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5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50화(150/608)
제150화
내가 와줄 거라고 믿었다니, 나타난 건 네 쪽이잖아?
들려온 음성은 다정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뭐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상황에 당황한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마물들 또한 갑자기 나타난 이 정체 모를 동물의 모습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뭐야, 저건! 사술인가? 에잇, 신경 쓸 것 없다! 멈추지 말고 공격해라!”
지휘하던 남자가 빠르게 평정을 되찾고 소리쳤다. 그의 명령에 흩어졌던 마물들이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유니콘이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저것들은.』
그래 분명 ‘말했다.’ 말 주제에 어리둥절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던 유니콘은 노골적으로 마물을 훑다가 다시 내 쪽을 응시했다. 무언가 짐작한 듯 불쾌감을 드러낸 모습이었다.
『혹시 저 녀석들, 엘의 적이야? 지금 저들에게 공격받고 있었어?』
들려온 질문에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니콘의 입에서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런, 역시 그랬단 말이지. 감히 내 앞에서 엘을 노리다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군.』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엔 가벼운 노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서늘한 말투와는 다르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너무도 상냥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엘.』
똑바로 응시하는 푸른색 눈동자가 어디서 많이 본 것처럼 익숙했다. 홀린 듯이 응시하던 나는 곧 그것을 어디서 봤는지 떠올렸다. 내 이마를 장식하고 있는 서클렛의 보석, 라피스 라줄리와 똑같은 색이었다.
『내가 전부 없애줄게.』
귓가에 작은 속삭임이 울렸다. 부드럽게 휘어진 벽안이 홀릴 것처럼 묘한 빛을 발했다. 그 때문에 나는 한동안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사태를 파악한 건 잠시 후 벌어진 일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슈우우욱! 콰아아앙!
“……!”
유니콘의 금색 뿔에서 찬란한 빛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엄청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새빨간 불길이 순식간에 앞쪽에 있던 다수의 마물을 덮치자 뒤쪽의 대열이 요동쳤다.
“키이이익!”
기겁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하니 저 아름다운 유니콘에게 이런 공격적인 모습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불길에 휩싸인 마물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재가 되어 흩어졌다. 불씨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남은 자들이 딛고 있는 바닥까지 새빨갛게 녹이고 있었다. 마치 용암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도, 도망쳐! 모두 흩어져라!”
그제야 심상치 않은 상황을 깨달았는지 마물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미 때늦은 대처였다. 유니콘의 공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흥, 어딜.』
코웃음을 친 유니콘이 가볍게 발굽을 굴렀다. 그러자 우르릉, 강렬한 진동과 함께 바닥이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다시 불길이 솟구쳤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던 마물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집어삼켜졌다. 명령을 내렸던 그들의 지휘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땅속에 끌려 들어갔다. 무자비한 화염 속에 살아남은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남은 것은 약간 남은 불씨와 시커멓게 변한 바닥뿐이었다. 그 삭막한 공간의 한가운데, 새하얀 날개를 펼쳐든 유니콘의 고고한 모습이 있었다.
“말도 안 돼…….”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 똑바로 전방을 응시하던 유니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저절로 얼굴이 굳었다. 혹시 이번엔 이쪽을 공격하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를 건넸다.
『엘, 왜 그래? 어디 아파?』
“으응?”
『아까부터 너무 멍하게 있잖아. 오랜만에 만난 건데 전혀 반가워하지도 않고. 왜 그래? 설마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속사포로 쏟아지는 질문들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었지만, 이 상황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저, 저기, 잠시만요.”
『……?』
“지금…… 네가…… 아니,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고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유니콘은 황당하다는 표정(말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여기에 나 말고 누가 또 있는데?』
그야 이사나가 있기는 하지. 비록 의식이 없는 상태라는 게 유감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이놈의 세계가 기상천외한 곳이라지만 날개 달린 유니콘이 등장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게다가 말 주제에 사람의 언어를 쓸 수 있다니! 그럼 저것(?)도 지성체란 말이야?
하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운 건 저 정체 모를 존재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단 사실이었다. 더구나 십년지기 친구인 양 친근하게 대하는 태도도 이해되지 않았다. 내 표정이 이상하게 굳은 것을 느꼈는지 유니콘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러곤 걱정이 가득 담긴 어투로 또다시 물어왔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정말 어디가 안 좋은 거야?』
“저…… 죄송한데요, 절 아세요?”
『응? 그건 또 무슨 장난이야? 아, 알았다. 나한테 화난 거지? 그때 네가 한 말을 듣지 않고 가 버려서.』
“네?”
『그때의 일은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 딱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나 그동안 반성 많이 했어. 다신 이런 실수는 없을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린지…….”
『응? 이게 아니야? 그럼 아까 폭발의 충격을 너무 크게 받은 건가. 흐음, 그럴 수도 있겠네. 인간 종족은 육체가 많이 약하니까.』
“인간이라니. 혹시 저한테 하는 말이에요?”
