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209)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209화(209/608)
제209화
“이런 점은 여전히 무르구나.”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비난을 하는 어조도 아니었는데 책망을 받는 기분이라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자, 받아.”
시무룩해져 있는 내게 카노스가 뭔가를 건넸다. 얼결에 받고 보니 팔뚝만 한 길이의 대거였다. 손에 닿는 순간 따갑게 일어나는 감각에 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검신 전체에 텁텁하고 짙은 죽음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
“그거면 저주는 간단히 풀릴 거야.”
입을 뻐끔거리며 카노스를 올려다보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상이 맞았다. 마검이었던 거다. 그것도 자아도 없고 영혼도 들어 있지 않은 그냥 평범한(?) 마검.
내가 지금 눈을 뜬 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설마 카노스가 직접 마검을 내어줄 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어안이 다 벙벙했다.
“왜…….”
“지금까지 장난친 것에 대한 사죄 대신이야. 내가 이래 봬도 양심은 있거든. 감동했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죠?”
아마도 루카르엠이 계약서를 들이밀었을 때부터. 그는 이럴 계획으로 날 여기까지 이끌어 왔을 것이다. 부정할 생각은 없는지 카노스는 씩 웃고는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나 참,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이렇게 보니까 나랑 인연을 맺은 것도 영 나쁜 것만은 아니지?”
“하, 하하……그렇네요.”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절을 해도 모자를 정도다. 병 주고 약 준 기분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결과가 좋으니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물론 심신의 안녕과 건강을 위해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고마워요, 카노스! 덕분에 살았어요.”
진심을 담아 건넨 인사에 카노스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피식 웃었다. 나는 마검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벅찬 마음으로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 역시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드디어 길고 긴 여정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 그렇지. 이것도 받아.”
그때 불쑥 떠올랐다는 듯 카노스가 뭔가를 던졌다. 빠르게 날아오는 물체는 동그란 형태에 황금색 표면을 띠고 있었다. 왠지 어디선가 많이 봤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나는 경악했다. 방금 전까지 제단에 놓여 있던 마족의 알이었던 것이다.
“으악!”
들고 있던 마검을 던지다시피 이사나에게 넘긴 후, 나는 다급히 달려가 두 팔을 뻗었다. 간발의 차로 받아낸 알은 보기보다 꽤 묵직했다. 단단한 표면 안에선 출렁거리는 감각과 더불어 충만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직 알인 상태임에도 마치 살아 숨 쉬는 아기를 안은 느낌이었다. 놓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끼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알을 이렇게 막 다루시면 어떡해요! 깨지면 어쩌려고!”
“하하, 놀랐어? 괜찮아, 괜찮아. 마족의 알은 부화를 앞둔 시점에선 오리하르콘 만큼이나 단단해지거든.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아.”
“그래도……!”
“정말이야. 높은 탑에 올라가서 떨어트려도 멀쩡할걸? 그치, 데르온?”
“아, 예! 그렇습니다!”
이제 적응이 될 만도 하련만 데르온은 여전히 카노스 앞에서 긴장을 풀지 못했다. 그가 군기가 바짝 들어간 얼굴로 대답하자 카노스가 그것 보라는 표정을 지었다.
“들었지? 그러니까 너도 그냥 편하게 다뤄도 돼. 만약 금이 간다면 부화한다는 뜻이니까 그때부터 신경 써 주면 될 거야.”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언제인데요?”
“글쎄, 아마 한 달 정도 걸리려나?”
“윽, 생각보다 빠르네요. 마족의 아기는 뭘 먹어요? 인간처럼 우유를 먹여야 하나요?”
“아니, 그냥 평범한 음식이면 돼. 생고기면 더욱 좋고. 마족은 날음식을 더 선호하거든.”
“신생아한테 생고기를 먹이라고요?”
“금방 자란다고 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인간 아기랑은 상당히 다를 거야. 뭐, 그리고 어차피 이런 건 데르온이 알아서 할 테니 넌 신경 쓸 것 없어. 자질구레한 잡일은 전부 그에게 맡겨두고 넌 그냥 아이의 대부 역할만 해줘.”
“그건 미안하잖아요.”
“뭐가 미안해? 그러라고 붙여준 일꾼인데.”
“…….”
그래도 명색이 마계에서 단 4명밖에 없다는 공작인데 아무렇지 않게 허드렛일 하는 사람 취급이다. 데르온은 왠지 아련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그의 고초가 눈앞에 선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저건 어쩔 생각이야?”
지켜보는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리든 말든 카노스는 아무렇지 않게 제 할 만만 이어 나갔다. 그가 가리킨 것이 제단에 있는 검―에고 소드라서 나는 조금 고심했다. 어차피 마검을 얻은 걸로 목표는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에 관해선 딱히 생각해 둔 게 없었다.
<뭐죠? 날 죽일 계획을 짜는 건가요? 말해두는데! 날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난 이래 봬도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라고요! 게다가 날 죽이면 이프리트 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걸요?>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검이 분기에 차서 소리쳤다. 나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중얼거렸다.
“으음, 글쎄요. 그냥 놔두고 가도 되지 않을까요.”
