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47)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47화(147/608)
제147화
“클모어의 아가씨를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
“그게 무슨…….”
뜻밖의 말에 놀란 건 페리스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모두 굳자 엘드란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품 안에서 단단히 뭉친 꾸러미를 꺼냈다.
“자세한 것은 이것을 봐 주십시오. 그럼 전부 알게 되실 겁니다.”
“이게 뭐지?”
“아가씨께서 전하라 하신 것입니다.”
꾸러미 속에서 나온 것은 여러 번 접힌 한 통의 편지였다. 미심쩍은 시선을 보낸 뒤 케이는 그것을 펼쳐 들고 빠르게 훑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그의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모두 공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었다. 클모어 공작이 마신의 저주에 걸렸다는 것, 황제가 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머나먼 이국의 땅으로 떠났다는 것까지.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진실들이 담담한 필체로 적혀져 있었다.
편지는 에이프릴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황제가 돌아올 때까지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 두기 위해, 그녀는 요즘 한창 동분서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그녀가 혼자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공작의 가신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정치적으로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누구보다 절실했다. 그런 그녀가 떠올린 건 황제의 친위기사들이었다.
대장이자 백작 신분인 케이만이 아니라, 친위대들은 전부 작위를 지니고 있는 귀족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황제를 바로 곁에서 보필하는 임무를 지닌 만큼 귀족 세계에서 상당히 영향이 큰 존재이기도 했다. 그들이 도와준다면 클모어의 기반을 다지는 일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대공과 대적해야 할 공통된 목적을 지니고 있는 한, 그들은 막강한 응원군이 되어 줄 것이 틀림없었다.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마지막 문단에 적힌 문장까지 읽은 케이는 크게 호흡을 내쉬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엘드란을 응시했다.
“……이게 전부 사실인가?”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고양이의 목숨은 9개라고들 하지.”
“잘 모르시는군요. 길고양이의 수명은 3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만큼 소중하다는 의미였다. 왠지 목이 타는 기분에 케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싸구려 맥주의 텁텁한 느낌이 입안을 가득 채웠지만 덕분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정말 소름 끼치는 작자야. 잘도 수를 써 놨군.”
말끔하게 웃던 대공의 얼굴이 떠오르자 케이의 두 눈이 싸늘히 식었다. 속이 뜨거운 것이 방금 전 삼킨 술 때문인지,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클모어에만 도착하면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안일한 판단이었다.
“케이.”
페리스의 시선에 케이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대공은 이미 주사위를 던졌고, 그들의 어린 황제는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는 건 의미가 없었다. 케이는 비어진 맥주잔을 노려보다시피 바라보며 말했다.
“클모어로 간다.”
* * *
다음 직항까지 육로로 이동하는 길은 도보로 약 일주일 정도의 기한이 걸릴 예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길을 떠난 지 불과 반나절 만에 다시 인근 마을을 찾아 들어가야 했다. 예상보다 무더운 날씨 때문이었다.
국경은 넘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알폰프 제국의 영토에 진입한 건 아니기에 열대치고 기후는 제법 선선한 편이었다. 다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옷들이 죄다 방한용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최근까지 추위가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여름용 의복을 마련할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내가 기온에 둔감한 편이고, 이사나가 인내심이 많은 것도 원인 중의 하나였다.
황족으로 태어나 엄격한 교육을 받아온 탓인지 이사나는 습관적으로 참는 버릇이 있었다. 덕분에 동행으로서는 참 편한 타입이었지만(어떤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으니까) 본인에게는 안 좋은 결과를 불러올 때가 많았다. 지금 같은 경우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나는 끌끌 혀를 차며 발갛게 짓무른 이사나의 피부를 치료했다.
“어휴, 피부가 전부 달아올랐네. 이 정도면 상당히 쓰렸을 텐데, 왜 말을 안 했어?”
“으응,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을 못 했어.”
“이런 걸 보면 참을성이 많은 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니까. 내가 미리 신경 썼어야 했는데. 무심한 계약자라 미안해.”
“아, 아냐! 내가 미리 몸을 관리하지 못한 탓인걸. 라피스 님도 충고해 주셨는데 또 실수했어.”
“응, 라피스?”
