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18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183화(183/608)
제183화
“고, 공. 오셨습니까.”
검은색 정복 위, 붉은 망토를 길게 늘어트린 남자가 문 앞으로 다가오자 시종장은 몹시 긴장했다. 파이런 드 카리브디스. 얼굴을 마주한 세월만도 벌써 햇수로 몇 년이나 되건만, 매번 마주할 때마다 도무지 친근함을 느낄 수 없는 사내였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영웅이었고, 기사나 병사들 중에서도 그를 흠모하는 자가 많았으나 황궁의 시종들은 대다수 그를 꺼려했다. 평범한 일반인은 그에게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카리브디스는 그런 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경계하는 시종장의 태도를 무심히 흘리며 물었다.
“전하께선 안에 계신가?”
“저, 그게…….”
“가장 효율이 좋았던 노선을 통째로 날려먹다니! 대체 무슨 일을 이따위로 하는 거야!”
와장창!
그 순간 문 안에서 터져 나온 고함에 카리브디스는 문고리를 잡기 위해 뻗던 손을 멈췄다. 시종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와 있나?”
“마신전의 신관들께서 알현 중이십니다.”
“……그렇군. 나중에 다시 오겠다.”
섭정을 하고 있지만 마신전 내에서 대공이 지니고 있는 신관장의 직분은 여전히 유효한 상태였다. 때문에 마신전 쪽에서 주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는데, 그런 날엔 대공은 다른 사람들의 알현을 일제히 거절하곤 했다. 게다가 오늘은 기분이 몹시 나쁜 모양이니 용무가 쉽게 끝나지도 않을 것 같았다.
대공으로부터 반 강제적으로 받은 휴가가 어느새 몇 달을 채우고 있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반납할 예정이었던 카리브디스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돌리려 할 때였다.
“카리브디스 공, 여기서 보는군.”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그는 행동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화려한 코트를 입은 채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노인이 서 있었다. 완고해 보이는 얼굴을 한 그는 세월이 느껴지지 않는 매우 날렵한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카리브디스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고 목례했다.
“웨칸 공작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웨칸 공작은 건국 공신 가문의 가주이자 한때 북토의 야만족을 정벌한 공훈을 세운 장군으로, 대공이 황자이던 시절부터 그를 꾸준히 지지해 온 사람이었다. 선황이 제위에 오르던 당시 대공이 도망치듯 신전으로 숨었을 때에도 그만은 끝까지 남아 그를 후원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대공을 만들어준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그랬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군.”
웨칸 공작은 여전히 소음을 토해내고 있는 문 쪽을 가리키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주군의 체면에 관계된 일인 만큼 이런 상황에선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카리브디스는 그저 묵묵히 침묵할 뿐이었다.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며 웨칸 공작은 허탈하게 웃었다.
“자네 활약은 잘 듣고 있네. 그래, 드래곤을 잡았다고?”
“소문이 이상하게 와전되었나 봅니다. 실제론 짧게 마주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드래곤 본신과 마주치고도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 자넨 이제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려는 모양이군.”
“과찬이십니다.”
과묵한 대답에 웨칸 공작은 눈으로만 슬쩍 카리브디스의 모습을 훑었다.
“휴가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황궁엔 웬일인가?”
“전하의 곁을 너무 오래 비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서 왔습니다.”
“자네도 참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군. 다른 자들 같으면 모처럼 쉴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긴 텐데 말이야. 하지만 안쪽의 상황이 저래서야 자네의 휴가도 길어지겠어.”
“…….”
이번엔 카리브디스도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웨칸 공작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면 이 늙은이한테 내줄 것도 있겠군.”
“제게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별 거 아니네. 그저 전하께 바람맞은 사람들끼리 위로주나 한 잔 나누자는 거지.”
가벼운 말투였으나 웨칸 공작은 의미 없이 자리를 권할 사람이 아니었다. 카리브디스는 잠시 침묵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다그닥 다그닥
경쾌하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는 다르게 마차에 앉아 있는 카리브디스의 표정은 어두웠다. 조금 전 모든 용건을 마치고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의 머릿속엔 웨칸 공작과 나눈 대화가 맴돌고 있었다.
“자넨 최근 대공 전하의 행보를 어떻게 생각하나?”