『응. 엘, 너 인간 맞잖아?』
……오케이. 이제 확실히 알았다. 저 유니콘은 지금 날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있었던 거였다. 뭐야, 굉장히 단순한 문제였잖아? 휴우, 이상한 놈한테 걸린 건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생긋 웃었다. 그리고 덩달아 히죽거리는(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유니콘을 향해 지금 하고 있는 착각을 정중히 정정해 주기로 했다.
“저기,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응? 오해라니?』
“그쪽이 절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구요.”
『착각?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네가 엘이 아니란 말이야?』
“아, 일단 제 이름이 엘인 건 맞긴 한데요. 그건 애칭이고, 정식 이름은 엘퀴네스거든요.”
『응? 엘……퀴네스?』
“현 아크아돈의 물의 정령왕이죠. 정확히 말해,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예요.”
어차피 그에겐 알려 줘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 나는 당당하게 내 정체를 밝혔다. 그러자 갈기만큼이나 화사한 은빛의 속눈썹이 멀뚱히 깜빡거렸다.
『엘퀴네스? 네가 물의 정령왕이라고?』
“네, 맞아요.”
『하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엘.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가 엘퀴네스를 잘 따르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스스로를 정령왕이라고 하는 건…….』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기를 잠시간, 그가 돌연 뚫어져라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에 가벼운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어? 그러고 보니 너 머리색이 왜 그래?』
“머리색이요?”
『엘, 넌 금발이었잖아. 왜 갑자기 파란색이 된 거야? 그것도 엘퀴네스랑 똑같은 색이잖아. 심지어 눈동자 색도 그랑 똑같아졌어. 원래는 녹색이었는데……?』
당황한 듯 유니콘의 눈동자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나를 살폈다. 그 ‘엘’이라는 녀석이 금발에 녹안인가 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전 인간이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엘은 인간인데?』
“그러니까 그 엘이 제가 아니라고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그러자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유니콘의 표정이 갑자기 확 일그러졌다. 그러곤 척척 다가와 주둥이(?)를 내 목덜미에 파묻고 킁킁거리는 것이 아닌가!
“히익! 뭐하는……!”
『엘 맞아. 이 특유의 체향을 몰라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얼굴도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아. 너! 오랜만에 만났다고 나를 이렇게 놀리기야? 그동안 답답한 공간 안에 갇혀 있던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글쎄! 나는 당신을 모른다니까요!”
『거짓말!』
“거짓말 아니에요! 이렇게 눈에 띄는 말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잖아요! 한 번 봤다고 쉽게 잊히는 인상도 아니고!”
어디 잊히지 않다 뿐인가. 아마 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억울한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반박하자 유니콘이 냄새 맡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스산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나는 움찔 어깨를 굳혔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눈에 띄는 말?』
“헉! 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당신은 아무리 봐도 말이라고밖에…….”
『아하! 이 모습이라 몰라보는 거야?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렇게 간단한 것을…….』
“네? 그게 무슨…….”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던 나는 그 순간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그대로 몸이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유니콘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형체가 변하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잠시 후 내 앞에는 나보다 한 자는 더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전신을 덮은 푸르스름한 피부, 그보다 더 짙은 벽안. 양쪽으로 솟은 귀가 엘프의 그것처럼 길고 뾰족했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온 새하얀 은발이 때마침 불어오는 미풍에 따라 가볍게 흩날렸다.
“이제 나 알아보겠어? 나야, 나. 시벨리우스. 정말 오랜만이지?”
“…….”
‘저기…… 그러니까 누구시라고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순간이었다.
* * *
콰앙!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찬 좁은 방에 요란한 문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으로 들어선 것은 불혹은 되었음직한 중후한 외모의 여인이었다.
“스승님! 여기 계세요?”
여인의 음성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발랄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이제 막 소녀티를 벗은 처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스승…….”
빠르게 내부를 훑던 그녀의 시선이 이내 창틀 쪽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하고 잠시 흔들렸다. 타오를 듯 화려한 붉은색의 머리카락, 그 눈동자만큼이나 붉디붉은 눈동자. 마치 보석으로 빚은 것 같이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에 저절로 숨이 멈췄다.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외모였다.
한때는 저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며 빈정거린 적도 있었더랬다.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 이제 와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 지금은 절대 시도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남자는 그녀의 등장에도 일말의 반응 없이 책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왠지 야속해서 그녀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제 말 들리세요? 스승님!”
“……뭐야.”
집요한 부름에 그제야 남자가 고개를 들고 찌푸린 시선을 던졌다. 자신보다 훨씬 연배가 있어 보이는 여인을 향한 말투치고는 매우 불손했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배실배실 웃으며 한달음에 그 앞으로 달려 나갔다.
“답신이 왔어요!”
“답신?”
“폐하의 친위기사들 말이에요! 이곳으로 오겠대요! 방금 이카나 총수가 전해 주고 갔어요!”
“아, 그래?”
그거 잘됐네. 시큰둥한 답변에 중년의 여인은 맥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반응이 그것뿐이에요?”