“그, 그치만 나, 절대 누군가 알아서 날 챙겨 줘야 한다든가, 시중 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냐. 오해하지 말아 줘.”
“그게 무슨…….”
고개를 갸웃거리다 나는 무슨 말인지 깨닫고 피식 웃었다. 언젠가 보온 마법을 걸어 줬을 때 라피스 녀석이 퍼부었던 잔소리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 녀석이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냥 심술을 부린 것뿐이니까. 네게 그런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내가 더 잘 알아. 습관적으로 참는 건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미, 미안.”
“사과하라고 한 말 아냐. 그만큼 장점도 많다고 생각하거든.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인내심이 강해서 나쁠 건 없지. 넌 복권하면 정말 좋은 황제가 될 거야.”
“저,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응, 물론이지.”
“헤헤…….”
이런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건지 이사나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치료를 마친 후 나는 그를 데리고 곧장 상가로 향했다. 갈아입힐 옷과 필요한 비품을 사기 위해서였다. 내친김에 당분간 마을에 들르지 않을 작정으로 넉넉하게 구입했더니 순식간에 배낭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아무리 구겨 넣어도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을 찾지 못하게 되자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동안 나와 이사나는 각자 하나의 배낭만을 가지고 다니는 중이었고, 그 점에 딱히 불편을 느낀 적이 없었다. 필요한 만큼만 사서 마을에 들를 때마다 보충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막에 들어가면 더 이상 그런 편의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최소 몇 개월 치의 식량과 비품들을 확보해 둬야 할 텐데 그러자면 두 개의 배낭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배낭을 더 늘리자니 짐이 분산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으음, 할 수 없지. 내 배낭을 엄청 큰 걸로 바꿔야겠어.”
“아, 그럼 내 것도…….”
“아니야. 이사나 네 건 경량화 마법이 걸린 거잖아. 그냥 내 것만 바꾸면 돼.”
“하지만 그러면 엘 혼자 짐을 거의 다 들게 되는걸.”
“괜찮아. 그 정도는 별로 무겁지 않으니까. 흠, 근데 이것보다 더 큰 배낭이 있으려나? 차라리 그냥 줄로 묶어서 배낭 위에 탑처럼 쌓아 볼까?”
“봇짐장수처럼 말이지?”
“응, 모양새는 좀 이상하겠지만.”
국가 간 교역이 활발하지 않은 이 세계에선 정착한 상단보다는 봇짐장수가 더 많은 편이었다. 그들의 특징은 허리 아래부터 머리 위까지 짐을 탑처럼 이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같은 방식을 사용하면 오해받겠지만 어차피 사막에 들어가면 다른 사람이랑 마주칠 일도 없을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흐응~ 뭔가 곤란하신 일이 있으신 것 같군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
그 순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이사나 역시 매우 당황한 모습이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새카만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내가 익히 아는 존재이기도 했다.
“……뭐예요, 루카르엠. 분명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는 머리와 눈동자를 가리기 위함인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다. 그래 봤자 전신에서 풀풀 풍기는 마기가 그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었지만.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후드 자락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에이, 뭘 새삼스럽게 그러십니까.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가 뭔데요?”
“두 번이나 은밀한 시간을 보낸 사이?”
은밀한 시간은 무슨. 게다가 그 두 번 다 당신이 일방적으로 찾아온 거거든? 경박스러운 태도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더 진하게 웃었다. 날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어지간히도 즐거운 듯했다.
“엘, 아는 사람이야?”
옆에서 이사나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나랑 안면이 있는 사이로 보이면 경계를 푸는 편이었는데(트로웰이나 라피스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번만은 유독 긴장한 것이 느껴졌다. 본능적으로 그의 마기에 위협을 느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루카르엠이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발랄하게 말했다.
“이야, 그러고 보니 깨어 있을 때 뵙는 건 처음이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왈트 제국의 황제 폐하?”
“어, 어떻게 나를?”
“우후후, 다 아는 방법이 있지요.”
의도했음이 분명한 의미심장한 답변에 이사나는 더 안절부절못했다. 이미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숨겨봤자 소용없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아, 이사나. 그냥 지나가는 마족 1이야.”
