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3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39화(139/608)
제139화
“왜들 그러고 있는 거지? 저 엘프 녀석은 묶지 않는 건가?”
“…….”
“그러고 보니 구경꾼들도 너무 많군. 고작 가두는 모습을 보려고 이리들 몰려들 리는 없고, 뭔가 다른 용무라도 있는 모양이지?”
“……맞아요.”
이번엔 무시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챈 듯 무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
“넌 뭐지?”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러 왔어요.”
“솔직?”
“당신의 거짓 자백 때문에 지금 엔딜이 매우 곤란해졌거든요. 솔직하게 모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세요.”
내 말에 그의 두 눈이 광기를 띠고 희번들하게 빛났다. 히죽거리며 웃는 얼굴이 지금 이 상황을 무척이나 가소로워하는 것 같았다.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군. 그러니까 넌 그 엘프의 편인 모양이지? 내가 거짓말을 해서 그를 곤경에 처하게 했다고 주장하려는 건가?”
“주장이 아니라 그게 사실이잖아요? 엔딜이 당신의 제안을 거절해서 보복하려는 거 다 알아요.”
“무슨 말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저 엘프가 그렇게 말하던가? 내가 절 모함했다고? 이런, 이런. 엔딜, 역시 날 오해하고 있었군.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말할 건 없지 않나.”
엉뚱한 대답에 묵묵히 듣고 있던 엔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 역시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해요?”
“실은 목걸이에 걸어 둔 마법이 조금 문제가 생겼었거든. 그 바람에 엔딜까지 같이 위험해졌던 모양이야. 그런데 그걸 내가 일부러 그랬다고 생각한 것 같더군.”
“그게 무슨…….”
“아마 증거를 없애려 한 거라 여긴 거겠지. 이 바닥에서는 흔한 일이니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하지만 엔딜, 맹세코 말하는데 그건 정말 오해네. 자네까지 죽일 생각은 아니었어.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나? 내 일을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인데 말이야.”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는 얼굴에 나는 기가 막혀서 입을 벌렸다. 동시에 엔딜이 경기를 일으키듯 자지러졌다.
“씨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개새끼야! 내가 언제 널 도왔어!”
“엔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기분은 이해가 가.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어차피 재판을 받다보면 전부 드러날 일인데 이만 포기하게.”
“이 미친 새끼가 진짜!”
“엔딜.”
저러다 일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던 엔딜이 움찔 몸을 굳히고 나를 돌아봤다. 생각해 보면 신관이란 사실을 밝힌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 본 상황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파드득 떠는 생선처럼 펄쩍 뛰고는 구석으로 냉큼 물러났다. 그러더니 이번엔 부담스러우리만치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응시하기 시작했다. 저건 또 왜 저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무스를 돌아봤다.
“저기요, 자꾸 그런 식으로 엔딜을 몰아갈 생각인가 본데, 그래 봤자 소용없거든요?”
“호오, 내 말을 믿지 않는군?”
“당연하죠. 그러니까 이제 거짓말 그만해요.”
“내 말이 거짓이란 증거라도 있나?”
역시나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당당하게 대꾸하는 무스를 보며 속으로 이를 갈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비실비실 웃었다.
“증거는 지금부터 만들 생각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지?”
“실은 제가 이런 사람이거든요.”
대답과 함께 나는 한 손으로 서클렛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이마를 본 무스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신관이로군.”
“정확히는 교황이죠.”
“…….”
덧붙인 말에 무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서 평정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조금 전 카이테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자를 찾아가 교황의 이름으로 물으십시오.”
“교황의 이름?”
“인장을 보이면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알고 보니 교황의 인장은 단순히 신이 직접 자신의 대리자로 세웠다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정식 인장을 받은 교황은 한 가지 특권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신의 권한을 빌어 신벌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이 과정엔 몇 가지 전제가 붙는다. 일단 인장의 여부와 함께 자신이 교황임을 밝혀야 하고, 신벌이 내리는 조건을 정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줌으로써 사전에 미리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음을 경고해야 한다.