위로주라는 말이 농담은 아니었는지 웨칸 공작은 그를 고급 술집으로 데려갔다. 고급 술집이라 해도 여느 술집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사방이 밀폐되어 있고, 따로 들이는 사람이 없이 단둘만 마주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범한 술집과는 주 용도가 구분됐다. 카리브디스는 그가 건넨 잔을 정중히 받아 마신 다음 묵묵히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깊은 뜻은 없네. 그저 가장 가까이에서 전하를 모시는 사람의 소견을 궁금해 하는 거라고 생각해 주게.”
“전 전하를 지키는 검일 뿐입니다.”
고집스럽다시피 단조로운 대답에 웨칸 공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 검은 말도 못하고 의지도 갖지 못하나 보군. 그래서 그저 주인이 휘두르는 대로만 쓰이겠다는 겐가?”
“…….”
“정말 그런 생각으로만 전하를 모시고 있었다면 조금 실망스럽군. 주인의 오른팔이라는 자가 일개 병졸들이나 품을 생각을 지니고 있다니 말이네. 자네가 지키고 싶은 건 전하의 살아 있는 몸뿐인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충신이라면 쓴 말도 뱉을 줄 알아야 한다는 소리네.”
끌끌 혀를 찬 뒤 웨칸 공작은 품 안에서 종이 더미를 꺼내 그에게 던지다시피 내밀었다. 무심코 내용을 읽어 내리던 카리브디스의 얼굴이 굳었다.
“이건…….”
“오늘 전하께 묻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네.”
종이에 적힌 건 최근 마신전의 동향과 국경 부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의문의 이동에 관한 것이었다. 알폰프 제국에서 출발한 모종의 수레마차가 스왈트 제국에 있는 마신전 본단으로 몇 년간 꾸준히 반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안에 실린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네. 그런데 근처를 기웃거리던 병사 하나가 그 안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더군.”
“……!”
순간 감정을 내보인 카리브디스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웨칸 공작은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그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오늘 새벽에 들어온 첩보네. 얼마 전 알폰프 제국의 상징과 같은 라무스 학술원에서 다수의 아이들이 납치되었다가 풀려났다더군. 이 납치에 마신교가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네.”
“…….”
“납치되었던 아이들은 모두 10대 초반이었지.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곧 어디론가 이동될 예정이었다고 하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요즘 우리 제국의 백성들 사이에선 대공 전하가 어린 아이들을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중이지.”
뒷말을 잇지 않아도 결론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카리브디스는 동요를 감추려고 노력하며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집무실 안에서 대공이 내지르던 고함소리가 새삼 다시 떠올랐다.
대공이 마신관들에게 화를 내는 건 몹시 드문 일이었다. 물론 성자가 아닌 이상에야 가끔은 분노할 때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납치사건에 마신전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은 만큼, 그 부분에 관한 질책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단순한 희망사항이라는 것은 카리브디스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대공은 그저 어떤 일의 실패에 관해서 분노하고 있었을 뿐이다.
웨칸 공작은 침묵하고 있는 카리브디스를 예리하게 훑으며 말했다.
“최근 전하께서 병력을 무리하게 모으고 있다는 건 알고 있나? 전국 각지에서 젊은이란 젊은이는 전부 군대로 차출하고 있다더군. 얼마 전엔 귀족의 사병까지 내놓으라고 하셔서 다들 말들이 많아. 명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효시까지 하신다고 하네.”
“……몰랐습니다.”
“그렇겠지. 최근엔 세트니오 백작에게 전부 맡기고 계신 모양이니까. 덕분에 황궁에서 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네. 자넨 이것도 몰랐겠지만.”
“…….”
딱히 빈정거리는 어조는 아니었다. 오히려 순수하게 정보를 알려주려는 목적 같기도 했다. 웨칸 공작은 잔에 든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 어느 때에도 날카로운 빛을 잃지 않았던 얼굴이 지금만큼은 먹은 세월만큼이나 초췌하게 보였다.
“전하는 너무 많이 변하셨어. 황자 시절에는 매우 총명하고 다정하신 분이었네. 난 그분이 선황 폐하보다 더 제왕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신 것만 같아. 그때 내가 보았던 전하는 이제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군.”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뜻밖인가? 하긴, 나도 자네와 이런 대화를 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하지만 지금의 자네라면 말해도 괜찮을 것 같더군.”
“그게 무슨…….”
“전하가 자네를 찾지 않으신 지 얼마나 되었지? 휴가라는 둥, 뻔히 보이는 핑계는 댈 생각하지 말게.”