“마, 마족?”
경악하는 이사나를 향해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삐죽 내민 루카르엠이 그렇게 소개하는 게 어딨냐느니 너무 심하다느니 투덜거렸지만, 그런 잡음 정도는 가볍게 무시했다.
“별로 신경 쓸 필요 없어. 물론 마족이니까 언제 손바닥을 뒤집듯이 말을 바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를 감시하거나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거든.”
“그, 그래?”
“응. 게다가 마왕의 지시에 따를 생각도 없대. 조만간 반역죄로 죽을지도 몰라. 한마디로 예비 사형수?”
“우와, 그렇게 나오시깁니까?”
얼떨떨해하는 이사나의 뒤에서 루카르엠이 황망하게 소리쳤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뭐가요? 난 틀린 말 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정말 너무하시네. 난처해 보이시기에 도와드리려고 했는데. 이러시면 저 그냥 돌아갈 겁니다?”
“뭘 어떻게 도와주려고요?”
시큰둥하게 물었더니 루카르엠은 씩 웃고는 단 한 번의 도약만으로 내 앞에 섰다.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신체 능력도 발군인 것 같았다. 그 바람에 이사나의 몸이 더 크게 경직됐지만, 그는 그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나만 똑바로 응시했다.
“보아하니 배낭이 작아서 고민하시는 것 같더군요. 제게 이 상황을 해결할 획기적인 방법이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렵니까?”
“그게 뭔데요?”
“가방 안에 아공간을 만드는 거죠. 그럼 물건이 몇 개가 들어가든 상관없거든요.”
아공간? 그거 어디에서 들어 본 단어인 것 같은데. 왠지 낯익은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잠시간, 나는 곧 과거의 단편적인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라피스가 서클렛을 건네줄 때, 아공간에서 꺼냈다고 했던 것을 말이다.
“자, 잠깐. 그걸 만든다고요? 그건 보이지 않는 개인 창고 같은 거 아니었어요? 드래곤만 가질 수 있는 건줄 알았는데.”
“아, 그건 자신이 직접 차원의 틈 속에 공간을 설계하는 경우입니다. 기본적으로 진법과 수식에 능통해야 하고, 다량의 마나가 받쳐줘야 하기 때문에 고위 마법사가 아니라면 시도하기 힘든 방법이죠. 인간종들 중에선 그만한 실력을 가진 마법사가 나타나기 쉽지 않으니, 드래곤만 가질 수 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럼 그것 말고 다른 방법도 있어요?”
내 질문에 루카르엠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진 그의 말에 의하면, 아공간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애초에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차원의 틈에서 파생된 불순물 같은 것들인데, 찌꺼기에 불과하긴 하지만 대부분 크고 작은 공간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의 좌표를 찾아 매개체에 연결한 후 마법적인 처리를 거치기만 하면 보관 장소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직접 만든 것에 비하면 규모가 협소한 데다 보안에 신경 써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훨씬 절차가 간단하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매우 큰 장점이 있었다.
“그 좌표를 찾을 수 있어요?”
“고위 마족쯤 되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찾았는데 다른 사람이랑 좌표가 겹치면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마법적인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그 공간과의 연결 통로는 하나로 제한되거든요. 다른 사람이 좌표를 연결할 방법은 전무하다고 봐야 합니다.”
“헤에…….”
아마 지금 내 눈은 엄청나게 반짝거리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찰나, 루카르엠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 기대감을 읽은 건지 그의 두 눈이 간드러지게 양옆으로 휘어졌다.
“아공간, 만들어 드릴까요?”
그가 물었을 때, 나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겸양이나 자존심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미 신뢰할 수 없는 존재란 생각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날 미묘하게 바라보던 루카르엠이 이내 피식 웃었다.
“확실히,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타입이네요.”
“……그거 욕이죠?”
“아뇨, 칭찬입니다. 전 귀여운 걸 좋아하거든요.”
역시 욕이잖아!
발끈해서 따지려는 순간 무언가 불쑥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그것이 조금 전까지 내 앞에 놓아 둔 배낭이라는 걸 깨닫는 덴 아주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이게 언제 저 마족의 손에 들어갔었지?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리자 루카르엠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다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