물론 난 문장만 받았을 뿐, 진짜 교황은 아니다.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니 신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실제로 그런 특권을 쓸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을 이용할 순 있었다. 즉, 신벌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해서 그를 궁지에 몰자는 계획이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나도 그 소문은 들었지. 형벌의 교단에 첫 교황의 상징이 나타났다는 것 말이야.”
“알고 계시다니 얘기가 더 빠르겠네요. 그럼 교황이 신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죠?”
예상대로 무스는 얼굴 가득 낭패감을 드러냈다. 난 그 표정에서 자신감을 얻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이 자리에서 진위 여부를 가릴 거예요. 엔딜, 이쪽으로 와.”
“으응? 아, 네…….”
엔딜은 흠칫 어깨를 움츠리고는 내 옆에 조르르 다가왔다. 상당히 긴장했는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난 그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말했다.
“음, 그러니까…… 교황의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지금부터 묻는 이야기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신벌을 받아 눈이 멀게 될 거예요. 그 자체가 스스로 행한 죄의 증거가 되겠죠.”
“죄의 증거라…….”
“그래요.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하세요. 두 사람은 공범인가요?”
“아냐!”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엔딜이 소리쳤다. 그러자 훅 하고 숨을 삼킨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주시했다. 신벌을 받게 되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에게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숨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사람들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은 무스를 싸늘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방금 전의 대답으로 한쪽이 무죄임이 입증되었으니, 역으로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난 셈이다. 무스 역시 주변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이렇게 되면 내 쪽이 불리해지는군.”
“보시다시피 그렇게 되겠네요. 다시 질문하죠. 엔딜은 당신과 공범인가요?”
주위의 공기가 팽팽히 당겨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근처의 사람들이 모두 긴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곧 이 모든 일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무스는 결코 대답하지 못할 테고, 그 자체로 엔딜의 무죄가 입증될 테니까. 그러나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만 판단했던 걸까? 문득 무스가 엉뚱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흐음, 혹시 그거 알고 있나? 신관을 사칭하는 것도 신성모독죄에 해당한다는 것 말이야.”
“네?”
“그것도 심지어 교황 사칭이라니.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겁도 없군. 정말 터무니없는 일을 저질렀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쯧쯧 혀를 차는 무스를 향해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나를 훑어 내렸다.
“교황의 상징이 나타난 이후로 형벌의 교단이 전부 봉문에 들어간 건 아주 유명한 이야기지. 조만간 마신의 교단과 전쟁을 벌일 거라는 얘기도 있더군. 이런 상황에서 교황이 자리를 비운다? 그게 말이 될 거라 생각하나?”
“그건…….”
“신벌이 무서우면 솔직히 답하라? 그래 좋지. 하지만 말이야. 만약 여기서 신벌이 내려지지 않으면 넌 종교재판에 회부될 거다. 신관, 그것도 교황을 사칭한 죄라면 두고 볼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화형이지. 정말 괜찮은 건가?”
“…….”
마지막 말에서 난 그의 목적을 읽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역으로 날 떠보려는 것이다.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얼굴을 찌푸리자 주위의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것에 하나둘 의심을 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기 싸움이다. 나는 얼른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억지로 올린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하시죠.”
“호오, 과연 그럴까? 쉽게 수습할 수 있는 일이 아닐 텐데?”
“그쪽이야말로 신벌이 무서워서 회피하고 있는 건 아니구요?”
“하하, 그렇게 나오는 건가? 좋아,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대답하겠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그는 피식 웃으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서린 결의를 읽고 나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이 녀석, 끝까지 거짓말을 할 생각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직하게 벌어진 입에서 단호한 한마디가 뱉어졌다.
“엔딜은 나와 공범이 맞다.”
젠장!
참담한 기분에 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카이테인도 여기까진 생각지 못한 듯 당황한 기색이었다.
사실 ‘어쩌면’이란 기대를 하긴 했었다. 일단 엘뤼엔이 내게 교황의 상징을 주긴 했으니까, 특권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에 불과할 뿐, 역시나 신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신벌 내려졌어?”
“그게 좀, 뭔가 이상한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당황과 경악, 분노에 찬 시선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였다.
