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65)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65화(165/608)
제165화
“엘, 미안하지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응? 무슨 부탁?”
“이번 일, 나 혼자 해결하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나와 시벨리우스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담긴 뜻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혼자서 몬스터를 잡겠다는 거야? 우린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달라는 거지?”
“응, 부탁해.”
“으음. 뭐, 딱히 상관은 없긴 한데…….”
이사나의 정령술은 이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그 정도라면 대형이든 상급 몬스터든 떼로 덤벼들지 않는 한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가 이 전투에 임하는 태도가 의외였다. 지금까지 파악하기로 이사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신분을 감춰야 하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타고난 성정 자체가 돋보이는 걸 즐기지 않는 것 같았다. 그건 전투 시에도 마찬가지라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닌 이상 본인이 주도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지금은 자신이 혼자 해결하고 싶다고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설마 너무 화가 나서 흥분한 상태인 건 아니겠지? 그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우려의 시선이 섞인 모양이다. 이사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설픈 영웅놀이에 심취한 건 아냐. 이건 그냥 내 각오의 문제야.”
“각오?”
“난 아버님을 구하지 못했어.”
“…….”
꺼질 듯이 희미하게 내뱉는 탄식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분노와 슬픔, 후회와 고통의 감정들이 그의 흐린 눈동자 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 순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걸 항상 후회했어. 계속 생각했었지. 그냥 무모하게 뛰어들어서라도 저 처형대를 부숴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끝까지 바라보기만 했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응, 그치만 그때 내게 지금과 같은 힘이 있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해.”
“…….”
“그러니까 이번엔 구하고 싶어. 내 손으로 직접. 그래야 할 것 같아.”
살짝 감았다 뜬 눈동자는 다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단단한 결의를 다진 얼굴이었다. 어차피 반대할 생각도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뭐라고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좋아. 그렇다면 우린 방해하지 않을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미안해.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하긴. 네가 좋다면 난 상관없어. 잊은 거야? 이 여행은 너를 위한 거잖아.”
빙긋 웃으며 대꾸하자 이사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굳어 있던 입가엔 곧 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본 다음 시벨리우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벨, 그렇게 됐으니 양해 부탁해.”
“흐음, 할 수 없지. 소녀를 돕는 영광은 동료에게 양보하는 수밖에.”
아쉬워하는 말투와는 다르게 그는 벌써부터 팔짱을 낀 채 관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이사나에게 가볍게 윙크하며 말했다.
“가서 멋지게 과거를 이겨 봐. 그래도 위험하다 싶으면 끼어들 거다?”
“네! 고맙습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활기차다. 이젠 완전히 평소의 상태를 되찾은 것 같았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시벨리우스가 이사나의 머리를 끌어안고 마구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유난히 호흡이 잘 맞는다 싶더니 지금은 친형제처럼 예뻐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응?’
문득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깜빡이는 작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시선의 주인은 바로 알리사였다. 후드를 쓰고 있는데도 용케 우리를 알아본 듯 그녀의 표정이 묘했다. 안도한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신에 찬 표정이랄까. 아무튼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우르릉.
“……!”
반응을 더 살필 수 없었던 건 갑자기 느껴진 진동 때문이었다. 희미하지만 뭔가가 두드리는 감각이 발밑에서 조금씩 시작되고 있었다. 그것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닌 듯 술렁거리던 사람들 사이에 일순 정적이 내려앉았다.
“……온다.”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고함이라도 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여기저기서 목울대를 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쉽게 눈에 띄었다. 지휘관의 표정 역시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준비! 출전한다!”
어느새 언저리로 내려간 해가 절벽 틈으로 짙은 붉은 빛을 뿌렸다. 드디어 결전의 때였다.
* * *
발밑의 진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동굴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파리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개중에선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토악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 정지!”
협곡 안쪽에 이르렀을 때 지휘관의 호령이 울려 퍼졌다. 아직 동굴 앞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이동을 멈춘 것이라 토벌대는 의아해하면서도 더욱 긴장한 모습이었다. 모두가 멈춘 것을 확인한 뒤 지휘관은 자신의 옆에 있던 알리사에게 시선을 내렸다.
“시작해라.”