움켜쥔 주먹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마도 정곡을 찔린 탓일 것이다. 웨칸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넨 그 멍청한 세트니오 백작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이지. 주군과 대의를 위한 일이라면 진창도 뒤집어 쓸 각오가 되어 있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아. 게다가 그렇게 보이지 않아도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지. 난 전하가 자네의 그런 점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하셨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내 판단이 틀리진 않은 것 같군.”
“…….”
“슬슬 정신 차리게, 카리브디스 공작. 전하의 과한 손속에 불만을 품는 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 이대로 두면 모든 자들이 전하를 등지게 될 걸세. 자네가 이쯤에서 멈추시게 해야 하네.”
“오해……하시는 겁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겁니다.”
꺼질 듯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웨칸 공작은 피식 웃었다.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자네가 지키고 싶은 건 전하의 살아 있는 몸뿐인가?>
추궁하듯 가시 박힌 목소리가 다시금 가슴을 찔렀다. 카리브디스는 한계까지 고개를 뒤로 넘긴 채, 두 눈을 감고 긴 숨을 내뱉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어떤 생각부터 이어 나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느려지더니 곧 이동이 멈췄다. 바깥에서부터 술렁거리는 소리들이 밀려들어 왔다. 아직 도착할 시간이 아니었기에 카리브디스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마부를 확인했다.
“무슨 일이지?”
“아이고, 죄송합니다, 주인님. 앞서 가던 마차에서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고?”
찌푸린 얼굴로 앞쪽을 응시한 카리브디스의 눈에 마차 한 대가 서 있는 것이 들어왔다. 사람들이 그 주위를 잔뜩 에워싸고 있어 지나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구경꾼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이래?”
“저 마차가 골목을 건너던 여인을 친 모양이에요.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나 봐요.”
“아이도 있는 것 같던데 정말 안됐군.”
수군거리는 소리는 혼자 살아남은 아이에 대한 동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앞쪽으로 시선을 준 카리브디스는 이내 관심을 거두고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부에게 이제 그만 출발하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가슴 속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독특한 감각. 마치 바람의 검 블래스터를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주인님, 그만 출발할까요?”
“……아니, 잠시만.”
기운은 바깥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카리브디스는 마차에서 내려 기운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기분 같았다.
붉은 망토를 늘어트린 그가 다가가자 몰려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내주었다. 곧 그의 앞에 주저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이 드러났다. 서럽게 울고 있는 아이는 아무래도 조금 전 마차에 치었다는 여인의 자식인 모양이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어미의 상처를 보듬으려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지만, 정작 카리브디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 앞에 성큼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자의 모습에 놀랐는지 아이가 울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리브디스는 그 반응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이의 품에 손을 뻗었다. 찰그랑, 금속의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아이의 목에 있던 목걸이가 그의 손에 걸려나왔다.
황금색으로 된 동그란 메달엔 익숙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단숨에 황실의 문양임을 알아본 카리브디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걸 소유할 수 있는 건 황가의 직계 혈족뿐이었다.
“황제로군.”
조금 전부터 느끼고 있는 기묘한 기운은 바로 목걸이 안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단숨에 눈빛이 차가워진 그가 목걸이를 강제로 아이에게서 떼어내려고 할 때였다.
“……!”
돌연 따끔한 감각이 들더니 카리브디스의 손에서 피가 주룩 쏟아졌다.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목걸이 앞에서 손바닥만 한 작은 형체가 부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솜사탕처럼 풍성한 푸른색 머리카락이나 깜찍하게 생긴 얼굴만 봐서는 요정처럼 보였는데, 하반신이 물고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카리브디스는 그 모습이 말로만 듣던 인어 같다고 생각했다.
“……정령이다!”
어디선가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을 듣고서야 카리브디스는 자신을 홀린 친숙한 감각을 이해했다. 블래스터에게서 풍기는 독특한 그 느낌이 아마도 정령의 기운이었던 모양이다. 어째서 황실의 목걸이에 정령이 깃들어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작은 정령은 아이의 앞을 막아선 채, 목걸이를 쥔 손을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아이를 지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지간한 장정도 뛰어넘을 만큼 강한 힘이었지만, 상대가 매우 나빴다. 작은 정령 하나의 악력으로는 일당 천의 역할을 하는 소드 마스터, 더불어 바람의 검을 지니기까지 한 그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게다가 정령이 힘을 쓸 때마다 아이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져 가고 있었다. 결국 정령은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