“에고 소드는 꽤 귀한 물건인데. 심지어 정령검과 마검의 성질을 다 지니고 있는 건 전 차원에서 저 녀석이 유일해. 내다 팔기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일걸? 아깝지 않겠어?”
“이프리트가 소중히 여기는 아이인걸요. 함부로 취급할 순 없죠. 그의 뜻을 존중해서라도 그냥 두고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좀 시끄럽기도 하고. 그치, 이사나?”
“응.”
질문을 받기 무섭게 이사나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보다 반응이 빠른 걸 보니 쉼 없이 쏟아지는 목소리에 질린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인다고 하면 내가 겁먹을 줄 아는가 본데! 나 이래 봬도 수백 년간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영웅이라고요! 죽음 따위는 익숙한 존재란 말이에요!>
“확실히 시끄럽긴 하네.”
“쟤 숨은 쉬면서 말하는 거야? 귀 아파 죽겠어.”
“이 정도면 정신계 고문 마법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입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들으면 놀랄걸요? 난 말이죠! 평범한 사람을 세상의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검이라고요! 다들 날 손에 넣으려고 얼마나 동분서주하는 줄 알아요? 백만 대 일! 아니 천만 대 일! 이게 바로 날 차지하려는 사람들의 경쟁률이에요! 내 가치가 그 정도란 말이에요!>
“다들 엘의 생각에 동의하는 거야?”
“네, 정신건강에 별로 좋지 않을 것 같아요.”
“난 쟤 싫어.”
“저도…….”
<왜 다들 아무런 말이 없죠? 내 명성에 겁을 먹은 건가요? 훗, 그래요, 그럴 줄 알았어요!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대단하거든요! 우리 이프리트 님의 유일한 자랑이자 긍지이니까요! 아하하하하하!>
“그럼 그냥 두고 가자.”
상큼하게 웃은 카노스가 결론을 내렸을 때였다.
<자, 잠깐만요!>
돌아서는 우리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원히 자기 세계에 빠져 있을 것 같았던 에고 소드가 처음으로 내보인 정상적인 반응이라 우리는 자연히 그를 응시했다.
<지, 진짜 나를 그냥 두고 가는 거예요? 이렇게 훌륭한 정령검인데도요?>
에고 소드는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자화자찬에 가깝던 말들이 사실은 우리에게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그 나름의 노력이었나 보다.
솔직하지 못한 성격은 이프리트와 닮았다. 인간으로 태어나긴 했어도 본성이 불의 정령인 건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내린 결정이 달라지진 않았다. 나와 일행들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다가 말했다.
“미안해. 우리는 딱히 정령검이 필요하지 않거든.”
<내가 그렇게 부족해 보이나요?>
“아냐, 네가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정말 필요하지 않아서 그래. 애초에 이곳엔 온 건 저주를 풀기 위한 마검을 얻기 위해서라, 영웅이 되는 검에는 관심이 없어.”
<그렇군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거군요.>
분명한 생각을 전하자 에고 소드는 담담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위풍당당한 기세는 어디 갔는지 한층 위축된 기색이었다.
<아쉽네요. 이번에야말로 이 갑갑한 공간을 떠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면 괜찮았을 텐데 이어진 말이 내 발을 잡아끌었다. 시끄럽기만 할 때는 단호하게 무시할 수 있었건만, 마치 버림받은 아이처럼 풀죽은 모습을 보니 외면하는 게 쉽지 않았다. 에고 소드 역시 내가 갈등하는 것을 알았는지 한층 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요. 당분간만이라도 안 될까요? 내가…… 아니, 제가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 갇혀 있었거든요.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보고 싶어서 그래요. 저 이래 봬도 굉장히 편한 동행이에요! 식량도 축내지 않고 옷도 필요하지 않고 숙소가 따로 필요한 것도 아니거든요.>
“그거야 넌 검이니까…….”
<그쵸! 바로 그거예요! 제가 검이라서 이렇게나 장점이 많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떻게든 안 될까요? 진짜 얌전히 지낼게요, 네?>
……이 정도면 비굴한 수준이 아닐까.
일행들을 돌아보니 다들 떨떠름한 표정인 게 별로 내키지 않아 보였다. 특히 알리사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곤 해도 수다쟁이 검을 들고 다니는 일은 부담이 되는 모양이었다. 나 역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정말 미안한데…….”
<아참, 그거 아세요? 전 불의 정령이라 화기가 강해요. 이게 뭐가 좋으냐면요. 제 주인이 되면 길운이 많이 생겨요. 피부가 환해져서 외모도 좋아지고, 병에도 잘 걸리지 않고요.>
어, 이건 좀 끌리는데.
거절하려던 입이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고 보니 불의 정령은 인간들에게는 장수와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질 만큼 일상을 윤택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진짜 정령검은 아니라고 해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으니까 비슷한 효과는 줄 것이다. 물론 우리 일행들은 다들 평범한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인 만큼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아니긴 하지만…….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운도 굴러 들어와요!>
“데려가자.”
“…….”