그 말의 의미는 따로 파악할 필요가 없었다. 알리사가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한 팔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대지의 기운이 순식간에 모여드는 걸 보아 정령을 소환하려는 것 같았다.
“나와 줘, 멀든.”
예상대로 그녀의 부름을 받은 땅이 크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른 흙바닥이 부글거리는 것처럼 우둘투둘 일어나더니, 그 속에서 굵은 나뭇가지가 뻗어 나왔다. 쿠궁! 우두두둑! 요란한 굉음과 함께 빠르게 솟아나는 줄기 사이로 마른 흙과 돌조각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그 자체로 무척이나 웅장한 광경이었다.
이윽고 모두의 눈앞에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가 자리잡았다. 평범한 나무와 다른 점은 정령 특유의 투명한 질감이 있다는 것, 그리고 뿌리가 대다수 지면 밖으로 튀어나온 채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뿌옇던 흙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쯤 아무것도 없던 기둥에서 두 개의 검은 구멍이 번뜩였다. 멀든이 감고 있던 눈을 뜬 것이다. 사람과는 다른 눈동자가 새하얀 빛을 내뿜자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든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괴물.”
굳이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더라도, 그들의 눈에 서린 공포와 혐오감이 멀든을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 지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나로서는 황당하다 못해 답답한 광경이었다. 그건 시벨리우스도 마찬가지였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빈정거렸다.
“바보들 아냐? 저렇게 정순한 기운을 가진 괴물이 세상에 어딨다고.”
“……그걸 느낄 수 있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겠죠.”
대답하는 이사나의 어조에서도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잠시 후 옆에 있는 병사 하나가 횃불을 붙여 지휘관에게 전달했다. 굳은 얼굴로 받아 든 지휘관이 그것을 알리사에게 건네는 모습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당황스러운 일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지휘관이 무언의 시선을 보내자 알리사가 혼자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 오기 전 사전에 그들끼리 따로 협의한 계획이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저 먼저 출발한 것이려니 싶어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관전했다. ……이어진 지휘관의 지시를 듣기 전까진.
“모두 선두와 간격을 유지하며 따른다!”
“……!”
처음엔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 기대(?)를 깨부수기라도 하듯, 앞 열에 있던 병사들이 성큼 뒤쪽으로 걸음을 물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선두였던, 아니 선두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는 중에도 알리사는 계속 앞서나가고 있었기에 토벌대와의 거리는 더 벌어졌다. 알리사의 뒤를 따르는 건 그녀가 불러낸 정령 멀든밖에 없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 상황에서 명시된 ‘선두’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다 큰 어른들이 작은 여자아이 하나를 방패삼아 뒤에 숨겠다는 소리다.
“최소한의 도의도 없는 것들이군.”
시벨리우스의 새파란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서렸다. 나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노골적으로 벼랑에 떠밀 줄이야. 적어도 함께 싸우는 시늉만큼은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한 오판이었다. 그때 옆쪽에서 크게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사나가 행렬을 벗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무심코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그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했던 말을 상기하고 다시 내렸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이사나를 믿고 지켜보는 것이었다.
“거기 멈춰라. 지금 뭐하는 거지?”
갑자기 생긴 이탈자에 당황했는지 지휘관이 굳은 얼굴로 이사나를 주시했다. 다른 병사들도 전부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몰린 가운데, 이사나는 차분하게 멈춰 서서 주위를 훑었다. 후드에 가려져 음침해진 인상 탓인지, 아니면 그들 내면에 자리 잡은 마지막 양심 때문인지,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이사나는 그들을 한번 쭉 돌아본 다음 담담히 말했다.
“저도 ‘선두’에 서고 싶습니다.”
“뭐, 뭣? 진심인가?”
“저렇게 작은 소녀도 혼자 맡는 자리인데 저라고 못 설 건 없을 것 같군요.”
정상인이라면 그 말에 서린 비난의 기색을 읽지 못할 리가 없었다. 지휘관은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뭔가 오해한 모양이군. 저 아이가 괴물을 소환하는 걸 보지 않았나? 저 아이는 평범한 여자아이가 아니다. 우리보다 더 강한 힘을 지녔지. 강하기 때문에 의당 그 힘에 맞는 역할이 주어진 것뿐이다.”