“어차피 예상했던 거잖아. 당연한 일에 기뻐해야 해?”
“치이, 스승님은 너무 냉정해요.”
여인은 마음속 깊숙이 서운한 의미를 담아 뽀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줌마 주제에 귀여운 척하지 마. 하나도 안 어울려.”
“스승님이 이렇게 만드신 거잖아요!”
여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다. 물론 그런다고 눈 하나 깜짝할 그가 아니었다. 붉은 머리의 아름다운 남자―라피스는 더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본모습도 별로 안 예뻤어.”
그리고 그 말에 중년의 여인―그러나 본래는 이십 대 초반에 불과한 에이프릴은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기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항변을 시도했다.
“저 이래 봬도 공국 최고의 미녀라고 불렸거든요?”
“이 공국 사람들은 눈이 다 삐었나 보지.”
“사교계에서도 예쁘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정정. 이 제국에선 미인의 기준이 형편없이 낮은 모양이군.”
“너무하세요, 정말!”
“흥,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스스로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지. 정말 본인이 공국 최고의 미녀라고 생각해?”
“…….”
그의 말에 에이프릴은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클리프 상단의 총수 이카나만 해도 눈만 마주쳐도 남자를 홀린다고 할 정도로 빼어난 미인이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남자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아름답다는 게 어떤 건지 알려 주는 표본 그 자체 같았다. 그동안 티는 내지 않았지만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으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리 위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지만 본래보다 한참 나이 든 얼굴이나 거구로 변한 체형은 한창 꾸미기 좋아하고 감성이 풍성한 시기의 그녀에겐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처음 이 모습으로 변했을 땐 한동안 남몰래 울기도 했다.
“그러지 말고 제 모습 좀 바꿔 주시면 안 돼요? 이 모습은 너무 둔해서 움직이기 힘들단 말이에요. 게다가 곧 있으면 폐하의 기사들도 올 텐데 이런 모습으로 맞이하긴 싫어요.”
“귀찮아.”
“에이, 스승님. 그러지 말고요, 네?”
“귀여운 척하지 말랬지.”
“안 바꿔 주시면 계속 할 거예요!”
에이프릴은 다분히 의도적인 협박을 했다. 그리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은 아니었지만, 짧은 시간 내린 판단에 의하면 그녀의 아름다운 스승은 본인의 외모만큼이나 눈이 높은 데다 매우 탐미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기준에 차지 않는 것을 견디는 인내심도 매우 적었다. 예상대로 라피스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알았어. 체형은 돌려주지.”
“얼굴도요!”
“들키고 싶어?”
“마법을 풀어달란 소리가 아니에요. 그냥 제 또래의 다른 얼굴로 바꿔 주시면 되잖아요.”
“점점 요구가 당당해진다?”
“제자가 스승에게 이 정도 요청도 못 하나요?”
“네가 언제부터 내 제자였는데?”
“제가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죠.”
“하! 야, 너 내가 얌전히 도와주고 있다고 만만히 보나 본데……!”
그 순간, 벌떡 몸을 일으킨 라피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반격을 준비하던 에이프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갑자기 가슴 부근을 부여잡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스, 스승님?”
“큭! 쿨럭, 쿨럭!”
에이프릴은 경악한 얼굴로 뻣뻣하게 굳었다. 기침을 터트리는 라피스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꺄악!”
좁은 공간에 여인의 가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에이프릴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라피스에게 다가갔다. 꾸역꾸역 쏟아지는 피가 그의 손을 타고 카펫을 흥건히 적셨다.
“스, 스승님! 괜찮으세요? 스승님!”
“……됐으니까 저리 가.”
“하지만 피가……!”
“됐다니까. 별거 아냐.”
갑자기 피를 토하다니, 지병이라도 있었던 걸까?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 라피스의 모습에 에이프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바탕 피를 토해 낸 후에도 그는 여전히 편하지 않은 얼굴로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리하게 보였다.
“제기랄, 엘 이 녀석. 남의 마나를…….”
“네?”
에이프릴의 반문에 라피스는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피 묻은 입술을 아무렇게나 닦아 내며 말했다.
“나가.”
“하, 하지만 의원을…….”
“나가라고 했다.”
목소리의 어조가 더 낮아졌다. 서슬 푸른 시선에 움찔한 에이프릴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지금은 많이 흥분한 것 같으니 나중에 진정이 되면 다시 돌아와야 할 것 같았다. 떠밀리듯이 문 쪽으로 향한 후에도 그녀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계속 라피스 쪽을 힐끔거렸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라피스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런 것도 운명 공동체의 숙명이겠지.”
가볍게 내쉬는 한숨엔 희미하게 짜증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그가 오히려 즐거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기뻐 보인다니,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설마 고통을 즐기는 취향인 건 아니겠지?’
언젠가 그런 쪽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색이 된 에이프릴은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었다.
엘이 마물들에게 공격을 당하던 그 시각, 클모어에 있는 어느 외딴 집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