단숨에 뒤바꾼 결정에 일행들이 황당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카노스는 벽을 치고 웃느라 바빴지만). 나도 민망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고로 운이란 있을 때 잡아야 하는 것이다! 길운이 들어오는 데다가 부자까지 된다는데 그냥 놔두고 가는 건 손해 보는 짓이 아니겠는가!
<정말이요? 정말 절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래, 데리고 나가 줄게.”
<와아아! 다시 말 바꾸시면 안돼요?>
에고 소드의 목소리가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모습에 일행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가 이프리트 계열 아니랄까 봐, 에고 소드는 끝까지 만만치 않았다.
<그럼 일단 용사의 의식을 치러주세요!>
“……그게 뭐야?”
<뭐긴요. 제 주인이 되는 의식이죠. 전 용사의 검이니까요! 의당 용사의 검을 소유하는 일엔 그만한 엄숙한 행사가 필요한 것 아니겠어요? 무, 물론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형식적인 거예요.>
구겨지는 분위기를 느꼈는지 에고 소드가 급히 변명하듯이 덧붙였다. 어차피 데려가기로 한 거 적당히 기분을 맞춰주자 싶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헤헷, 간단해요. 제 손잡이를 잡고 제단에서 뽑아주세요.>
“그거면 돼?”
<네, 그거면 돼요.>
의외로 정말 별거 없어서 나는 조금 긴장을 풀었다. 어차피 검을 가져가려고 해도 뽑아야 했기 때문에 딱히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후딱 끝낼 작정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에고 소드가 냉큼 뒷말을 덧붙였다.
<아, 그치만 의식에 응하실 분은 반드시 인간이어야 해요. 전 인간이 아닌 주인은 섬기지 않아요.>
“……너 말이야. 그런 식으로 야금야금 조건을 하나씩 붙일 생각인 거지?”
<아니에요. 이건 그저 절대 전제일 뿐이에요. 누구에게나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은 있잖아요.>
“정말 그 외의 다른 조건은 없는 거야?”
<네! 그 대신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해요. 그럴 수 없다면 그냥 이곳에 남는 것을 택하겠어요. 자, 어서 결정하세요. 절 데려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실 건지, 아니면 신의를 저버릴 건지.>
“…….”
이미 데려가겠다고 했으면서 네가 이제 와 어쩌겠냐는 투다. 이런 걸 두고 주객전도라고 하는 거겠지.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정말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한 모양이다. 하긴 애초에 나와 이사나가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된 것도 바로 저것이 원인이었다. 저 검을 인간만 들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었으니까. 그게 주인으로 삼는다는 뜻인 줄은 몰랐지만.
“자, 이사나, 뭐해? 어서 가서 검을 뽑아.”
“네? 제가요?”
시벨리우스가 등을 떠밀자 이사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검 자체에 저항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이 가져도 되는지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저 검은 인간만 섬긴다고 하잖아. 길운이 드는 검 같은 건 나나 엘한테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어차피 저 검의 주인이 될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은데?”
“으음, 그치만 인간이라면 알리사도…….”
“나만큼이나 큰 검을 들라고? 난 싫어.”
추천하기 무섭게 돌아온 대답에 이사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소녀인 알리사가 들기엔 상당히 큰 장검이긴 했다. 결국 이사나는 얌전히 상황을 받아들이고 제단 앞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여전히 걱정이 되긴 했는지 자신 없는 어조로 물었다.
“저기…… 파이어 버스터라고 했지? 정말 나로 괜찮아? 여기 대단한 사람들 많이 있는데. 마족도 있고……유니콘도…….”
<아뇨! 다 필요 없어요! 제 주인은 오직 인간이어야 해요, 인간! 인간이 이런 던전 밑바닥까지 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그거야말로 진정한 용사의 모습! 잔말 말고 당장 절 뽑아주세요! 어서요!>
“으음, 알았어. 그럼 잘 부탁할게.”
심호흡을 한 후 이사나는 손을 뻗어 에고 소드의 손잡이를 잡았다. 바로 그 순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검신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더니, 그의 몸을 순식간에 집어삼킨 것이다.
화르르륵!
“이사나!”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나와 일행들은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경악해서 달려가려는데 누군가 나를 뒤에서 붙잡았다. 돌아본 곳에는 카노스가 있었다.
“괜찮아. 위험한 건 아니니까.”
“불덩어리가 사람을 덮쳤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발끈해서 대꾸하자 카노스는 느긋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즉시 나는 숨을 크게 삼켰다. 이사나를 삼킨 불덩어리가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면서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더불어 드러나기 시작한 광경을 보자 안도감이 차올랐다. 빛 속에 서 있는 이사나는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단 하나, 눈에 띄게 달라진 점만 빼면.
“뭐, 뭐야. 이사나 씨……맞아?”
멍하니 묻는 알리사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다른 일행들 역시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그들이 알고 있던 이사나가 아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한층 성장한 키. 솜털처럼 부드러워 보이는 금색의 머리카락 아래 단정하고 매끄러운 얼굴선이 이어지고 있었다. 감고 있던 눈을 뜨자 푸른 보석을 박아 넣은 것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천천히 빛을 발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법이 사라진, 이사나의 원래 모습이었다.