“후후후…… 후하하하하하!”
그리고 무스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자신의 예상이 맞아 떨어졌으니 기쁘기도 할 것이다. 망할 자식. 저 녀석은 겁도 없나? 왜 끝까지 거짓말을 하고 난리야?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어떤 식으로 지금의 위기를 모면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 그래서 신벌은 왜 없지?”
“…….”
“왜 대답을 하지 못하는 건가? 설명을 해 보시지 그래? 아니지, 이 경우엔 어떻게 가짜 신의 문장을 만들었는지 물어보는 게 더 빠르겠군.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 정도로 정교한 문장을 만들 수 있었지? 그린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가짜 아니거든요?”
“오호라, 끝까지 진짜라고 우기시는 건가? 그럼 왜 아무에게도 신벌이 내리지 않는 건지 제대로 설명을 해 봐. 둘의 증언이 다르니 그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겠지. 네가 진짜 교황이라면 지금쯤 신벌이 내려져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설마 요즘 형벌의 신이 매우 바쁘신가? 하긴, 마신과 대적한 상태이니 지금 상당히 정신이 없으시긴 할 거야? 그래서 친히 세운 대리자도 돌보지 못하시는 건가? 응?”
무스는 대놓고 나를 조롱했다. 엘뤼엔 바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당신 말대로 너무 바빠서 내 말을 못 들었나보죠.”
“하하하! 정말 재밌는 녀석이군. 그럼 큰 목소리로 말을 해 보지 그래? 넌 거짓말을 했으니 신벌을 받을 것이다! 하고 말이야!”
“그만 좀 하세요.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요?”
“하하! 왜, 또 다른 신벌이라도 내려 볼 생각인가? 해 볼 테면 해 봐. 얼마나 무서운 신벌인지 한번 경험해 보고 싶으니 말이야. 그래 봤자 화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나?”
“……적당히 하라니까요?”
“그러니 신벌을 내려 보라니까. 교황이라면 제대로 된 신벌 정도는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아, 물론 진짜 교황이라는 전제하에 말이야.”
“젠장, 하라면 못 할 줄 알아? 콱 이빨이나 왕창 빠져 버려라!”
자꾸만 이어지는 도발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꽥 소리쳤다. 물론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한 말이었다.
―……나 참, 뭘 하는가 했더니.
그런데 그 순간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스쳤다. 환청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속삭임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어? 하고 나도 모르게 무심코 멈칫했을 때였다.
“크, 크아아아악!”
돌연 비명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무스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동시에 후두둑, 그의 입안에서 붉은 핏물과 함께 무언가가 빠르게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바닥까지 굴러 내린 하얀 조각들을 보고 나는 살짝 굳었다. 그건 분명 사람의 치아였다.
“…….”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사람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무스를 바라보았다. 무스 역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멀뚱히 빠져버린 이를 보고 있었다.
“……시, 신벌이다.”
누군가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 황망히 깜빡거리고 있던 무스의 눈에서 갑자기 주룩, 피가 흘러내리는 게 아닌가!
‘헉!’
섬뜩한 광경에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기 무섭게, 무스의 입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으……으아아아아! 내 눈! 내 눈이!”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움켜잡고 바닥을 굴렀다. 이미 그의 얼굴은 피범벅으로 온통 엉망이 된 상태였다. 얼마간 몸부림치던 그는 곧 끄르륵, 거품을 무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다.
“…….”
“…….”
또다시 침묵이 흐르고,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니까 이거 지금…… 엘뤼엔이 도와준 것 맞지?
간신히 결론에 도달했을 때, 나는 사람들이 바닥에 엎드리는 것을 보았다. 선원이고 뭐고 할 것 없이 모두 덜덜 떨며 바닥에 깊숙이 얼굴을 대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신벌이 내리는 광경을 보았는데 겁을 먹는 것이 당연했다.
“교, 교황 폐하께 영광을…… 형벌의 신 엘뤼엔 님의 권능을 뵈옵니다.”
“권능을 뵈옵니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전부 합창하듯 똑같이 소리쳤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하나였다.
……이제 이 배를 계속 타고 가긴 글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