 대놓고 웃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빠른 속도로 전염되어 곧 순식간에 갑판을 장악했다. 처음엔 눈치를 보느라 조심하던 자들도 오래지 않아 폭소를 흘리기 시작하자 결국 엔딜은 서둘러 장사를 접고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젠장! 두고 보자아아!”
떠나면서 녀석이 외친 소리가 메아리쳐 울리는 그 순간까지, 갑판 위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덕분에 분위기만은 화기애애한 여행길이었다.
* * *
그날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엔딜의 정령 장사(?)는 보란 듯이 성업했다. 바닷속은 누구나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고, 인간은 수많은 인종 중에서도 가장 호기심이 왕성한 종족이었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광경 덕분에 홍보 효과만 더해진 듯 그 앞으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같이 갑판 위에서 벌어지는 정령쇼―내 기준에서는 그냥 쇼였다―를 참담한 기분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종일 장사판이 벌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엔딜은 언제나 하루에 두 명의 손님만 받았고, 탐험 시간도 10분 남짓에 불과했다. 그 이상은 돈을 더 얹어 준다고 해도 칼같이 사양했다.
처음엔 나름의 장사 신조인가보다 여겼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는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연스럽게 이해했다. 일부러 손님을 받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엔딜이 쓸 수 있는 마나량의 한계가 거기까지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미숙한 자질인 걸 알았기 때문에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그 과정에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그렇지 않아도 엔딜의 이마에 찍힌 계약의 인장은 매우 희미한 편이다. 그런데 가끔씩 그것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보통 사흘 간격마다 한 번씩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런 날이면 엔딜은 수많은 항의를 무시하고서라도 반드시 장사를 쉬었다. 문제는 그렇게 쉬고 온 이튿날엔 여느 때보다 인장이 선명한 색을 띤다는 것이다. 마치 에너지를 다 쓴 부품을 새로 충전이라도 한 듯이.
‘뭔가 좀 이상한데…….’
흐린 인장이라도 수련 등을 통해 얼마든지 선명해질 순 있다. 하지만 더 흐려지거나 아예 사라지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완전히 사라진 문장이 갑자기 선명해지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착각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 건, 며칠 후 그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였다.
“정령 소환 주문? 그런 거 모르는데?”
아마 정령사가 되고 싶었던 누군가가 그에게 계약 방법을 질문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상을 벗어난 엔딜의 대답에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모른다니? 상급 정령사면서 소환 주문을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에이, 알려 주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지?”
“미친. 할 일이 그렇게 없냐? 내가 왜 그딴 걸로 거짓말을 해? 꼭 멍청한 새끼들이 소환 주문을 외워야만 정령이랑 계약할 수 있는 줄 안다니까.”
“그게 아니면?”
사람들의 얼굴에 의문이 더 짙어지자 엔딜은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은사(恩賜) 계약이라는 거 알아?”
“은사 계약?”
“쯧쯧, 그럼 그렇지. 이참에 귓구멍 씻고 잘 들어 두라고. 정령사는 말야,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물게 후천적으로 능력이 생기기도 해. 내가 바로 그런 경우지. 물의 왕으로부터 시큐엘을 선물 받았거든.”
“물의 왕이라면…….”
“그야 당연히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님이시지 누구겠어.”
“……!”
엔딜의 폭탄 발언은 주위를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우와아, 커다란 탄성이 쏟아지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차피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내 행동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게 정말이야? 정령왕이 시큐엘을 줬다고?”
“그럼 물의 정령왕을 실제로 만난 거야?”
“한심한 새끼들. 그런 고귀한 분이 이런 미천한 세상에 직접 나타나실 수 있겠냐? 시큐엘이 강림하면서 알려 준 거다.”
“시큐엘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물이 솟구치더라고. 그러더니 아름다운 물의 늑대로 변하는 거야. 당황한 내가 물었지.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늑대가 대답했어. 내 이름은 시큐엘. 엔딜, 너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보신 물의 왕께서 네게 나를 보내셨다.”
“우와아!”
연극배우처럼 그럴듯한 상황 재현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했다. 그것에 덩달아 신이 났는지 엔딜 역시 잔뜩 고조된 표정을 지었다.
“알아보니까 은사 계약 중에서도 나처럼 상급 정령사가 되는 건 더럽게 희귀한 사례라더라. 뭐, 그만큼 부작용도 있긴 해. 후천적으로 발달한 거라 그런지 능력을 계속 쓰면 체력이 조금 후달리거든. 그래서 며칠마다 한 번씩 쉬어 줘야 해.”
“헤에, 그래서 쉬는 거였구나. 아무튼 굉장하다, 엔딜! 정식으로 정령왕의 인정을 받았다는 거잖아. 다른 평범한 정령사들보다 더 대단한 거 아니야?”
“뭐, 그런 거지.”
어깨를 으쓱이는 그를 향해 감탄과 시샘의 눈빛이 쏟아져 들었다. 주위는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지만, 갑판을 가득 채운 열기와는 반대로 내 머리는 점차 차게 식어 갔다. 조금 전 그가 한 말들은 모두 내게 금시초문인 것들뿐이었으니까.
―와, 왕이시여…….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시큐엘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조아렸다. 엔딜과 계약한 바로 그 녀석이었다. 지은 죄를 아는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그를 나는 굳은 얼굴로 노려봤다.
“시큐엘, 설마 너…….”
―요, 용서하십시오, 왕이시여.
그래,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엔딜이 정령사라는 걸 내가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 그가 정식 계약 과정을 거친 정령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긴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자질이 부족하다곤 해도 내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정령사가 상급 정령과 계약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설마 시큐엘이 자청해서 계약자로 나선 것이었을 줄이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짚었다. 내가 아는 한 평범한 사람이 정령 계약을 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정령왕이나 신(神)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직접 정령사로 만들어 주거나, 혹은 살아가는 환경에서 하나의 정령과 꾸준히 접촉하는 경우다(이사나의 경우는 말 그대로 기적이니 예외로 치자). 둘 다 흔치않은 일이지만 그나마 후자 쪽이 실현 가능성이 높은 편이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도 한 정령과 오랫동안 접촉하면 저절로 친화력이 쌓이게 된다. 이런 경우 정령 쪽에서 원하면 계약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아마 시큐엘도 이런 방식을 활용해서 계약을 맺었을 것이다. 심지어 왕의 선물이라는 허무맹랑한 소리까지 덧붙여가면서.
문제는 그가 상급 정령이라는 사실이다. 시큐엘 같은 상급 정령과 계약하는 데 필요한 마나의 양과 친화력이란 하급 정령과의 계약에 요구되는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그저 꾸준히 접촉하는 것만으로는 적정 수준을 쌓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타고난 자질이 없는 사람은 그런 엄청난 친화력을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한다. 운 좋게 계약에 성공해도 오래지 않아 저절로 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몸 안에 기운을 쌓을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엔딜이 지금까지 정령사로 버티고 있을 수 있던 건 시큐엘 쪽에서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시 그의 곁을 지키면서 기운을 퍼부어 주고, 며칠마다 한 번씩 틀을 보완하는 식으로 계약이 해지되는 걸 아슬아슬하게 막아 왔던 것이다. 그야말로 열녀가 부럽지 않은 정성이었다.
“너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저지른 죄의 대가는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 아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부디 이 모든 일의 책임은 제게만 물어 주십시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 와중에도 엔딜을 보호한답시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설마 하위 정령이 왕 앞에서 다른 자의 편에 설 줄이야. 그것도 예쁜 구석이라곤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엔딜 같은 계약자를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