“강하다고 안전한 건 아닙니다. 하물며 저 소녀는 훈련받은 군인도 아닌 것 같군요. 애초에 지휘관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분에게 말해 봤자 소용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
“―큭, 그래서 정말로 가겠다는 건가?”
“혼자보다는 둘인 편이 더 낫겠죠.”
“좋아, 나중에 후회하지나 말도록.”
지휘관이 삐딱한 얼굴로 웃으며 턱짓을 했다. 선두 쪽으로 나가라는 허가였다. 어차피 젊은 혈기에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호기를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을게 뻔했다. 그건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걸어 나가는 이사나의 뒷모습을 향해 동정의 시선이 쏟아졌다.
“아, 그러고 보니 괴물이라는 것 말인데.”
“……?”
지휘관의 옆을 스칠 때, 이사나가 문득 잊은 것을 떠올린 듯이 운을 떼었다. 지휘관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긴장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을 마주한 이사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다른 지역에서 비웃음을 사기 전에 정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저들을 부르는 호칭은 따로 있으니까요.”
“뭐, 뭣? 저들? 따로 있다니?”
“혹시 정령이라는 존재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 질문에 지휘관이 잠시 멈칫하더니 곧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정령! 물론 아주 잘 알지! 설마 저 괴물을 정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정령이 맞습니다.”
“이거야 뭘 모르는 사람이군. 정령은 저렇게 생김새가 흉하지 않아. 아주 아름답게 생긴 걸로 유명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실제로 정령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나 보군요.”
“뭐? 그, 그야…….”
“미(美)의 주관은 사람마다 전부 다릅니다. 내 눈엔 저 나무의 모습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정령에 관한 건 당신보다 내가 더 잘 알 겁니다.”
“그게 무슨…….”
지휘관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그 순간 이사나의 손에서 푸른 물줄기가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다. 슈우욱 촤아악! 마치 뱀처럼 이사나의 팔을 타고 올라간 물줄기가 순식간에 공중에서 폭포수처럼 터져 나가더니 이내 늑대의 형태로 변했다. 시큐엘이 소환된 것이다.
그제야 지휘관에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완전히 가셨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눈을 부릅뜬 채 굳어 있는 그를 향해 이사나가 서늘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정령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함부로 아는 척하지 마.”
“…….”
“…….”
부산하던 소리가 잦아들고 정적이 내려앉았다. 사람들은 우아하게 바닥에 착지하는 물의 늑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눈치가 있다면 이 상황에서 등장한 늑대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시큐엘은 화려한 외형 탓에 누가 봐도 정령으로 보였다.
한동안 멈춰 선 채 지휘관을 노려보던 이사나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제야 멈춘 것처럼 경직되어 있던 공기가 빠르게 풀어졌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저, 정령이다. 저 사람 정령사인가 봐.”
“세상에, 나 정령사 처음 봐.”
“근데 아까 저 사람이 나무 괴물더러 정령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 그럼 저게 정말 정령이라는 거야?”
술렁임이 퍼져 나갈수록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새파래졌다. 그들이 괴물이라고 부르던 멀든이 정령이라는 시점에서 내려지는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알리사 아가씨가…… 정령사라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알리사 본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리가 떨어져 있는 상태긴 했지만 그녀 역시 뒤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한 듯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이사나가 가까이 다가서자 그녀는 살짝 숨을 삼킨 뒤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 어제 만났던 그 사람 맞지? 팔론의 대장간 앞에 있었던.”
“다시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정중한 인사에 알리사는 잠시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맞췄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옆에 얌전히 서 있는 시큐엘을 향하자 더욱 복잡해졌다.
“이 늑대…… 멀든이랑 비슷한 느낌이 나.”
“그럴 겁니다.”
“얘가 정령이야? 당신은 정령사고?”
“예.”
“그럼 나도 정령사야?”
이사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이미 그녀는 스스로 답을 깨우친 것 같았다. 아마 오랫동안 찾았던 답일 것이다. 갈림길에서 길을 찾은 사람처럼, 그녀의 얼굴색이 한층 밝아진 것이 느껴졌다. 커다란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것처럼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